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1.
“어?”
디아나는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죽었다.
15턴이나 소모해서 차근차근 만들어내던 마력포대가 단번에 죽어버렸다.
그것도 게임 시작 한참 초반에 만들어 두었던 시우의 포석이 엇박자로 연결되며 맥을 끊었다.
디아나는 대국 중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시우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노림수가 통한 것에 의기양양해 하지도 않고, 디아나의 공격을 꺾은 것을 우쭐해하지도 않았다.
다만 턱에 손을 받친 채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드를 훑을 뿐이다.
마치 모든 것이 예정대로라는 듯이.
준비하던 공격이 중간에 무산되는 것.
이런 상황을 일걷어 ‘허리가 끊겼다’라고 표현한다.
당연하지만 서로가 한수를 주고받는 위치보드에서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디스펠 핀.
심지어 한참 전부터 안배를 두었던 포석에서 비롯한 디스펠 핀이다.
처음부터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던 것이 아닌 이상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디아나가 무엇을 할지.
무슨 수를 준비할 지.
뚜렷한 윤곽이 잡히기도 전에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아니지.
그럴리가 없다.
이것도 아마 얻어걸린 것이겠지.
아무 의미없는 헛짓거리가 상황이 맞물리며 날카로운 묘수로 변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제법이네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게임을 운으로 하는 상대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정정당당하게 정석적으로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요상한 꼼수만 잔뜩 부리는 상대다.
디아나는 침착하게 죽은 마력포대를 살폈다.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다.
살려낼 수 있다.
안정화는 포기하고 새로운 마력원으로의 패스를 연결해 좌상단 부에 미리 점거한 룬을 활용한다면 5턴 안에 기능을 되찾고 발포하는 것이 가능하다.
어차피 디스펠 핀은 어디까지나 견제구이자 방어책.
위치보드는 상대의 마력원을 날려야 이기는 게임이다.
디스펠 핀만으로는 게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차분하게 차선책을 찾는다.
이것이 정석의 힘.
돌발스러운 상황에 휘청일지언정 금방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안정감이 있다.
“아….”
3수를 두고 슬슬 마력포대를 재작동 시키려던 때.
또 같은 일이 일어났다.
미리 깔아두었던 포석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디스펠 핀이 디아나의 마법진을 무효화한 것이다.
어떻게 저런 기민한 디스펠이 가능할까?
디아나의 영롱한 눈동자는 금방 답을 찾았다.
저 똘똘 뭉쳐있는 3개의 마력원.
언뜻 보기에 비효율적으로만 보이는 집결된 마력원은 한 순간의 출력을 필요로하는 디스펠 핀을 효과적으로 지원한다.
애초에 이걸 노렸던 것일까?
“…….”
아직 마력 포대를 살릴 기회가 한번 더 있다.
포대를 작동 시킬 수 있는 마력원은 총 세 개이니까.
하지만 정말 괜찮을까?
이번에 필요한 턴은 7턴.
총 40턴 가까이 투자된 마력포대가 또다시 디스펠 되어 완전히 죽어버린다면, 마법식의 분해와 재구성을 통한 재활용도 불가능하게 된다.
주요 전력이 뭉떵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정석이라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마력포대를 분해.
일부라도 회수하여 새로운 자원으로 삼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그것은 무리하지 않고 안정을 추구하는 디아나의 기풍(棋風)에 비춰봐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지였다.
어차피 장기전으로 끌고가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디아나는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비장의 한 수에 의표가 찔려 전략을 수정하는 꼴이라니.
여기서 물러선다면 이겨도 이기는게 아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정도는 인정해 줄게요.”
그의 자성마법을 봤을 때부터 어렴풋이 눈치는 챘어야 했다.
아무래도 마법을 디스펠하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눈치채고 막을 수 있을까?
디아나는 짐짓 룬을 점거하는 듯 딴청을 피우는 한편 포대 재건을 위한 포석을 새로이 쌓아나가려 했다.
“큭…!”
그리고 딴청을 피우자마자.
귀엽다는 듯이 포대를 완전히 해제하기 위해 꽂혀드는 디스펠 핀.
당장 복원을 위해 방비를 했어도 모자랄 판국에 상대의 방심을 기도하며 딴짓까지 했으니 대마가 죽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안될 거 고집하다 꼬라박았다, 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었다.
디아나는 지나친 방심으로 뒤집힌 판을 뒤늦게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기세를 타고 단숨에 공세로 전환한 시우, 너무 커다란 손실을 안고 싸워야하는 디아나.
일점 돌파의 파괴력을 한해서는 마력원을 밀집배치한 시우의 화력이 압도적이다.
하나하나 차지했던 룬을 맥없이 빼앗기고 뒤늦게 준비한 방어도 모조리 간파당한 채 두들겨 맞길 5분.
디아나의 마력원 하나가 파괴당했다.
괜히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마력원을 잃더라도 반격의 봉화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의 수비로 대처를 하며 다음을 기약한다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쓸데없이 오기를 부린 탓에 격차가 너무 벌어졌다.
적어도 수십 수를 내어주고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각자 한 턴의 한 수라는 룰이 유지되는 이상 대마녀가 와도 뒤집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두 번째, 세 번째 마력원까지 연쇄적으로 붕괴.
패배.
두 글자가 머리에 낙인처럼 찍혔다.
디아나는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명승부였습니다. 제가 운이 좋았네요.”
디아나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좋아하는 시우를 보고 발끈해 외치려다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건 실력으로 판가름난 것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디스펠 전략.
거기에 이미 망한 전략을 고집스레 붙잡고 늘어지던 자신의 자충수가 겹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꼴사납게 화내는 것보다 선선히 실수를 인정하는 백작 영애의 아량을 보여주는 것이 옳다.
“제가 너무 얕잡아 본 것 같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솔직히 공격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더라고요. 하하.”
“큭….”
묘하게 굴욕적이게 들리는 답변을 들으며 디아나는 태연하게 위치보드를 초기화 했다.
“이렇게 되면 2대 1로 제가 리드 중인거 맞죠?”
구차하다는 자각은 있다.
사실 디아나는 패배를 상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코어를 세는 것도 굳이 머리에 두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패배’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전제에서 한 경기를 잃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아, 어제것까지 전적으로 치는 거군요.”
“원래 평생치를 다 전적으로 치는 거에요!”
전혀 생각도 않고 있었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며 답하는 시우와.
발끈해서 답하는 디아나.
“그렇군요. 그럼 더 이어서 하실 건가요?”
“당연하죠.”
그렇게 디아나 기준 제 4국이 막을 열었다.
2.
심기일전.
일말의 방심이나 안일함을 남기지 않은 채 다시 게임에 임한 디아나.
잠깐 화가 나고 놀랐다고 해도 그녀의 플레이는 항상 안정적이고 정석적이었다.
반면 디아나가 보기에 시우의 플레이는 괴상하고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탁
마력을 머금은 시우의 손가락은 이번에도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곳을 찍었다.
디아나가 예상치도 못했던 뜬금 없는 한 수.
언뜻 보기에는 던졌다고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실수로 밖에 보이지 않는 무리수였다.
입이 근질근질하다.
도대체 뭔 생각이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대국에 관련된 이야기는 묻지 않는 것이 상호 간의 예의.
디아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할일을 했다.
어느덧 50수를 주고받고 대국은 중반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유불리를 따지자면 디아나 쪽이 7대 3으로 앞선다.
주요 룬을 차지하는 싸움에서 디아나가 슬쩍 난전 유도를 하면 주저 없이 포기하고 발뺀다.
그 와중에 싸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의미 없는 곳에 수를 낭비한다.
필수적인 방어 마법은 펼쳐놓지만 거북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을 뿐 어떤 반격의 낌세도 보이지 않는다.
“흠….”
세력 싸움도.
차지한 패스도.
룬도.
심지어 마력원의 배치까지도 앞서는 상태.
하지만 디아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전까지라면 몰라도 종잡을 수 없는 타이밍에 종잡을 수 없는 수를 시도하는 그의 전략을 두 번이나 겪었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굳히기만 해도 이기는 싸움인 것이다.
촉이 왔다.
타이밍이다.
지금까지 확보했던 자원을 투로로 전환해 파상공세의 시작한다면….
앞으로 22수 안에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무난한 확장에서 공격을 개시하려는 그 순간.
“저도 슬슬 싸워볼까요?”
시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디아나의 진형은 비유하자면 빈틈이 없던 풀 플레이트 갑옷.
마무리를 위해 칼을 빼든 순간 아주 잠깐 드러나는 이음매에 서늘한 칼날이 들어온 기분.
“문제 없죠.”
하지만 문제없다.
이미 대비는 완벽하다.
행여 놓치는 것이 있을까 디아나는 눈을 부릅 떴다.
또 이상한 짓거리를 하려는 것은 예상했던 바다.
디아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채 시우의 공격에 대비하려 했다.
막으면 이긴다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쿡 하고 아픈 곳을 찔러오는 디스펠 핀.
“또 뻔한 수작을…. 하지만 예상대로에요.”
디아나는 슬쩍 미소를 비쳤다.
절묘한 타이밍이긴 했다만 이번에는 디스펠핀에 대한 비책을 마련해 두었다.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무리수를 갑작스레 연결해 디스펠핀으로 활용하는 것은 시우의 특기.
허나 모든 화력을 한 번에 쏟아붓는 형태가 아니라 배분해 축차 투입된다면 어떻게 될까?
디아나는 준비한 마력 포대를 순식간에 10개로 쪼갰다.
어렵지 않다.
미리 분배에 필요한 룬을 확보해 두었다.
샤워기에 헤드를 꽂으면 물줄기가 여러갈래로 나가는 것처럼, 상대는 졸지에 10 가닥의 공격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도 전부 디스펠할 수 있을까?
조건이 까다롭기 그지 없는 디스펠 핀으로?
어림도 없는 소리다.
디아나보다 아득히 높은 상급자가 아니라면 그런 미친 짓 따위는 불가능하다.
마력원이 적당히 분배되어있는 디아나와는 다르게 시우의 마력원은 한 뭉치.
이렇게 된 이상 살을 주고 뼈를 친다.
마력원 하나를 내어줄 각오를 하고 공격을 이어가는 디아나.
“이건… 제가 이긴 것 같은데요?”
디아나의 마력원을 하나를 파괴하자마자 시우가 한 말이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에요?”
겨우 마력원 하나를 파괴했다고 저러는 건가?
이어질 디아나의 공격은 무엇으로 막을 셈인가.
디아나는 무시하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마, 말도… 안 돼….”
열 번의 공격이 모두 디스펠 당했다.
시우는 축차 투입을 강행하리라는 것도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모든 공격의 허리를 잘라냈다.
아무 의미 없어보였던, 낭비라고만 생각했던 수들이 이어지며 디아나의 공격을 차단한다.
마치 수없이 발사되는 미사일을 요격하는 방공시스템처럼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
“이번에도 명승부였습니다.”
“아직 안 끝났어요.”
모든 자원을 쏟아부은 공격은 디스펠되고 마력원은 하나 파괴되었지만 그럼에도 의지를 다지는 디아나.
이대로 지는 건 분하다.
자연스럽게 힘으로 찍어누르는 시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발버둥 쳐본 디아나였지만 결과는 같았다.
패배.
또 진 것이다.
“한 수 배웠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결과에 결국 와락 표정을 일그러뜨린 디아나는 재빨리 리셋버튼을 눌렀다.
“이제 2대 2죠? 다시 해요.”
“이거… 죄송하지만 시간이 다 되어서요. 오늘도 즐거웠습니다. 내일도 찾아와주신다면 얼마든지 반겨드릴게요.”
어느덧 훌쩍 지나가버린 시간.
디아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호스트바 밖으로 쫓겨나는 수 밖에 없었다.
EP.341 #74_게으름의 마녀(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