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40화 (340/917)

#340

1.

디아나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포탈을 통해 귀가했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평소 걷는 속도의 1.2배속으로 날아갈 듯 걸었다.

아직 정오를 막 넘겼을 뿐, 예소드 백작과의 약속대로라면 밖을 나돌아다녀야 할 때.

그러나 오늘은 좀 특별한 경우다.

스스로에게 상을 주는 날인 것이다.

머리가 뜨거워지는 혼신의 듀얼을 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원체 감정이라는 것이 체력을 소모하기 마련이다.

아침부터 빡침-고뇌-절망-기쁨의 감정 곡선을 거친 디아나는 누구보다 지쳐있었고, 상으로 휴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레바나 대욕장의 프라이빗 풀에 누워 둥둥 떠다니는 디아나.

한 손에 송이째 포도를 들고 한 알씩 따먹으면서 기쁨의 자축파티를 벌였다.

“아~ 달아요~ 달아~”

오늘따라 포도가 너무 달다.

실로 통쾌한 명승부였다.

특히 꼭 혼내주고 싶던 상대를 찍어 눌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푸훗…!”

디아나는 멍하게 변해버린 시우의 얼굴을 떠올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좆밥이랑 게임 안 해요~’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연해지는 표정이란.

“풉… 푸훗…! 후훗…!”

사실 디아나의 스코어 중 하나는 제대로 룰도 모르던 상태에서 따낸 것이다.

“그게 뭐 어쨌다구요?”

또 경기하는 것은 귀찮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승자는 디아나다.

이거면 됐다.

“원래 세상은 결과로 말하는 거예요. 후후…!”

싱글벙글 웃음을 지으며 선베드 위에 편하게 몸을 눕히는 디아나.

얼마 만에 평화인가.

유리 돔으로 덮인 뜨뜻한 온천수가 흐르는 유수풀.

성성한 열대의 나무와 꽃들 사이에서 휴양을 즐기고 있자니 하늘이 지붕이오 산뜻한 꽃향기가 이불이다.

원래였더라면 솔솔 잠이 왔어야 하지만 오늘은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후후, 오늘 벌였던 명경기를 복기해 볼까요?”

딱히 힘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리플레이를 보며 자신의 멋진 플레이를 감상하는 것.

즉, 리플 딸딸이를 할 시간인 것이다.

디아나는 미리 챙겨왔던 위치보드 수정구를 켜고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오전의 경기를 회상했다.

워낙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가 두었던 수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한 수 한 수 다시 두면서 짜릿한 순간을 회상한다.

매섭게 몰아붙이던 디아나!

더욱 매섭게 반격하던 상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세에 몰린 디아나!

그러나 상대의 실수를 이용해 반격한 끝에 멋지게 승리를 거머쥐는… 그 순간!

“어라?”

실실 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씰룩이던 디아나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대국 중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석연찮은 점이 느껴졌다.

바로 시우가 연거푸 실수하고 디아나가 반격하던 그 부분이었다.

생선을 먹다가 잇새로 잔가시가 꼈을 때처럼 묘한 껄끄러움이 혀에 톡톡거렸다.

디아나는 다시 한번 시우가 허튼짓하던 부분을 반복해서 빼고 두길 반복했다.

“응…?”

그러나 해보면 해볼수록…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났다.

한창 대국이 진행 중 일 때는 디아나도 이것저것 떠올릴 여력이 없었다.

미친 듯한 난타전에 머리가 지쳐있었고, 암담한 상황 속 시우의 실수가 달가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게임이 끝나고.

조금 머리를 식히고 찬찬히 살펴보니 짙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디아나는 생각을 차분히 정리했다.

Q. 왜 이때 그는 마법을 갈무리하지 않고 무리한 공격에 들어왔는가?

A. 자신이 유리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Q. 그렇다면 왜 하필 디아나가 이미 승기를 잡은 소규모 교전지를, 그것도 필요 없는 룬을 뺏기 위해 교전을 걸었는가.

A. …… 왜지?

가 되는 것이다.

상대는 위치보드의 정석을 모른다.

하지만 마법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상태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디아나가 난전을 걸었을 때부터 맥없이 쓰러졌겠지.

그렇다면 이 행마는 이상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모습에 비해 너무 조잡하고 지극히 감정적이다.

“설마….”

디아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가슴은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이성이 소리치고 있었다.

“봐줬다고요?”

일부러 들키지 않게 교묘한 실수를 연발하며 기다려주었다?

디아나는 위치보드를 리셋시키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한번 복기해보았다.

단, 이번에는 다른 전제를 깔았다.

‘만약 마지막 게임에서 그가 일부러 게임을 던진 것이라면?’이라는 전제를.

그러자 의미 없는 헛짓거리였다고 생각했던 수가 다르게 보였다.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중요도는 현저히 낮은 곳에만 집중되는 시우의 행마.

또 이 수를 보면 교묘했다.

1을 악수로 10을 묘수로 본다면 6~7점을 책정받을 수 있는 수였다.

즉, 그 시점에서 디아나가 ‘상대가 일부러 져준다’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애매한 수란 의미이다.

이게 정말 실수라고?

이런 정교한 실수를 과연 실수라고 칭해도 좋을까?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몇 번을 다시 생각해보는 디아나.

그러나 복기하면 할수록 뚜렷해지는 사실.

싱글벙글하던 미소는 간데없다.

디아나의 손에 들려있던 포도는 불쌍하게 즙을 줄줄 흘리며 으깨져 있었다.

“감히… 나를 봐줬다고?”

99%의 확률로 확실하다.

시우는 사실상 승리가 확정된 시점부터 제 실력을 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로 교묘하게 반격의 실마리를 내어주며 자연스럽게 패배를 선택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디아나는 그걸 상대의 실책이라 굳게 믿고 희희낙락하며 양보받은 승리를 넙죽 받아먹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상대를 놀리고 훈수까지 둬주었다.

“아, 뒷골 땡겨….”

디아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감히 날 우습게 봐? 라는 생각에서는 분노가.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서 날뛰던 자신의 모습에서는 수치심이.

게임을 시작한 지 사흘이 된 애송이에게 패배한 점에서 경악이.

아무튼 간에 온갖 복잡한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런 상대 앞에서 훈수를 두고, 이겼다고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얼마나 같잖았을까?

쪽팔린다.

모멸감을 느낀다.

“당장 찾아가서 확 그냥…!”

진실을 캐묻고 다시 한번 제대로 방심하지 않고 덤빌 예정이던 디아나.

썬배드 위에서 벌떡 일어나 이를 갈았지만.

돌이켜보니….

‘어? 내일은 오지 않으시는 건가요?’

‘제가 왜요? 이미 이겼는데요? 유감스럽지만 저는 저보다 못하는 사람 괴롭히는 건 싫어해서…. 그럼 이만, 꽤 재밌었어요.’

…이 주접까지 떨고 온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당일, 혹은 하루 만에 돌아가 재대결을 신청한다?

안 그래도 새빨갛게 변한 얼굴이 모멸감에 터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설령 얼굴에 철판을 깔고 리벤지 매치를 신청했다 또 다시 패퇴당한다?

디아나는 그 굴욕과 모멸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후우…. 후우….”

디아나는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물 밖으로 나왔다.

분노는 별개로 인정해야 할 때다.

디아나가 편견을 지니고 무시하던 상대는 분명 강적이다.

적어도 5대5 맞수를 이룰 돌연변이다.

지금껏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던 것이 패착이었던 것이다.

디아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두툼한 책을 들고 방에 틀어박혔다.

지금 이 순간 나태함도 게으름도 없다.

위치보드는 결국 마법 지식에서 판가름이 나는 것.

이 수모를 갚기 위해서는 8시간의 자습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책을 펼쳐 들었다.

2.

데네브 제머나이 백작, 루시 예소드 백작의 다과회.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떠들던 두 사람은 각자 준비해온 서류를 정리하고 어느새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요새 디아나가 얼마나 기특한지 아시나요?”

“어머, 무슨 일이 있었나요?”

캐러멜시럽이 듬뿍 올라간 챈슬러즈 푸딩을 스푼으로 떠먹으며 함박웃음을 짓는 루시 백작.

데네브는 또 예소드 백작의 유별난 딸 자랑이 시작됐거니 싶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주었다.

“글쎄요, 데네브 백작도 아시겠지만 저희 디아나가 똑똑하고 예뻐도 굉장히 뭉그적거리는 성격이란 말이죠.”

“많이 얘기하셨던 게 기억나네요.”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서 따끔하게 혼내면서 밖으로 내보냈답니다. 아침을 먹고 나가서 저녁부터 돌아오지 말라고요.”

“아하.”

“그런데 벌써 일주일이나 약속을 지킨 거 있죠? 밖에서 잘 있다 와요. 일주일이나.”

데네브는 눈을 동그랗게 뜬 눈을 끔뻑이며 뒤늦게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게 끝이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놀다가 오는 게 그렇게 기특하다는 건가?

잠시라도 한눈팔면 울타리를 뛰어넘은 양처럼 사라져 버리는 견습마녀를 둔, 그리고 매번 붙잡으러 쫓아가야 했던 데네브로서는 심히 공감이 어려웠다.

세상 다 가진 행복한 얼굴인데 딴죽을 걸기도 애매해서 맞장구나 쳐주었다.

“어쩜…. 정말 기특하네요.”

“그렇죠? 그렇죠?”

루시 백작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데네브를 향해 디아나가 얼마나 부지런히 돌아다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그러다가 퍼득 떠올랐는지 데네브에게 묻는다.

“내 정신 좀 봐, 그러고 보니 여쭙고 싶은 점이 있네요.”

“네,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제머나이 백작가는 그 남자마녀와 친분이 깊다고 알고 있어요.”

“신시우 씨 말씀하시는 거죠? 중요한 손님이고 은인이니 당연하죠.”

쌍둥이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고, 쌍둥이가 좋아라하며 따라다니는 사람이기도 했으니.

“네, 그 남자.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죠?”

“뭔가 문제가 있나요?”

“요즘 디아나가 아침마다 그 남자를 만나러 호스트바에 가더라고요. 둘이서 위치보드를 한다는 데 혹시 승냥이 같은 나쁜 놈은 아닐지…. 걱정이 되어서요.”

“나쁜 사람은 아니니 크게 걱정 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거예요. 요즘 보기 드문 바른 청년이랍니다.”

“그런가요? 그런 사람이 왜 호스트바에서 일을….”

“그것도 친구를 돕겠다고 나선 걸로 알고 있어요.”

그거 정말 루시 백작다운 걱정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 한편.

이번 주제는 그나마 공감이 갔다.

데네브도 쌍둥이가 지나치게 시우와 붙어 다니는 것 같아 걱정하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물론 지금은 신뢰가 쌓여 함께 여행을 가는 것도 허락할 정도지만.

“혹시 디아나 양이 시우 씨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가요? 그러니까… 이성으로서?”

오히려 예소드의 견습마녀마저 시우에게 눈독을 들일까 은근히 걱정되어 슬쩍 물었다.

그에 대한 루시 백작의 반응은 단호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테이블을 탕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저희 딸 눈이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남자 마녀라니까 호기심에 몇 번 찾아가는 게 고작이겠죠.”

하긴 그 루시 백작의 딸이라면 그럴 법도 했다.

그녀는 정통파 마녀 중에서도 완고한 데네브가 아는 그 어떤 마녀보다도 스트레오 타입의 마녀였으니 말이다.

디아나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말이다.

“너무 걱정마셔요. 노예 출신인지라 게헨나에 생리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애먼 짓 할 사람은 아니랍니다. ”

“휴우, 데네브가 그렇게 말해주니 안도가 되네요. 그래도 조만간 얼굴은 봐야겠어요.”

견습마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예소드 백작은 좀 정도가 과한 것 같기도 하고….

데네브는 홍차를 홀짝 마시며 쓴웃음을 숨겼다.

“직접 보면 깜짝 놀라실 걸요? 정말 잘생기긴 했거든요.”

“흥, 남자가 다 거기서 거기지요.”

3.

생각보다 길어진 다과회가 끝나자 어느덧 밤하늘은 캄캄하게 물들어 있었다.

예소드 백작은 대욕장의 회랑을 걸어 디아나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저녁도 같이 못 먹었으니 뒤늦게라도 상황 보고를 받으려는 것이다.

“우리 딸~ 오랜만에 엄마랑 같이 목욕할까?”

사랑스러운 딸을 볼 생각에 싱글벙글 웃으며 디아나의 방문을 연 루시 예소드.

그리고 그 자리에서 꽁꽁 굳어버렸다.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끄으응…! 흐으으으…!”

공작 깃으로 만든 펜대를 쥔 채 테이블에 앉아있는 디아나.

침을 꿀꺽 삼키고 곁눈질하자 책상 위 수북하게 쌓인 마법 서적이 보였다.

디아나는 예소드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공부에 열중 중이었다.

백작은 입을 콱 틀어막았다.

코끝이 뜨겁고 목이 시큰거렸다.

한계치를 넘어선 기특함에 글썽글썽 눈물이 맺히려 하고 있다.

맙소사.

디아나가 이 시간까지 자습이라니.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봐도 똑같다.

얼굴을 찡그리며 뭔가 안 풀리는지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도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디아나가 지금껏 지겨운 공부를 붙잡고 있던 적이 있던가?

그녀를 견습마녀로 들인 이래 처음 보는 진풍경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행여 방해될까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선 루시.

“흐흑…흑…. 흐흐흑…! 장하다 디아나! 장하다 우리 딸…!”

잠깐 사이에 부쩍 성장한 딸의 모습에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줄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감격의 눈물이었다.

EP.343 #75_오만과 편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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