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1.
클라라의 합류로 방랑 생활에 차이점이 생겼다면 궁색하게나마 베이스캠프가 생겼다는 점이다.
나름 모닥불도 피워두었고 모래바람을 막아줄 천막도 생겼다.
또 가끔은 따뜻한 식사를 대접받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클라라가 솔선해도 제공해 준 것이었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발랄한 배려를 해주는 클라라.
뭔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그저 곁을 지켜주는 그녀가 고마웠기에 이렇게 먼저 말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소피아에게도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까.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클라라가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제가 공적을 사냥하고 다니는 건…. 케테르 공작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에요.”
“케, 케테르? 아, 아니야 미안. 계속해 줘.”
찔끔 놀란 듯이 움츠러든 클라라.
사실 케테르 공작은 일반적인 마녀가 만날 일이 없다.
마녀 사이에서도 범접하기 힘든 초월적인 존재.
균형을 위해 동족상잔마저 불사하는 절대자.
이런 인식이 강했으니 말이다.
케테르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마녀는 단 하나도 없을뿐더러, 짤막한 대화나 거래를 주고받은 마녀도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케테르와 연관되었다는 것은 그 마녀의 죽음을 의미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는 대가로 살생부에 적힌 호문쿨루스와 공적을 사냥하는 것. 그게 그녀가 요구한 일이에요.”
“아….”
아무리 괴롭고 준비가 되지 않았어도 아멜리아가 도망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시우의 목숨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계약이 이행되지 않는다면 케테르는 아무런 주저 없이 시우를 다시 가져갈 테니까.
역사 속 케테르는 그런 철혈의 행보만을 보여왔다.
“…사랑하는 사람이야?”
한없이 신중한 클라라의 질문에 아멜리아는 멈칫했다.
어떤 대답이 좋을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천히, 처음부터 풀어놓기 시작한다.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못했던 속내를.
“처음에는 그냥… 노예였어요.”
밤 시중을 거절했던 노예.
그때의 아멜리아는 오만했다.
오만하고 어리석었다.
예기치 못하게 스승을 잃고 떠맡은 마녀로서의 책임.
홀로 둘러싼 아집이라는 두꺼운 벽에 갇혀 네모난 하늘만을 바라보던 그 시절.
“첫만남에서 그는 제 부탁을 거절했고, 저는 그걸 모욕이라고 받아들였어요.”
한낱 노예 따위가 마녀의, 그것도 남작의 부탁을 거절했다.
거기서 오는 유치하고도 치기 어린 분노.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지 못한 아이처럼 일방적으로 화를 쏟아냈다.
“구태여 불러내 궂은일을 시키고, 힘들게 했어요. 그를 괴롭게 했어요.”
처음엔 그저 화풀이였다.
괘씸하니까, 미우니까, 짜증이 나니까.
그때 당시에는 고상한 변명을 들어가며 스스로를 속였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그저 투정을 부렸을 뿐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났다.
아무리 궂은 일을 시켜도 묵묵하게 수행하는 그의 모습에 언뜻 시선이 갔다.
굽신거리기 바쁜 다른 노예와 달리 꿋꿋하게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그를 눈으로 쫓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다른 이유로 그를 부르게 되었다.
아멜리아 본인도 규정을 내리지 못했던 감정을 시우가 알아차리는 것이 무서워서.
고압적인 자세로 그를 괴롭히기만 했다.
“계속, 계속 그를 불러들였어요. 제 옆에서 허드렛일을 시키고, 그때만큼은 그가 절 바라봐주었으니까. 그게 내심 좋아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만 했어요.”
결국 골이 깊어져 간다는 걸 알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했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납득시키던 아멜리아.
솔직하지 못했던 아멜리아 탓에 힘들었던 건 시우뿐이었다.
“힘들었겠죠, 괴로웠겠죠. 저는,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던 걸까요?”
미처 몰랐다고 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점이 사무치도록 괴롭다.
“후회돼요…. 돌이키고 싶어요 하지만….”
“…….”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떤 표정으로 절 바라볼지, 어떤 눈빛으로 마주하게 될지.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아멜리아….”
시우를 다시 보는 것이 두렵다.
아멜리아는 아직도 피를 토해내듯 원통하게 자신을 원망하던 시우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멜리아의 모습은.
아무것도 모르던 시우에게 용서를 구하던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가 느꼈을 배신감이 두렵고 또 두렵다.
시간이 지난 뒤 그가 남긴 쪽지도 두려워 펼치지도 못한 채로 간직하고 있다.
만약 그 쪽지에 적힌 내용이 아멜리아의 상상과 같은 것이라면.
그때는 정말로 나아갈 힘을 잃을 것이고, 그렇다면 시우 역시 케테르의 손에 죽게 될 테니까.
“아멜리아.”
아멜리아가 말주변이 없는 만큼 그렇게 훌륭하게 정리된 속풀이는 아니었다.
하염없이 넋두리하듯 제 생각만을 늘어놓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클라라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뒤로 이야기는 해봤어?”
“…….”
아멜리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클라라는 조금 더 나아가 물었다.
“용서는 구해봤어?”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 찾아가서, 용서를 구할래요.”
이 역시 비겁한 행동이라는 것을 아멜리아는 알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시우의 목숨을 대가로 갖은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시우는 마냥 화를 내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괴롭히고 못살게 굴던 아멜리아의 목숨을 ‘옳지 못한 일이다’라는 한마디 말과 함께 구해줬던 사람이니까.
그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서도 상냥함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흐음….”
클라라는 두 손으로 움켜쥔 찻잔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멜리아를 보았다.
마치 미숙하고 요령 없는 어린아이 같다.
이기적인 소녀가 짝사랑하던 소년을 괴롭히다가 후회하는 것처럼.
황금으로 자아낸 것 같은 가느다랗고 숱이 많은 금발.
같은 마녀가 보기에도 소름끼치는 아름다움을 내보이는 아멜리아 메리골드.
조금 더 위로해줄까?
아니면 여기서 등을 떠밀어줄까?
아직은 아니다.
아멜리아에게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많은 도움은 안되겠지만 그래도 너무 힘들면… 종종 이야기해 줘.”
“고마워요.”
“고맙긴 뭘! 다 돕고 사는 거지.”
반쯤 억지로 지은 클라라의 쾌활한 웃음소리.
잔뜩 찌푸려져 있던 아멜리아의 얼굴에도 아주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2.
오늘도 성황리에 영업 중인 로즈 글래스.
타카쇼가 빠르게 도입한 대기권 시스템은 가게 앞에 죽 늘어섰던 마녀의 행렬을 없애는 데 일조했다.
게다가 페리윙클의 호평이 공치사가 아니었는지 괜찮은 분위기에 괜찮은 술을 파는 술집으로서 3층은 아예 카페로 운영 중.
새로운 고객층까지 확보에 나섰다.
“하아….”
오늘만 10명이 넘어가는 마녀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던 시우는 집무실로 돌아와 담배를 뻐끔뻐끔 피웠다.
이제는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겨서인지 접대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이전보다 적다.
하지만 진귀한 생물을 보듯 호기심을 표하는 마녀를 상대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하겠다.
따라서 저녁 시간을 빌미로 하루 한 시간 정도의 휴식을 요청해 지금은 쉬는 중이다.
그때 아래층에서 번잡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시우 조수님이랑 완전 친한 사이라니까?”
“돈도 이렇게 준비해 왔는데 뭐가 문제에요?”
불만이 한껏 섞인 삐악삐악 거리는 목소리가 창 너머로 들려온 것이다.
쓱 고개를 내밀자 예상대로의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정숙한 드레스 차림에 하프 보닛을 쓴 쌍둥이가 가게 입구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게… 다른 분들도 많이 기다리고 계신지라….”
갑작스러운 진상 고객의 등장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리암.
하긴 그는 게헨나 생활 1년 차의 새내기라고 한다.
아직 견습마녀에 불과하지만 굉장한 저돌적인데다가 어마어마한 마이페이스를 자랑하는 쌍둥이를 상대하는 건 버거울지도 모른다.
“오딜 님, 오데트 님. 오랜만이에요. 리암 씨 괜찮으니 들여보내 주세요.”
““조수님!!!””
리암이 들여보내 줄 것도 없이 2층 창에서 시우를 발견한 쌍둥이는 폴짝 창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쌍둥이의 전매특허 창 넘어 들어오기였다.
시우가 팔을 벌리자 쌍둥이는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각기 한 품에 폭 안겨들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조수님이 코빼기도 안 비치길래 찾아왔지!”
“보고 싶어서 왔어요. 새로 취직하셨다면서요?”
“너무한 거 아니야?”
“맞아요! 저희한테도 이야기해 주셨어야죠!”
쌍둥이는 시우에게 마음껏 뺨을 비비며 반가워해 주었다.
아직 얼굴 안 본 지 3일이 채 안 된 것 같은데 3년 만에 본 것처럼 환대받는 느낌.
언제봐도 귀여운 오딜 그리고 오데트다.
“죄송해요, 요새 조금 정신이 없었어서.”
“죄송하면, 엉덩이 토닥토닥하면서 반겨줘. 원래는 이런 인사 절대로 허용하지 않지만… 조수님이니까 특별히 허락해주는 거야.”
“맞아요! 저는 참고로 드로워즈 안으로 만지는 것까지 허락해 드릴 거에요.”
“네네, 해드리겠습니다. 안으로는 좀 그렇지만요.”
안긴 채로 은근슬쩍 엉덩이를 내미는 쌍둥이의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심신이 피로했는데 옷너머로 느껴지는 말캉탱클한 감촉이 참 힐링된다.
그렇게 기묘한 인사를 끝내고나니 오딜과 오데트는 호기심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질문공세를 던져왔다.
“그나저나 조수님 어떻게 된 거야? 취직이라니? 그것도 다른 마녀한테 술도 따라주고 애교도 피운다면서?”
“스승님이 신용증서 뺏어가셨나요? 그럼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데….”
“아, 친구를 좀 도와주고 있어요.”
시우는 쌍둥이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길게 말할 것도 굳이 살을 붙이거나 뺄 것도 없다.
친구가 가게를 새로 열었는데 장사가 잘 안됐고, 홍보 겸 도와주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고작해야 술 좀 따르고 대화를 하는 정도라는 것까지.
“휴우, 나는 조수님이 자발적 성교육 교보재가 된 줄 알았지 뭐야.”
“저도 노심초사했는데 다행이에요.”
그제야 쌍둥이는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튼 이렇게 된 거 우리가 조수님의 시간을 사러 왔어. 다른 못된 마녀한테 조수님을 뺏기긴 싫거든.”
“저금통도 깨 왔으니까 놀아주실 거죠?”
“아니고…. 그건 좀 곤란한데요.”
모처럼 고마운 마음이지만 힘들 것 같다.
지금의 시우는 지명 대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홍보용 토템이다.
당연히 누군가 독점하는 것은 막아야 했고 그건 쌍둥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왜!”
“왜요!”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뺨이 이번에는 불만으로 빵빵하게 차오른다.
저렇게 잔뜩 들떠서, 그것도 저금통까지 깨서 왔는데 그냥 보내기에는 시우도 마냥 마음이 편치 않았다.
“대신 오늘 일이 끝나면 시간이 비거든요. 그때 만나면 괜찮을까요?”
“오늘?”
“밤에요?”
“네, 마침 슬슬 저택에 한 번 들러야겠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같이 술이나 마시면 좋겠네요.”
“야호! 좋아!”
“엄청 좋은 술 준비해올게요!“
시우의 제안에 방방 들뜨며 좋아하는 쌍둥이.
이대로 조금 더 힐링을 만끽하고 싶지만 슬슬 휴식시간도 막받이다.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저도 다시 가봐야 해서요. 이따 뵙겠습니다.”
“조수님! 저희 조수님이 일하시는 거 구경해도 괜찮을까요?”
“맞아, 무슨 일하는지 궁금해.”
구경?
딱히 못 보여줄 것은 없다.
이미 대기 순번이 엄청나게 밀려있긴 하지만 시우가 타카쇼에게 언질을 준다면 한 자리 정도 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근처 테이블로 잡아드릴게요.”
EP.329 #72_지명할게요(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