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1.
제머나이 백작은 술을 사랑한다.
곡물 또는 과실을 발효해 만든 알코올의 세계.
그 심도(深度)를 추구하기 시작하면 끝을 알 수 없는 장대함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 마법과 비슷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입에 머금는 순간 들려오는 각기 다른 선율과 멜로디.
눈을 감는 순간 펼쳐지는 정향나무, 버터 볼, 오크통 그리고 은은한 체리의 아로마.
수십 년의 어둠 속에 웅크려 마침내 조화를 이룬 각기 다른 향들은 전위적이고 입체적인 전율을 안겨준다.
술을 한입 머금고 입안 구석구석 향과 맛을 즐기던 백작은 꿀꺽 주정을 넘겼다.
“하아~ 역시 일 끝나고 나면 술이 최고지.”
“언니, 이런 브랜디는 또 어디서 구했어?”
“행운의 마녀가 가져다줬어. 원래는 ‘붉은 지붕 살롱’ 경매에 나갈 마법 작물이 있었는데. 미리 선구매하고 싶다더라고.”
제머나이 백작 산하 라티푼디움에서 생산되는 마법 작물은 일반적으로 정제작업을 끝낸 후 말쿠트 갤러리, 제머나이 마도구점의 진열대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간혹 한정적이고 실험적인 재배를 통해 생산하는 희귀작물들은 ‘첫 번째 붉은 지붕 살롱’에 경매로 부쳐지게 된다.
예를 들어 이번에 페리윙클이 선구매한 ‘붉은 뿌리 제라늄’ 같은 것 말이다.
“잘됐네. 그 양반이랑 거래해서 틀어지는 일은 없으니까.”
“돈도 예상가보다 두 배나 쳐준다니 팔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아무튼 일과가 끝나고 이렇게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쌍둥이 백작의 즐거운 시간 중 하나였다.
평상시에는 각기 도맡았던 사업의 얘기나 쌍둥이 얘기가 나올 테지만 오늘은 유독 참신한 주제가 하나 있었다.
“그나저나 언니, 그거 들었어? 말쿠트 갤러리에 호스트바가 생겼다더라? 그것도 마녀 전용이래.”
“그래?”
참신하긴 했지만 알비레오 공작의 흥미를 끌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생뚱맞은 이야기라 ‘데네브가 저런 거에 관심이 있었나?’ 싶은 정도.
“근데 거기에 신시우 군이 일하고 있어.”
“에….”
저도 모르게 기품 없이 입을 벌린 알비레오.
현세와 왕래가 잦은 알비레오인 만큼 당연히 호스트바가 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돈 많은 여편네들이 남성 접대부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술 마시는 곳 아닌가?
“뭐, 뭐지? 왜? 돈이 부족하다고 시위하는 건가?”
알비레오는 이미 시우의 씀씀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제한 사용이 가능한 신용증서까지 주지 않았던가?
갑자기 일이라니.
그것도 마녀들을 상대로 재롱을 떨며 술 따라주는 일이라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재밌지?”
“재밌냐니.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문제이던가? 쌍둥이와 신시우 군을 이어주겠다고 나선 건 데네브 너잖아.”
데네브는 예상대로인 언니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잔을 코밑에 대어 향을 즐겼다.
“나도 깜짝 놀라서 알아봤는데. 여기 마담이 과거 신시우 군의 친구래. 그전까지 매출이 좀 부진해서 도와주는 모양인가 봐. 보니까 나름 건전한 것 같고.”
“그럼 그거 먼저 말해야지. 괜히 깜짝 놀랐어.”
“언니는 놀라는 모습이 귀엽거든. 그나저나 쌍둥이들이 알면 질투 좀 하겠는걸?”
성공적으로 알비레오를 놀라게 하는데 성공한 데네브는 기고만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조수님이!”
“호스트바에서”
““일하신다구요?””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리는 문.
백작의 집무실을 이렇게 버릇없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다.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제머나이의 아기새.
오딜과 오데트다.
잠자리에 들기 전 문안을 위해 집무실에 들른 쌍둥이는 백작의 대화를 엿들은 것이다.
“어쩐지 요새 안 보이더라니!”
“취직하셨을 줄이야!”
밀실 살인 사건의 트릭을 밝혀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오딜.
옆에서 거드는 오데트.
“오딜, 오데트.”
데네브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쌍둥이의 이름을 부르자 쌍둥이는 후다닥 집무실을 나섰다.
-똑똑
“”스승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러렴.”
오늘도 예의범절을 아주 잘 지키는 쌍둥이였다.
오딜과 오데트는 인사가 끝나자마자 달려와 스승님의 옆에 섰다.
“스승님, 조수님이 호스트바라는 곳에 취직하신 게 정말인가요?”
“그런데 호스트바가 뭔가요?”
“…….”
쌍둥이가 조수님바라기라는 것은 알비레오도 알고 데네브도 알았다.
그게 아직 여물지 못한 풋풋한 사랑이건, 아니면 천년만년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건.
선을 넘지 않는다면야 부모의 마음으로 응원할 생각인 데네브.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쌍둥이 앞에 할 말이 궁색해지는 건 당연했다.
“그, 저기, 뭐랄까…. 술을 마시는 곳이야.”
“정확히 말해야지 데네브.”
“그럼 언니가 설명해!”
데네브가 골려준 것을 되돌려 줄 겸 난처해하는 여동생을 지켜보던 알비레오는 빙그레 웃으며 쌍둥이에게 말했다.
“남성 접대부를 끼고 술을 마시는 즐거운 곳이란다.”
“접대부요?”
“접대부가 뭐지?”
“언니!”
어린 자식들을 놀리는 아빠처럼 짓궂은 말을 하는 알비레오, 손등을 찰싹 때려 응징하는 데네브.
물론 설명의 몫은 고스란히 데네브에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술을 마시는 사람 옆에서 술을 따르고, 대화도 해주고 가끔은 애교도 부려주는 그런 역할인 거지.”
작은 스승님의 고아한 설명에도 큰 충격을 받은 쌍둥이.
지금까지 엿들은 스승님의 대화 맥락에 따르면 조수님이 접대부로 호스트바에 취직해 마녀들의 시중을 들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것도 샤론 언니도 아닌 불특정 다수의 시중을!
“이…이럴 수가.”
“잠깐 눈 돌린 사이에 이런 일이….”
“아무튼 너무 늦었으니 들어가서 자렴.”
후다닥 이 곤란한 대화를 끝내는 한편 아연해하는 쌍둥이와 혹시 몰라 주의를 주는 데네브.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절대로 가면 안 된다. 우리 착한 쌍둥이들? 알겠지?”
“네, 작은 스승님.”
“안녕히 주무세요.”
오딜과 오데트는 꾸벅 인사를 하며 문안 인사를 마쳤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 둘의 발걸음은 거의 몽유병 환자의 것처럼 맥 없다.
방 안에 들어와서도 머리가 복잡했다.
“오데트, 비상이야.”
“알고 있어. 언니.”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이틀이나 안보이기에 어디서 뭘 하나 했다.
식사 자리에도 나오지 않고.
밤에 몰래 찾아가 봐도 없어서 오딜과 오데트가 합작해 만든 ‘필살 조수님 홀라당 넘어오게 하기 작전’도 보여주지 못했다.
혹시나 샤론 언니랑 둘이서 응응하고 있을까 싶어 별채에도 가봤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이대로 조수님을 샤론 언니에게 빼앗길 수 없기에 중도 난입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레노먼드 타운에 취직했을 줄이야.
“오데트, 생각해보니까 오히려 일발 역전의 기회 아닐까?.”
“왜?”
“술집에 취직해서 술 시중을 든다는 건 어쨌건 돈을 받는다는 의미겠지?”
“그렇겠지?”
갑자기 벌떡 일어선 오딜.
의자를 밟고 올라서더니 벽난로 위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백자로 되어있는 새 모양의 병.
생긴 건 조금 독특하지만 쌍둥이가 알뜰살뜰 용돈을 모아오던 저금통이었다.
“오데트 이거 깨자.”
“아하! 좋은 생각이야 언니!”
그제야 언니의 깊은 뜻을 알아차린 오데트도 탄복을 감추지 않았다.
오딜과 오데트는 하얀 시트를 깔아놓고 그 위에 도자기를 던져 깨뜨렸다.
-쨍그랑!
-촤르르르륵!
돈도 많고 가오도 있는 제머나이 가문의 용돈은 상식을 초월한다.
거의 5년 동안 모아온 무수한 금화가 깨진 병 조각 사이에서 반짝였다.
“우후후후.”
“위기를 기회로, 조수님의 시간을 남김없이 사버리는 거야.”
“좋아!”
2.
티페레트 공작은 술을 사랑한다.
슬플 때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술병을 기울였고, 기쁠 때는 기쁨을 나누기 위해 술잔을 채워왔다.
따라서 술잔에는 쓰디쓴 삶의 애환이 담기고, 때로는 그 애환을 딛고 나아가게 하는 한 모금의 미소가 담긴다.
또 때로는 사랑을 외면해야만 하는 비극이 담기기도 한다.
오늘 밤 빈속을 달래는 술이 유달리 쓰게 느껴지는 이유는 뒤늦게 깨달은 감정을 부정해야만 하는 고통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
시우의 머릿속에서 정사의 기억을 모두 지운 뒤.
엘로아는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이렇게까지 괴로우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강제로 꺼내 사용한 계약은 안 그래도 혹사당했던 몸을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몸에선 열이 오르고 삭신은 독감에 걸려 기침할 때처럼 아프다.
가장 괴로운 것은 그 통증을 느낄 때마다 잘려 나간 추억의 잔재를 느낀다는 것이다.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술병만 붙잡고 있었던 통에 엘로아의 방에는 텅 빈 술병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쌓여나갔다.
“후우….”
술 냄새가 진득하게 섞인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두통을 감내하는 엘로아.
시우는 아직도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은 걸까?
그를 제자로만 대하겠다 말했지만 막상 얼굴을 못 본 시간이 길어지자 보고 싶다.
당연히 사제 간의 정 때문이 아니라 일순 천륜마저 저버리게 했던 애절한 상사(相思) 탓이다.
그 마음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고.
취하고 나면 그리움이 더 선연하게 떠올라 또 술을 마셨다.
“이제는 뭐가 뭔지….”
알 수도 없게 되었다.
사실 해아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엘로아가 자신의 죄를 고해해야 하는 상대는 아직 하나 더 남아있었다.
사랑스러운 제자의 연인 샤론 에버그린이다.
기억을 지웠다 하여 지난 과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우가 기억하지 못한다 한들 남의 연인과 몰래 동침한 엘로아의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엘로아가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 역시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
이제 샤론을 찾아가 이실직고해야 하는데….
“…….”
엘로아는 몸을 일으켰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잡아떼며 샤론 에버그린이 머무는 별채로 향했다.
-똑똑
문고리를 잡고 문을 두들겼다.
초목도 잠든 야심한 밤이긴 하나 에버그린 역시 마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티페레트 공작님? 어쩐 일이세요?”
“늦은 밤에 실례했네.”
나이트가운을 걸친 샤론의 낯빛이 어두웠기 때문에 엘로아는 괜히 찔끔했다.
그녀가 이미 시우와의 외도 사실을 알고 있고 그것을 힐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술잔을 나누고 싶은데 괜찮겠나?”
“그럼요, 들어오세요.”
사실 현세에서도 둘의 접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엘로아의 오해로 첫 대면부터 시우를 만신창이로 만든 상태에서 조우했다는 것.
켄타우로스 폼을 들켰던 샤론이 은연중에 그녀를 피해 다닌 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그런 공작이 야심한 밤 술자리를 제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샤론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순순히 엘로아를 집안으로 들여주었다.
EP.327 #72_지명할게요(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