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43화 (343/917)

#343

1.

영업 종료.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시우 형님!”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래, 너희도 고생 많았다.”

오늘로 길고 길었던 시우의 호스트바 홍보 대행도 끝났다.

조촐한 파티도 벌일 겸 로즈 글래스의 멤버들과 한바탕 술을 걸친 시우는 타카쇼와 단둘이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우, 내 영과 육신의 형제!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래서 단골은 좀 확보했어?”

“당연하지! 이대로면 얼마 안 가 흑자 전환은 물론이고 2호점도 낼 수 있겠어. 물론 그렇게까지는 할 생각 없지만. 첫술에 배부르려면 되려 배 터진단 말이지.”

마녀 사이의 입소문이라는 게 무섭긴 한 모양이다.

페리윙클의 도움으로 서비스를 개선하고 시우가 앞에서 대차게 어그로를 끌어주자 벌써 3달 치 예약이 전부 차버렸다고 한다.

심지어 이젠 그 남자 마녀가 없음에도 말이다.

타카쇼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시우에게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건넸다.

손을 맞잡자마자 어깨를 감싸며 껴안고 등을 두들겼다.

“몇 번이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모두 네 덕분이다. 그래서….”

타카쇼는 손목의 시계를 탈깍탈깍 풀어 시우에게 건네주었다.

굳이 브랜드 운운할 것도 없이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성공의 상징이었다.

“아 됐어, 넣어둬. 뭐 이런 걸 주냐.”

“너가 나 도와준 거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만 받아줘라.”

“됐다니까.”

“받아주라! 친구야!”

거의 떠넘기듯 억지로 시우의 손목에 시계를 채우는 타카쇼.

다시금 어깨를 다잡고 환한 건치를 내보이며 웃는다.

“앞으로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말해 줘.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어떻게든 도울 테니까.”

“그래, 마음은 고맙네. 술이나 마저 먹자.”

청춘영화의 한 장면을 찍고 있는 듯해서 괜히 속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한시름 놓였다.

“아, 페리윙클 마녀님이 새로운 술 거래처 알려주셨다. 조만간 현세에 나가보게 될 것 같아.”

“뭐? 현세? 그걸 보내줘?”

게헨나는 마녀를 위한 도시.

특유의 분위기와 보수적인 마녀들의 안정감을 위해 현세와의 교류는 절대적으로 제한된다.

가령 현세와 게헨나를 오가며 물자를 공급하는 밀수꾼들이 절대로 보더타운을 벗어날 수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현세행이라니.

“아도나이 백작님한테 임시 통행증도 발급받아 놨어. 아도나이 상회 측 밀수꾼이랑 직공급 계약이라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는 게 맘 편하겠다 싶더라고. 유럽 쪽으로 가는 거라 고향은 못 들르지만. 이게 성공한 사업가의 삶이라는 거지.”

“몸 조심해서 다녀오고. 괜히 탈주하지 마라.”

“내가 도망치면 가게는 어쩌고.”

-똑똑

실없이 낄낄거리며 술을 나누고 있자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제는 제법 친해진 폴이었다.

“타카쇼 형님, 마녀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어디 계시는데?”

“지금 옆에요.”

폴이 뭐라 하기도 전에 사르륵 흩어지는 녹발.

그다지 크지 않음에도 장신이라고 착각해버리는 훌륭한 비율.

길고양이처럼 차가운 인상과 그 이미지를 강화하는 시린 민트빛 눈동자.

한 손으로 쥐기 힘들 정도의 미드를 지닌 샤론 에버그린이었다.

예쁜 드레스 차림의 샤론은 가슴께를 누르며 타카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시우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샤론 에버그린이에요.”

“샤론, 여기는 어쩐 일이야?”

“너랑 제일 친한 친구분이래서 궁금해서 왔지. 전에 왔을 때는 얼굴도 못 뵀잖아.”

반면 깜짝 놀라 굳었던 타카쇼는 이내 능숙하게 샤론을 환대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받은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시우 이놈이 어찌나 여자친구 예쁘다고 자랑을 하는지 좀 시샘이 났는데. 이야, 이거 직접 뵈니 그냥 죽여 버리고 싶네요.”

“여자친구?”

여자친구라는 말에 귀가 쫑긋하고 움직인 샤론.

기분 좋은 듯이 웃더니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이상한 얘기 하고 있던 거 아니면 끼어도 되죠?”

“어이쿠, 곤란하네요. 한참 이상한 얘기 도중이었는데.”

“헤, 무슨 얘기였는데요?”

“결혼식장은 어디가 좋을지 애는 몇이 좋을지 시우가 상담을 요청해서요.”

“네? 진짜요?”

그렇게 타카쇼의 리드로 자연스럽게 3인 술자리가 완성되었다.

2.

“그래서 시우 이놈이 숫사슴을 잡아 온 거예요.”

“시우, 진짜야?”

“어, 그랬지. 근데 이 얘기 계속해야 하냐?”

“임마, 넌 에버그린 님이 즐거워하시는 거 안 보여?”

원치 않게 까발려지는 과거.

신명 나는 타카쇼의 썰풀이에 어느덧 한껏 빠져든 샤론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시우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때 딱 알았죠. ‘아, 이 새낀 진짜 또라이다’ 보통은 뭔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상황이 아니다 싶으면 굽히잖아요?

이 친구는 그런 거 없습니다. 아니다 싶으면 노빠꾸로 들이박는 거예요. 기개가 있죠. 남자 중의 남자.”

위신을 살려주고자 하는 타카쇼의 호의는 알겠지만 아까부터 저런 흐름이니 낯 뜨겁다.

“그쯤 해 주면 안 되냐? 내가 도와준 거 고맙다며….”

“왜에~ 난 재밌는데. 타카쇼 씨 말도 들어보고 싶었단 말이야.”

“미스 에버그린, 타카쇼 씨라고 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도 낮추시죠. 타카쇼로 좋습니다.”

“그럴까? 그럼 너도 말 편하게 해도 돼. 시우 친구면 나한테도 친구니까.”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자, 술 한잔 더 받으시죠.”

화기애애한 흐름으로 대화가 흘러가다 보니 어느새 두 세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술만 놓여있던 집무실 테이블에 과자나 라멘 같은 안줏거리들이 흩어져 있었고 말이다.

“아무튼 이야기만 듣다가 함께 술도 마시게 되니 영광이었어요. 샤론 님.”

“나도 시우한테 얘기만 듣다가 직접 보니까 더 좋았던 것 같아. 이런저런 옛날 일도 듣고.”

“거짓말도 많이 섞여 있으니까 걸러서 들어.”

타카쇼의 금칠이 실체화했다면 지금쯤 금으로 덧칠된 불상처럼 변했을 것이다.

여자친구 앞에서 위신을 살려주겠다는 마음이 참 고맙긴한데 정도가 지나쳤다.

“아무튼, 저도 오늘 즐거웠습니다. 두 분 시간 너무 뺏는 것도 죄송하니 슬슬 일어날까요?”

“응! 다음에도 셋이 같이 놀자.”

“넵! 다음에 뵙겠습니다!”

타카쇼에게 인사를 끝낸 시우와 샤론은 나란히 말쿠트 갤러리로 나섰다.

밤새 비가 왔는지 습기를 듬뿍 머금은 밤공기가 느껴졌다.

달력이 넘어가면서 확실히 겨울이구나 싶은 싸늘함이었다.

샤론은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시우와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푹신푹신한 쿠션이 끼어들어 꽤 행복감을 주었다.

“오랜만이네. 시우랑 산책하는 거.”

“그러게, 옛날에는 거의 매일 했던 것 같은데.”

“시우가 바쁘니까. 별수 없지 뭘.”

“미안해. 앞으로는 더 많이 시간 낼게.”

그러고 보니 이렇게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호스트바에서 근무하게 된 뒤로는 시간이 잘 나지 않았고 게헨나에 돌아와서도 쌍둥이와 함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문득 샤론의 옆얼굴을 보았다.

오뚝한 콧날과 선이 얇은 입술.

마치 꿈속의 요정 같은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앞만을 바라보고 있다.

슬쩍 허리를 안자 간지러운 듯이 웃음을 지으며 위를 올려 눈을 마주친다.

“시우야.”

“왜?”

“너 오딜이랑 오데트랑… 했지?”

진짜 다리에 힘이 덜컥 풀리는 느낌이었다.

물론 조만간 제 입으로 말할 생각이긴 했다.

쌍둥이에게 결코 선을 긋거나 멀리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처럼 샤론에게도 지금까지의 관계를 이실직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갑자기 실토할 상황이 오니 영 불편했다.

먼저 말하는 것과 추궁당하는 건 분명 뉘앙스 차이가 있을 테니 말이다.

어느새 멈춰선 걸음.

빤히 시우를 올려보고 있던 샤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응, 미안해. 숨기려던 건 아니야. 곧 말하려고 했는데….”

“아냐아냐! 혼내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그냥 정말 그런지 확인하고 싶어서.”

샤론은 시선을 피했다.

하긴 얼마나 쓰레기처럼 보일지는 예상이 갔다.

견습마녀에게 손을 대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

쌍둥이 자매 모두를 침대에서 품는 것도 금기.

그걸 비밀로 하고 다른 여자랑 자는 것도 금기이다.

금기 트리플 악셀을 달성한 상황이라 먼저 말을 꺼내기 어려웠던 점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샤론, 내 말 좀 들어줄래?”

“내가 먼저 말해도 돼?”

이 묘한 분위기는 뭘까?

뭔가 서늘한 긴장감이 흐르는데도 어쩐지 샤론의 반응은 평온하다.

근데 저 평온함이 환멸과 회의 혹은 경멸에서 나온 정떨어짐인지, 아니면 뭐가 뭔지.

제대로 파악이 힘들었다.

“나는 시우가 정말 중요해.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해. 마법 같은 것보다도 훨씬 중요해. 단언할 수 있어.”

샤론은 비했던 눈을 다시 똑바로 마주해왔다.

“너가 다른 사람이랑 잠자리를 함께하고. 나한테만 보여줬던 표정을 다른 사람한테도 보여주는 게 속상하고 질투나.”

“…샤론.”

샤론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시우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입술을 맞댄 것이다.

다시 얼굴을 뗐을 때 샤론은 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시우가 행복하면 좋겠어. 너가 나 때문에 눈치 보고 그러는 거 싫어.”

“나도 제대로 정리하려고 했어. 그런데….”

“에이~ 이야기할 필요 없어. 내가 말했잖아. 너가 내 눈치 보는 건 싫다고. 아, 이런 진지한 분위기 너무 싫어. 드라마 따라 해봤는데 감당이 안 되네.”

샤론은 모든 것이 말장난이었다는 식으로 손사래를 치며 팔짱을 풀고 앞서간다.

“응?”

어째서인지 그런 그녀의 손목을 덥썩 잡고 있었다.

화들짝 놀랐다는 양 돌아보는 샤론.

“나도 그래.”

“뭐, 뭐가?”

“먼저 말 못 해서 미안해. 나한테도 넌 정말 중요한 사람이야.”

멍하니 시우를 바라보던 샤론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응! 알고 있었어.”

늦은 밤.

지나가는 행인 따위는 없다.

거리에 도열한 상점들도 모두 문을 닫아 낮 동안 북적거리던 갤러리에 있는 것은 두 사람뿐이다.

샤론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은 채 다시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입술.

조금 더 진득하고 깊게.

그리고 오랜만에 맛보는 샤론의 혀끝에서는 씁쓸한 스카디 맛이 났다.

샤론 역시 거부하지 않고 시우의 허리를 바짝 붙잡는다.

키스가 끝나고 아랫배를 꾹꾹 누르는 물건에 샤론은 달뜬 눈동자로 시우를 올려보았다.

이미 여러 번 갖은 경험을 함께했던 두 사람이다.

서로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여기서?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

“숙소 갈 때까지 못 참겠어…서…. 저기 골목이면… 아무도 안 오지 않을까?”

시우에게는 좌표이동식이 있다.

샤론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뭐, 뭔가 스릴 있는 관계가… 더 돈독하게 해준다고 들었기도 했고. 시우가 싫으면 강요는 안 할게….”

그래서 거부할 수 있었느냐 하면….

그날 밤 말쿠트 갤러리의 골목에서는 그리도 구슬픈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EP.346 #75_오만과 편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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