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
1.
“집에 가고 싶어요….”
디아나 예소드는 우울했다.
예소드 백작에게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기 형벌을 받은 지 어언 일주일.
미칠 듯이 떨어져 나가던 에너지가 마침내 밑바닥에 도달한 까닭이다.
“휴우….”
디아나는 불효녀가 아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걱정하신다면.
눈물까지 글썽이신다면 자식 된 입장에서 자그마한 기대에 부응조차 못 할까?
처음에는 디아나도 나름 분발했다.
첫 일 주일은 나름대로 타로타운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아르스 마그나 타운을 돌아다니기도 하며 최대한 부지런한 시간을 보냈다.
즉, 카페에 죽치고 앉아 커피만 마시거나 볕 좋은 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지만은 않았다는 뜻이다.
대신 산책, 연극 관람, 도서관에서 마법 공부 등으로 시간을 충실히 때웠다.
저녁에 돌아가 함께 식사할 때 오늘의 경험담을 풀어 놓으면 세상 흐뭇하고 뿌듯한 표정으로 디아나를 바라보는 백작의 얼굴도 나름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다.
디아나는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한다고 흥미를 갖게 되는 타입이 아니었다.
선천적인 에너지 부족.
열정과 끈기가 없는 천생 방구석 외톨이 타입이의 한계였다.
“집에 가고 싶어요….”
오늘로 몇 번 째인지 모를, 주 단위로 따지자면 수백 번은 늘어놓았을 푸념과 함께 디아나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또 뭐하고 시간을 보내야 하죠….”
어제는 타로 타운 시장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의 생필품을 구경했다.
엊그제는 극장가에서 따분하고 지루한 연극을 관람했다.
연극하니까 생각나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게헨나의 연극은 죄다 지루하고 재미없다.
참신한 시도 따위는 없이 수백 년 전부터 전해져 온 명서들을 재구성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디아나는 어깨에 걸친 양산이 유독 무거움을 느꼈다.
지금부터 무려 6시간이나 되는 시간을 밖에서 서성여야 한다는 무서운 진실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여차하면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을 골라 낮잠만 자다가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
게다가 예소드 백작은 자기 딸을 매섭게 내쫓은 것에 비해 이용 한도가 없는 신용증서를 들려주었다.
방을 잡고 빈둥거리다 돌아가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다.
하지만 그건 엄마를 슬프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루시 예소드가 디아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디아나 역시 엄마를 사랑했다.
모처럼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마음을 먹었는데 이렇게 또 원점 회귀한다면….
“오늘, 딱 하루만…? 하아….”
자꾸만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는다.
갈등이 꼬리처럼 계속 따라붙었다.
어디 재미있는 일 없을까?
뭔가 자극적이고 혹할만한 사건이라도 있으면 시간 빨리 보내기 참 좋을 텐데.
그렇게 서성이던 디아나는 오늘의 탐험지로 결정한 말쿠트 갤러리에 발을 들였다.
게헨나 최대 규모의 상점가인 만큼 좋은 카페도 많고 이것저것 마녀의 흥미를 끌 만한 물건도 많다.
“좋아요….”
엄마를 실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잔뜩 다양한 경험을 끝내고 돌아가는 것이다!
당찬 포부를 다지는 디아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근사한 카페.
디아나는 어지간하면 앉으려 하지 않았다.
편한 장소에 섣불리 앉았다가는 스스로의 게으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종일 죽치고 앉아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카페에 들어가 푹 쉰다.
또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닌다.
두 가지 선택지 사이의 내적 갈등.
하지만 또르르 굴러가는 디아나의 주홍빛 시선은 어느 마녀가 먹는 메뉴를 포착하고 있었다.
“흠, 저것만 먹을까요?”
디아나는 자리에 앉아 아리따운 잿빛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행복한 당충전 시간에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2.
생각보다 시간이 흘렀다.
여기 자리가 정말 좋다.
지나가는 사람과 마녀도 구경할 수 있고 특히 리큐르로 만든 셔벗이 올려진 아이스크림이 정말 일품이다.
모처럼 고생하며 돌아다닌 보람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집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디아나의 스승 루시 예소드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족이자 마녀.
그 어떤 품위가 훼손되는 행동이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깐깐한 마녀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디아나 역시 예법과 기품을 중시한다.
디아나가 예소드 백작가의 영애인 이상 설령 다른 사람의 시선이 거의 닿지 않는 한적한 카페라고 해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러려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갈한 자세로 앉아 먹는 것조차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데.
그 자체가 퍽 고역이었으며 디아나가 집 밖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집 안이라면 옷을 홀딱 벗고 다니던, 표류하던 낙엽처럼 물 위에 둥둥 떠다니건 상관이 없으니까.
이젠 진짜 포기해 버릴까 고민하던 디아나 옆으로 두 마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그거 들었어?”
“무슨 일인데?”
“남자 마녀 얘기.”
“남자 마녀?”
쫑긋.
흥미로운 듯한 소재에 디아나의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남자 마녀라.
뭔가 묘하게 이상한 어감이긴 하지만 그에 관해선 디아나도 얼핏 들은 바 있었다.
남자 주제에 무려 낙인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처음 이 소식을 접한 대부분의 마녀는 헛소문으로 치부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수 대 혹은 십 수 대에 걸쳐 만들어지는 것이 마녀의 자성마법이다.
남자가 만들었다는 점에서 조금 특별할 수는 있어도 어차피 그 수준은 안 봐도 뻔한 것이다.
게다가 정작 뜨거운 감자가 된 장본인이 현세로 나가 버렸기에 실체를 직접 본 마녀도 손에 꼽았다.
자연스레 관심은 사그라들었고 디아나 역시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얼마 뒤 상황은 일변했다.
게헨나 최초로 남성에게 정식 통행증과 시민증이 발부되었다.
거기에 공증을 선 사람이 무려 셋.
위치포인트의 광화문 지부장 수아 아가사.
게헨나의 유력 귀족 제머나이 백작.
공적 사냥꾼으로 경외 받는 티페레트 공작.
하나하나 보통 유명 인사가 아니었다.
그렇게 유력한 마녀들이 관심을 두고 공증을 서줄 정도라면 뭐든 가치가 입증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이런저런 소문들이 눈덩이처럼 따라붙었다.
제머나이 백작이 만들어낸 대 마녀사냥 결전 병기라더라.
그 정도 재력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남자 마녀 따윈 불가능하다.
아니다, 티페레트 공작의 내연남이라더라.
보더 타운의 어느 여관에서 둘이 같은 방을 잡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니다, 케테르 공작이 손수 뒤를 봐주는 실험체라더라.
케테르가 손수 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이어지는 추측성 아니다의 행렬.
뭘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디아나도 알지 못했지만 중요한 점은 지금 옆자리 마녀들의 대화에 깊은 관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정말? 자성 마법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도 최소 10 위계 이상?”
“그렇다니까~ 내 친구도 얼마 전에 만나고 왔대.”
“어디서 만날 수 있는데?”
“여~기 말쿠트 갤러리 끝 쪽에 호스트바가 생겼는데 그쪽에서 일하고 있더라고.”
호스트바?
호스트바가 뭐지?
어리둥절해하는 디아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대화는 이어졌다.
“술을 시키고 바를 이용하면 1명당 15분씩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더라. 우리도 가볼까?”
“흥미는 생기네.”
“어차피 금화 몇 푼만 주면 된다니까 가보자. 이런 기회 또 어디 있겠어? 안 그래도 예약이 길어서 빠르게 빠르게 만나야 한다더라고.”
“지금 바로 가자.”
잡담을 나누던 마녀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디아나도 남은 아이스크림을 허겁지겁, 그러나 품위를 잃지 않고 먹어 치웠다.
“남자 마녀인가요….”
마법을 구사하는 남자는 역사상 몇몇 있었다.
자신이 자성 마법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던 괘씸한 사기꾼도 놀랍지만 셋이나 있었다.
엄중한 심사를 받기도 전에 거짓말이 뽀록나고 대가를 치렀지만 말이다.
그러나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가 최초의 남자 마녀라면.
만나보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환상종으로만 여겼던 이마에 뿔이 달린 말이 있다는데, 그것도 여기 갤러리 근처라는데 구경하러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음….”
디아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음 때문이 아니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 마녀의 존재를 떠올리자마자 왠지 모를 거부감이 가슴에서 까슬거렸다.
그 거부감의 원천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남자 따위가 마법을?
마법이란 신성하고도 고결한 영역이다.
디아나는 그 아름다움과 현묘한 묘리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
마법이라는 학문이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심오하고 장대한 미지가 펼쳐져 있다는 것을 일면이나마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남자가 한다고?
옛날부터 엄마가 그랬다.
자기 전에 머리맡에서.
‘남자는 죄다 모자라고 덜떨어진 생명체니,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렴!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하면서 널 구워삶으려 들 거야!’
함께 식사할 때.
‘남자는 죄다 늑대란다! 우리 딸의 예쁜 외모를 보고 이용해 먹을 생각뿐이겠지! 네가 오죽 예쁘고 사랑스러워야지 말이야!’
함께 목욕할 때.
‘세상에 좋은 남자는 있을 수 있어! 하지만 네 옆에 접근하는 순간 좋은 남자는 아닐 거란다! 혹시 말을 거는 남자가 있으면 엄마에게 이야기 하렴!’
그 밖에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마녀랑 해야 한다는 둥, 남자는 마법도 다루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라는 둥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디아나가 알기로 소싯적 어머니껜 엄연한 인간 남자 연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그런 편향적인 교육 탓에 디아나는 11살 때까지 남자가 밤이 되면 늑대로 변해서 여자를 잡아먹는 줄로 알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런 교육이 딸 걱정에서 기인했다는 걸 파악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은연 중 편견이 남아있었다.
그런 음흉하고 속이 구린 남자가 신성한 마법을 구사한다라….
오랜 세월 동안 새겨진 고정관념을 위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디아나는 남자 마녀의 존재를 내심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차별적인 생각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괜히 더 찜찜하다.
“한번 확인해보면 알겠죠.”
귀차니즘이 경지에 오른 디아나지만 견습마녀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초적인 소양은 지니고 있다.
의문을 떠올리고 그것을 검증하려 드는 탐구심이다.
그게 없었더라면 디아나가 아무리 재능이 넘치더라도 계승 준비를 3년이나 앞당기진 못했을 것이다.
디아나는 카페를 나선 뒤 곧장 호스트바의 문을 두드렸다.
EP.337 #74_게으름의 마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