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1.
여행에서 돌아온 날부터 샤론은 홀로 가슴앓이를 하기 바빴다.
“에효….”
제머나이 백작의 녹봉을 먹고 사는 입장인 바.
앞으로는 샤론도 어느 정도 자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알비레오 백작이 말했던 ‘시우와 거리두기’를 소신껏 실행하기로 다짐한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타산이 아예 섞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재회한 시우와 몸을 섞으며 사랑을 확인했고 어쩐지 신뢰가 생겨났으니까.
그리고 이 이상 계약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나아가기엔 양심에 찔렸기에 한 결심이었다.
그래서 함께 여행을 간 날에도 섹스 각을 회피한 것인데.
사건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다.
어슬렁어슬렁 나타나더니 난데없이 술을 먹고 마차에서 잤다고 말한 시우.
뭔가를 감지한 듯한 쌍둥이의 이상 행동.
결정적으로는 돌아오는 길 모래사장에서 보았던 발자국과 시우의 반응이 문제였다.
어젯밤 새겨진 듯한 발자국은 샤론의 것도 쌍둥이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이즈로 미루어봤을 때 여성의 것임은 틀림없다.
따라서 샤론은 물었다.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이에 시우는 답했다.
‘내가 뭣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 진짜 혼자였는데.’
거짓말이었다.
혼자였다는 말부터 거짓말.
높은 확률로 필름이 끊겨서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말도 거짓말일 것이다.
당장 샤론만 해도 영체가 된 이후로 술을 많이 먹고 필름이 끊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샤론은 무작정 시우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시점까지는 믿음이 남아있었다.
어차피 시우에게 밝히지 않았던가?
잊지 않고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다른 여자와 놀아도 상관없다고.
그런데도 거짓말을 고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 생각해 돌아오는 길 마차를 살폈다.
그리고 발견해 버리고 만 것이다.
마차 구석에 있는 침실이 청결 마법을 사용한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분명 올 때와 상태가 달랐다.
즉, 시우는 전날 밤 어떤 마녀와 마차에서 술을 마셨고 아주아주 높은 확률로 침실에 청결 마법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어지럽혔다.
그 순간 샤론의 마음은 무겁게 짓눌렸다.
온갖 잡생각들이 떠올라서 수업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침대에 웅크려 앉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네….”
물론 샤론도 시우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고백은 남자가 해야지! 같은 안일한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던 것도 아니다.
구태여 시우를 구속하고 싶지도 않았고 부담을 넘기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은 같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 믿음에 금이 가버렸다.
-쿵쿵!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설마 시우인가 싶어 벌떡 일어난 샤론은 가운을 고쳐 입고 후다닥 1층으로 내려왔다.
재빨리 문을 열었을 땐 전혀 의외의 사람이 서 있었다.
연한 분홍빛 머리카락과 진한 마젠타색의 눈동자.
술에 취하고 잔뜩 초췌한 기색을 내비치는 엘로아 티페레트 공작이었다.
2.
별채의 응접실은 다른 공간보다도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게 여겨지는 까닭이다.
이미 잔뜩 취해있는 엘로아와 난데없이 술자리에 동석하게 된 샤론은 그녀가 연거푸 술을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 공작님, 어쩐 일로 찾아오셨는지….”
“이것만 마저 마시고, 말해도 되겠나?”
“그럼요. 편할 대로 하세요.”
이것만이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 술만 벌써 반병이다.
자율방어 체계가 작동하는 이상 급성 알코올 중독 따위로 뻑가는 일은 없겠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엘로아는 힘겹게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에버그린 양.”
“샤론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요.”
“…그대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 있네.”
그리고 사과라는 말을 들은 순간 샤론의 눈이 커진다.
여기껏 암운처럼 쌓였던 고뇌 속에서 번뜩이는 직감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나는… 시우와 그대 모르게… 동침했다네.”
언제나 그렇듯이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하기 마련이다.
샤론은 심장이 아랫배까지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 이게 꿈인지 아닌지도 잘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충격이다.
“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엘로아는 샤론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꾸욱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치부를 들춰야 하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그녀의 귀를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대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찾아왔네….”
“농담하시는 건… 아니…죠?”
아득한 현기증에 잔을 놓칠 뻔했던 샤론.
안 그래도 복잡했던 머리가 더더욱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티페레트 공작과 시우는 임시라지만 사제관계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마녀 사회에서 사제지간은 매우 매우 고결하다.
견습마녀와 마녀는 사제 관계임과 동시에 부모 자식 관계를 내포하기 있기 때문이다.
즉, 도의상으로만 스승은 부모와 같고 제자는 자식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간에서 받아들여지는 관계보다 훨씬 깊고 돈독하다.
물론 ‘임시’라는 말이 붙고 실제로 시우가 엘로아의 낙인을 물려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라고 여길 수는 없지만,
그녀가 시우와 성관계를 했다는 자백은 샤론에게 ‘나는 의붓아들과 성교했다네’로 들렸다.
아마 대다수의 마녀에게도 그렇게 들릴 것이다.
그 충격적인 발언 속에서도 샤론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
저도 모르게 힐난의 기색이 깃들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누가 먼저 제안했나요?”
“…내가 먼저 그를 유혹했다네.”
엄밀히 말하면 첫 번째를 제외하면 엘로아의 일방적인 유혹이라 여기기 힘들다.
하지만 엘로아는 시우가 샤론으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우는 이 기억을 잊어버렸고 스승으로서 한층 더 큰 책임을 통감하는바, 모든 잘못을 스스로 짊어지려는 것이었다.
“…하아….”
비흡연자 샤론은 격하게 담배를 태우고 싶어졌다.
이게 도대체 뭐가 뭔지 혼란스러워하는 샤론의 앞에서 엘로아는 더듬더듬 사건의 자초지종을 밝혔다.
시우와 처음 관계를 맺게 된 이유와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
그 이후로 깊어져 가던 마음.
해변가에서 시우를 보고 사랑을 나눴던 것.
그리고 그의 기억을 지운 것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잔뜩 위축되어있던 엘로아.
“후우….”
무거운 한숨에 찌부러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서러움을 느끼며 구슬 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던 엘로아의 어깨에.
부드러운 감각이 실린다.
간신히 고개를 들고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샤론이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찬연한 민트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에는 그 어떤 분노도 혹은 모멸도 없다.
그저 엘로아처럼 눈물만 글썽이고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하도 당황스럽고 예상도 못 했던 일이라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던 샤론.
하지만 엘로아의 자초지종을 듣는 동안 딱하고 안쓰러운 마음만이 가득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또 기껏 쌓은 추억마저도 지워야 한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남의 일 같지도 않고, 화를 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저 하나도 화 안 났어요.”
안도한 듯, 혹은 서러움이 복받친 듯.
부서질 듯 떨리는 엘로아의 작은 몸.
“미안하네…. 미안하네….”
샤론은 감히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기어이 울음이 터진 그녀가 마음껏 눈물을 쏟을 수 있게 가슴으로 받아주었다.
“쿠우….”
엘로아는 30분 이후 벌개진 코를 훌쩍이다 샤론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아무래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이 몰려있던 모양이다.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지는 한편.
그 동안 샤론을 가슴앓이하게 했던 문제가 사라졌다.
시우는 샤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기억을 지웠기 때문에 정말로 기억해내지 못한 것일 뿐이다.
그것만으로 정말 기뻤다.
엘로아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가 얼마나 시우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샤론에게도 똑똑히 전해져왔다.
어떤 각오로 기억을 지웠는지, 또 샤론을 만나 사과하러 왔는지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제지간이 대수인가?
사랑에는 국경도 인종도 없다는데.
엘로아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조금의 질투심이라던가, 혹은 독점욕 따위가 생길 줄 알았는데.
당장 그녀가 시우와 동침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가슴이 쿡쿡 아려왔는데.
지금은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시우를 이렇게까지 사랑해주는 사람이 자신 말고 있다는 것이 든든한 아군처럼 느껴졌다.
“안녕히 주무셔요, 공작님.”
샤론은 조용히 엘로아의 머리를 쓸어주고 방을 나섰다.
3.
사막 위로 비가 내린다.
생명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던 열사 위로 스며든 빗방울이 작은 야생화를 움트게 하는 장면은 비현실적이었고, 그렇기에 아름다웠다.
아멜리아는 자신의 앞에 힘없이 쓰러진 공적의 시체를 멀거니 내려보았다.
120명에 달하는 인간을 실험 재료로 사용해 추방당했고, 그 이후로도 여행객들을 납치해 심장을 빼낸 탓에 공적이 되어버린 마녀.
“그… 아멜리아.”
톡톡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아멜리아를 보고 클라라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멜리아는 다시 공적을 사냥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고, 클라라는 조용히 그녀와 동행했다.
저대로 혼자 둔다면 반드시 망가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허락을 구한 적은 없지만 멀직이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클라라를 쫓아내지도 않았으니 암묵적 동의 정도는 받았다고 생각중이다.
그리고 살생부에 적힌 곳에 도착한 아멜리아와 공적의 전투.
싸움에 돌입한 아멜리아는 전방위로 마법을 난사했기 때문에 클라라는 싸움이 끝난 이후에야 가까이 올 수 있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멍하니 서있던 아멜리아의 하늘빛 눈이 빙그르르 돌아 클라라를 향했을 때.
클라라는 움찔 몸을 떨었다.
전투의 여운이 남아있는 듯, 혹은 감정이 깎여나간 듯.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고 따라서 차갑다.
클라라는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 것 같은 심정을 숨기고 이내 당당히 아멜리아를 마주 보았다.
저 눈빛이 그저 궁지에 몰린 연약한 사람의 최후의 발악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너는 왜 공적을 죽이는 거야?”
클라라의 질문이 들려온 순간 아멜리아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마치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연약하고 서툰 내면이 떠올랐다.
클라라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렇게 힘들다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잖아.”
“…….”
“나도 많은 공적을 죽여왔지만… 네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그만두면 안 될까?”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그리고 클라라가 보기에 아멜리아는 그에 대해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멜리아가 압도적인 무력 차로 공적을 찍어누르는 모습은 도리어 자기 목을 조이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해야만 하니까요.”
함께 하되, 지나치게 다가서지 않는다.
힘들어하는 아멜리아를 위해 나름의 배려를 선보였던 클라라였지만 지금만큼은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말의 위로였다.
“공적을 죽이는데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 없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많은 희생을 낳아온 자들인걸. 정 네가 힘들다면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멜리아는 한참 동안 클라라를 바라보다 시선을 옮겼다.
“항상 생각해요.”
육신이 바스러져 꽃으로 변하고, 마침내 바람에 날려 사라져버린 덧없는 누군가의 최후를.
마음에 담는다.
“이 마녀도, 저처럼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착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
다소 난데없지만.
아멜리아가 처음으로 털어놓는 속내였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제가 빼앗아버린 건 아닐까… 라고.”
아멜리아는 클라라를 돌아보았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래요?”
“응, 얼마든지 들어줄게.”
클라라는 기쁘게 답했다.
EP.328 #72_지명할게요(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