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39화 (339/917)

#339

1.

디아나는 호스트바를 나오자마자 근처 상점에서 위치보드를 하나 구매했다.

그리고 어제 눈 여겨 보았던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시킨 뒤 복기를 시작했다.

서로의 수를 전부 기억하고 하나하나 번갈아 둬보는 것이다.

“후우….”

디아나의 공격이 우습다는 듯 전부 막아냈던 시우.

초장부터 디아나를 흔들어내던 난잡한 수들.

꼼꼼히, 그리고 차분하게 되짚어 본 결과 한가지 생각이 가슴에 불쑥 떠오른다.

“정석대로 하면 그냥 이길 것 같은데요….”

그와의 대결 양상을 곱씹어보자면 항상 비슷했다.

난데없는 수를 두는 시우, 거기에 말리는 디아나.

디아나가 조급해진 마음에 뭔가를 해보려고 하면 깜짝 등장한 묘수에 침몰.

거기에 가장 화가 나는 점은.

“왜 하필 디스펠 핀이죠…?”

디스펠 핀은 위치보드에서도 굉장히 효용성이 떨어지는 전략이다.

일반적으로는 성공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만약 성공해도 메리트가 그다지 크지 않다.

성공한 사람은 기분이 째지고 당한 사람은 굉장히 꼴 받는 하이리스크 로우 리턴의 전술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농락성 인성질 플레이인 것이다.

그런데 디아나가 지금까지 위치보드를 하면서 당했던 디스펠보다 오늘 하루 시우에게 당한 디스펠 횟수가 많았다.

복장이 뒤집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냉정하게 생각하면 분하다고 씩씩거리다 끝날 일은 아니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그는 디아나의 의도를 간파하고 전략적인 포석을 통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끄으으윽…!”

아무리 생각해도 화났다.

“감히…”

정석도 제대로 공부 못하는 것 같은 얼치기가!

“해괴한 꼼수와 잔머리를 쓰다니요….”

하지만 이 처럼 승리를 도둑맞은 기분에서는 냉정한 평가가 불가능한 것이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절대 불가능하다.

“진짜 내일 죽었어요…!”

시우가 한 것처럼 특색이 명확한 전략은 몇 번씩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조커 카드.

잘 통해야 한두 번 유효하다.

오늘은 재수 없게 방심하다가 얻어걸린 것뿐이라고 굳게 믿으며.

디아나는 내일을 준비했다.

2.

“어서 오세요, 디아나 님.”

“위치보드 준비해주세요. 술 시킬게요.”

다음 날 아침 6시.

오늘은 아침조차 거르고 호스트바를 찾은 디아나는 이번에야말로 자신 있다 되뇌었다.

전략분석과 대책도 완벽하다.

어제 받은 굴욕을 되돌려주기 위해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바에 발을 들이고 즉시 판을 준비했다.

“굉장히 서두르시네요. 오늘 약속이 있으신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하는 시우를 보고 디아나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사람은 화가 나면 심장이 뛰니 말이다.

항상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빙글거리는 표정이나, 능청스러운 태도나, 재수 없는 플레이 방식이나, 남자 마녀인 점이나 모두 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후우….”

감정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는 것은 고상하지 못한 일이다.

불만이 있더라도 점잖게 돌려서, 상대방이 스스로 눈치챌 수 있도록 넌지시 일러주는 것이 당연한 영애(令愛)의 소양.

근데 이건 꼭 말해야겠다.

“저는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가요? 요새 아침마다 찾아오시는걸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톡 쏘는 디아나.

그걸 태연하게 받아치는 호스트 모드 시우.

“그렇게 뺀질거리는 점이 제일 마음에 안 들어요.”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흥…!”

마지막까지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에(디아나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콧방귀를 뀐 뒤 다소 거칠게 소파에 앉았다.

현재 종합 스코어는 2대 2.

만약 이 판을 디아나가 진다면 위치보드 초심자에게 역스윕을 허용하는 꼴이다.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기에 앞서 디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디스펠 핀이 특기인가 보죠?”

멈칫했던 시우는 성실하게 답변해주었다.

“제가 마법은 잘 모르지만 마법식 해석과 파훼에는 견문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렇게 안 될 거예요.”

“기대하겠습니다.”

디아나는 매섭게 눈썹을 올린 채 눈에 힘을 빡 주었다.

양자 간의 마력원 배치는 여느 때와 같았다.

정석 지향 정파 디아나.

정석 이탈 마교 신시우.

하지만 오늘은 조금 차이가 있었다.

언제나 포석을 다지고 차근차근 내실을 다진 이후 공격을 준비하던 디아나가 초장부터 공격적인 수를 남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우가 디스펠을 놓는 방식을 비유하자면 ‘지뢰매설’이다.

사방에 산개해 둔 무의미한 수에서 나오는 상정 외의 기습.

지금까지 디아나는 차근차근 내실을 다지느라 그 지뢰매설 작업에 대해 아무런 견제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제 이겼다! 라고 생각한 순간에 의표를 찔리지 않았던가?

“후후….”

그렇다면.

전략을 수정한다.

끊임없는 소규모 난전을 유도해 다른 수를 둘 틈이 없게 빡빡하고 조밀하게 압박한다면?

디스펠 같은 잔재주를 부리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디아나의 습관.

일이 계획대로 풀리면 슬며시 입꼬리를 비틀어 웃는다.

지금 그녀의 입꼬리는 잔뜩 올라가 있었다.

하룻밤 새 뒤바뀐 디아나의 기풍에 허둥지둥하며 대응하기 급급한 시우의 모습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흐음….”

그 증거로 시우가 장고(長考)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유일한 장기이던 디스펠을 봉쇄당했으니 그럴 법하다.

이게 야매 전술만 구사하는 마녀와, 차근차근 기본기를 닦아오며 정석을 밟은 견습마녀의 차이다.

꼼수에만 기대는 사람은 결코 정석의 표본을 이길 수 없다.

“흐음, 날카로우시네요. 오늘 안 좋은 일 있으신가요? 굉장히 공격적으로 하시는데.”

이것 봐라.

얼마나 궁지에 몰렸으면 이런 말을 하겠는가?

원래 대국에 임했을 땐 게임에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디아나는 고소함을 느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는 당신은 꽤 답답해 보이네요. 디스펠 핀 말고는 재주가 없나 봐요?”

“확실히 디스펠을 쓰는 건 힘들어 보이네요. 그럼 이렇게 해야죠.”

“한 번 발버둥 쳐보세요. 제가 제대로 된 마법이 무엇인지 보여드릴 테니.”

호기로운 두 사람의 말을 끝으로 치열하게 번지는 전화(戰火).

막는데 급급하던 시우의 기세가 일변했다.

똑같이 디아나에게 난전을 걸며 소규모 전투에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맞불을 놓는다. 좋은 선택이죠. 자신은 있고요?”

이때까지만 해도 디아나는 별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소규모 난전을 계속 유도하는 것도 정석이라면 정석.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엎치락뒤치락 끝없는 싸움이 펼쳐졌다.

룬을 빼앗고, 빼앗은 룬을 또 빼앗고, 또 빼앗은 룬을 또 빼앗는 정신없는 싸움.

“…….”

조금 시간이 지나자 디아나는 머리에 후끈후끈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원래 난전이라는 것은 머리가 아프기 짝이 없는 것이다.

소규모인 만큼 계산에는 손이 덜 가지만 그만큼 한 수로 상황이 뒤바뀐다.

한순간만 흔들려도 해당 전투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이….”

그렇기에 위치보드에서 난전이랑 보통 5~6개의 구간에서 벌어지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이 남자는 보란 듯이 더욱 박차를 가해 10구간, 15구간, 20구간으로 싸움의 불길을 번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공격적인 공세를 취하는 디아나에게.

더욱 공격적인, 본인도 감당이 안 될 진흙탕 싸움을 걸어버린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또또또 이상한 짓거리였다.

서로 머리채를 쥔 채 마구마구 흔드는 개싸움.

디아나는 ‘게임 진짜 더럽게 하네!’라고 속으로 외치면서도 시우의 공격에 맞대응했다.

이미 판이 벌어져 버린 이상 먼저 발을 빼는 쪽이 손해다.

“아….”

그렇게 정신없이 이곳저곳에서 일사불란하게 벌어지는 전투에 혼이 쏙 빼앗겼던 디아나.

시우가 공세를 그치고 전투를 갈무리하는 듯하자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드디어 좁은 시야를 벗어나 판을 넓게 볼 여유가 생긴 디아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어?”

처음엔 잘못 봤나 했다.

하지만 눈을 씻고 자세히 보아도 똑같다.

게임이 이미 져 있다.

분명 비슷하게 치고받고 싸웠다고 생각했다.

한 대 맞으면 한 대 치고, 한 대 때리면 한 대 맞고.

비록 교본에도 없는 막싸움이라 해도 이 정도까지 맞불을 놓는 시우의 실력을 내심 인정하면서도, 이 정도면 잘 싸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이미 승기가 기울어 있었다.

점거한 룬의 개수는 비슷했지만, 꼭 필요한 룬은 어느샌가 시우에게 넘어가 있다.

난전이 끝난 뒤 만신창이가 된 디아나의 진영에 비해 상대는 언제든지 체제를 바꿔 재도약할 수 있는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렇게 되면 마법식을 정리하는 순서에서 차이가 나버린다.

디아나가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고 링 위에 오르는 동안 상대는 풀 플레이트 갑옷에 워해머를 들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무엇을 해야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졌다.

마력원이 아직 전부 살아있음에도 디아나는 패배를 직감했다.

디아나가 정신이 없던 것처럼 상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난전이 끝난 이후까지 자연스럽게 대비를 해 두었다고?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만약 이게 정말 의도된 것이라면….

그건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괴물이다.

상상도 못 했던 결과에 디아나가 충격을 받았을 무렵.

-탁!

갑자기 활로가 보였다.

이대로 시우가 갈무리하고 굳히기에 들어왔으면 디아나는 저항 한번 못 해보고 유린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모하게도 난전을 이어가려 했다.

심지어 그곳은 디아나가 이미 우세를 점하고 있는 곳.

이 실수는 기회다.

디아나는 재빨리 시우의 공격에 대처하는 한편 기세를 다가듬었다.

종종 있다.

디아나가 그랬던 것처럼 시야가 협소해져 전체적인 대국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일이.

자신이 유리하다는 것, 혹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일이.

지금 시우의 행마가 딱 그 상태를 방증하고 있었다.

디스펠 밑밥을 까는 것도 아니고 승부에 영향이 가지 않는 영역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며 수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디아나는 필사적으로 승부에 임했다.

상대가 헛짓하는 동안 벌어진 격차를 따라잡았다.

방금의 참패가 실력이 아니라 ‘운’이었다는 확신은 디아나의 마음에도 한결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이겼네요. 제가.”

불리했던 상황을 뒤집고 대승리.

막판이라는 표현이 걸맞은 달콤한 과실을 움켜쥐었다.

디아나는 소심하게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떨며 승자의 쾌감을 만끽했다.

“대단하십니다. 도저히 못 당하겠어요.”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난전을 벌이니까 그렇죠. 본인이 벌려 놓은 걸 수습을 못 했잖아요?”

“스코어는 이걸로 3대 2네요. 제가 졌습니다.”

디아나는 신났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자꾸 씰룩이는 입꼬리나 벌름거리는 귀여운 콧구멍만 보아도 무척무척 신나 보였다.

그러므로 겸허하게 인정한다.

얌체같이 이상한 전략만 사용하는 괴짜긴 해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당신도 대단해요. 제가 아니라 다른 견습마녀였다면 속절없이 졌을 거예요. 남자의 몸으로 그런 경지까지 도달한 건 칭찬해주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런가요?”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했으면 제가 졌을걸요? 여기 보세요.”

최종 승리로 한결 관대해진 디아나는 시우에게 훈수와 칭찬까지 해주었다.

“아무튼, 열심히 해주었네요. 하마터면 방심 끝에 질 뻔 했어요.”

“과찬이십니다. 저도 디아나 님께 많은 걸 배울 수 있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디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또 올게요.”

“어? 내일은 오지 않으시는 건가요?”

“제가 왜요? 이미 이겼는데요?”

5판 3선승제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멋대로 정해버린 디아나.

당황한 듯한 시우의 표정을 보고 씩 웃었다.

이번만큼은 경박한 웃음을 숨길 수가 없어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까지 보이고 말았다.

“유감스럽지만 저는 저보다 못하는 사람 괴롭히는 건 싫어해서…. 그럼 이만, 꽤 재밌었어요.”

마지막 통쾌한 대사까지 날린 디아나는 바람 같은 발걸음으로 호스트바를 나섰다.

햇살이 참 좋은 날이었다.

2.

시우는 멍하니 위치보드를 바라보았다.

배웅조차 마다한 디아나가 뛰쳐나간 문도 바라보았다.

“뭔가 꼬였네.”

상황이 꼬였다.

시우의 목표는 디아나와 친해져 마력장 연구에 도움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자주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냥 봐주지 말고 이겨버릴 걸 그랬나….”

하지만 디아나는 척 보기에도 지는 걸 무척 싫어하는 타입.

괜히 철저하게 개박살을 냈다가는 자존심에 지나친 상처가 나서 다시 오지 않을까 봐 슬며시 져 주었는데.

설마 그것에 만족해서 떠나버릴 줄이야.

게다가 따지고 보면 디아나의 1점은 아무것도 모르던 때의 시우를 이긴 것이 아니던가?

오딜이나 오데트였더라면 ‘정정당당하지 못한 승부였어!’라고 말하며 또 한판을 덤볐을 텐데.

역시 견습마녀들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공 같은 점이 있다.

사실 다 큰 마녀도 비슷하긴 하지만 견습마녀의 경우 거의 럭비공 수준이랄까….

시우가 보기에 두 사람의 실력 차는 이미 현격하다.

최초 디아나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론 디아나가 무슨 짓을 벌여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이 게임은 결국 마법식 해석과 구성을 누가누가 더 잘하냐 게임이었고, 그건 시우가 자신 있어 하는 분야였으니 말이다.

아마 안대까지 벗는다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겠지.

그래도.

“나름 재밌었으니까.”

입맛에 맞는 게임을 듬뿍 즐긴 기분이었다.

시우는 기지개를 켜며 영업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의상실로 향했다.

그리고 어쩌면.

머지 않아 그녀가 제발로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시우는 조용히 생각했다.

EP.342 #75_오만과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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