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23화 (323/917)

#323

1.

영업이 끝나고 오늘의 대성공을 자축하는 단출한 파티도 끝났다.

온종일 인파로 시끌벅적했던 호스트바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벽의 공기에 조용히 파묻혔다.

가뜩이나 술을 진탕 퍼마신데다가 파티에서 또 한잔 걸친 시우는 2시간 정도 쪽잠을 자고 일어났다.

원래 같았으면 내일 점심까지 숙취와 피로로 뒹굴거렸을 텐데 영체는 이런 게 참 편하다.

괜히 어슬렁거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 1층으로 나서자 가스등 하나를 켜놓고 만년필을 끄적이는 타카쇼의 모습이 보였다.

옷차림을 보니 아직 조금도 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안 자냐?”

시우의 부름에 타카쇼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여어, 호빠 에이스 자다 깼나? 한잔할래?”

“됐어, 난 오늘 샴페인만 10병 정도 마셨더니 속이 뒤집힐 것 같다.”

120명이나 되는 손님에게 15분씩을 할애하다가는 도저히 시간 계산이 맞지 않는다.

결국에는 동시에 몇 명씩 되는 손님을 상대하며 권하는 술도 일일이 마신 탓에 속이 불편하다.

“근데 뭐해? 혼자 불 켜놓고.”

“장부 작성이랑 고객 명단 정리, 그리고 발주 주문서 정리.”

타카쇼의 말대로 테이블 위에는 꽤 본격적으로 표와 발주서 같은 것이 놓여있다.

여자에 미친놈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 난리 통을 보내고도 야근이라니.

친구라지만 경탄의 박수가 절로 나왔다.

“고객명단은 중요하거든. 어떤 고객이 어느 정도 돈을 쓰는지 파악이 돼야 VIP를 구별할 수도 있고 하니까.”

“좀 도와줄까?”

“일없다. 거의 다 끝났어.”

시우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테이블에 다리를 놓고 편히 앉았다.

“시우, 고맙다. 페리윙클 님께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 전해줘.”

“에헤이, 그만 하라니까. 닭살 돋아.”

“기껏 준비했는데 망했구나 싶었다. 이렇게 극적으로 되살아날 줄은 몰랐지.”

“그래서, 잘 될 것 같아?”

사실 여기서 천년만년 일할 것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로즈 글래스가 시우가 없어진 뒤에도 운영이 되는가다.

다행히도 타카쇼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한적해지면 불러 달라고 명함 주고 간 마녀만 10명이 넘어. 다음에 또 오겠다고 언질 준 사람은 그 두 배 정도. 이 정도면 대박 중에 초대박이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타카쇼의 말을 듣고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사실 시우가 팔자에도 없는 호스트 노릇을 하게 된 것도 타카쇼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건전하더라? 매일 섹스섹스 거리던 너가 이런 가게를 차린 게 좀 낯설다.”

“이 새끼 이런 말 해도 되냐고 물어보면서 할 말은 다하네.”

타카쇼는 쓴웃음을 지으며 서류에 도장을 쾅쾅 찍었다.

“그런 게 바로 일류 호스트바라는 거지. 호스트는 딜도나 되려고 있는 게 아니니까. 2차 위주로 영업 돌리고 공사 치던 가게들은 얼마 못 가 망하더라.”

“그 말 전에 너한테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앞으로도 이런 운영 방침으로 갈 생각이야. 좀 고정 고객이 생기면 다양한 이벤트도 열 생각이고. 단체로 협해로 피크닉을 간다던가, 현세의 물품들을 가져와서 설명해 준다던가.”

마지막으로 서류 작업을 끝낸 타카쇼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아무래도 피곤해서인지 텐션은 평소보다 훨씬 낮지만 표정만 봐도 안다.

지금 타카쇼가 엄청나게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너도 많이 변했다. 얼굴값 못하는 처참한 여성 편력의 모솔아다 신시우가 그 콧대 높은 마녀들을 희롱하다니. 비결이나 좀 알려줘라.”

“모르겠다.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되더라.”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예전에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하던 마녀도 이젠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어쨌건 우리 둘 다 용 됐네.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배수로나 파던 노예 두 명. 당당히 출세하다!”

“넌 안 팠잖아 씹새야.”

“어허, 섭섭하긴. 나는 니가 배수로 파는 동안 마녀님들 배수로 파드렸지.

내가 오늘 보니까 너도 곤조 부리지만 않았으면 나랑 같이 배수로 팠을 것 같던데. 내가 앞 너가 뒤.”

“와…. 생각만 해도 좆같네. 눈 마주치면 죽이고 싶을 것 같은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자 마음이 편해진다.

그때, 타카쇼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물었다.

“아, 맞다. 근데 너 여기서 일하는 거 여자친구분께는 허락받았냐?”

“어?”

“그래도 명색이 호스트바인데. 질투 하지 않으셔?”

질투?

허락?

뭔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다.

“…괜찮지 않을까? 내가 엄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타카쇼는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신시우. 많이 변하긴 했네. 그래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한 우물에만 갇혀 있을 필욘 없지. 기왕 이렇게 된 거 게헨나 산부인과 VIP나 먹어라.”

“헛소리말고 너도 잠이나 자. 내일도 아침부터 영업 준비해야 하잖아.”

“그래야겠다. 넌 안 자냐?”

“난 이제 안 자도 되고, 엄청 피곤해도 진짜 조금만 자도 돼.”

“어이어이, 진짜 마녀가 되어버린 거냐고.”

타카쇼는 시우가 마녀가 되건 마녀가 아니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이다.

“일 끝나고도 종종 놀러 와. 내가 맘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너밖에 더 있냐.”

“다음에 사 올 거 목록 적어주면 가져올게.”

“그래 주면 고맙지.”

가벼운 인사를 나눈 타카쇼는 숙소로 어기적어기적 기어들어 갔다.

2.

마법은 복합적인 학문, 단순히 머리가 좋다고 해서 다룰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많은 마녀가 비유하길 마법이란 한 편의 정교한 오케스트라를 써 내려가는 것.

단순히 체계적인 지식 늘어놓기 뿐 아니라 예술적 영감 또한 중요하다.

자고로 정신의 승화와 초월은 예술에서 오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따라서 마녀들은 견습마녀시절부터 음악, 미술, 무용 등 교양수업에도 매진한다.

루시 예소드의 뒤를 이을 디아나 예소드 역시 주에 한 번 있는 발레 수업에 열심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소드 백작은 열심이라고 알고 있다.

“푸후…. 덥다.”

예소드 백작의 저택에 위치한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무용실.

4M가 넘는 층고의 두 쪽 벽면엔 거대한 거울이 설치되어있다.

축구는 무리더라도 풋살은 충분히 가능할 정도의 넓이를 지닌 무용실엔 디아나의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널따란 무용실의 코너에 놓인 쿠션.

그걸 둥지처럼 동그랗게 모아 위에 퍼질러져 있는 디아나.

땀에 젖어 언뜻언뜻 살갗을 내비치는 새하얀 타이즈와 그 위에 입은 레오타드와 베이지색 토슈즈.

에드가 드가의 무덤 앞을 지나가면 벌떡 일어나 그림을 그려줄 것 같은 아리따운 발레복을 입고 있다.

예소드 백작이 훔쳐보고 있을 때는 열심히 연습하는 척을 했다가 멀어졌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이래서 운동은 진짜 싫은데요….”

토파즈 색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불만스럽게 빛난다.

디아나는 운동이 싫었다.

앉아서 가만히 건반만 두드리며 피아노를 치고 싶었던 디아나가 발레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순전히 루시 백작의 등쌀에 떠밀렸기 때문이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활동량이 한겨울 다람쥐 수준에 수렴하는 디아나를 위한 선택이었다지만.

정작 당사자는 귀찮기 짝이 없을 뿐이다.

자, 그럼 이 발레라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성가신 운동인가?

모처럼 곱게 묶어둔 잿빛의 머리카락도 흘러내리는 것처럼 흐트러진다.

딱딱하기 짝이 없는 토슈즈는 발을 꽉꽉 옥죄인다.

더군다나 춤 한 곡만 춰도 쇄골에 맺히는 땀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더군다나 이 레오타드랑 타이즈.

어찌나 몸에 찰싹 달라붙는지 거울을 보고 있자면 괜스레 민망해질 정도이다.

어렸을 때나 예쁘다고 좋아했지 이제 다 큰 숙녀가 보기에는 ‘누구 좋으라고 입는가?’라는 의문이 들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치 활동 끝.”

이제 2시간 정도 여기서 빈둥거리다가 점심을 먹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낮잠을 자고, 3시쯤에 티타임을 가진 뒤 정원으로 나가 유유자적 풍류를 즐길 것이다.

그러다가 저녁 먹고 욕장에서 3시간 정도 시간을 때우다가 자야지.

야심 찬 하루 계획을 세우던 디아나는 소름이 쭈뼛 돋는 것을 느꼈다.

벽면 거울에 문득 스친 한 사람.

예소드 백작이 팔짱을 낀 채 땡땡이를 치는 디아나를 노려보고 있던 것이다.

“어… 엄마?”

디아나는 뒤늦게 일어나 연습하는 척을 하려 했지만 백작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제 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

게다가 오늘은 작심하고 온 듯 기세가 심상치 않다.

“디아나,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셈이니?”

“잠깐 쉬던 거예요. 다시 연습할게요. 엄마, 제가 연습하던 동작 한 번 보실래요?”

“엄마를 바보로 아니? 내가 나가자마자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는 거 보고 있었단다! 엄마랑 열심히 연습하겠다고 약속했잖니! 엄마가 그렇게 많은 걸 바랬어?”

평상시의 애교작전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예소드 백작은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고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법 공부도 좋지만, 밖에서 뭐라도 하라고 누누이 이야기했잖니! 응? 발레도 일주일에 깨작 네 시간 하는 건데! 이것까지도 게으름 피우고 싶었어?”

“…죄송해요, 엄마….”

디아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면목이 없다는 듯이 갈 곳을 잃은 손.

풀이 죽은 듯이 내려앉은 어깨는 완벽한 반성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연습하다보니 너무 발이 아파서 그랬어요. 앞으로는 거짓말하지 않을게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는 울먹임이 가득하다.

방울방울 디아나의 갸름한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

플랜 A 애교 작전이 실패할 때 꺼내 드는 플랜 B, 반성의 눈물연기이다.

이제껏 실패한 적이 거의 없는 디아나의 필살기이기도 했다.

한껏 벼르고 왔던 예소드 백작.

단호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도 흠칫 꿈틀거렸다.

조금만 방심했더라면 껴안고 달래줄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짝 차려야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게으름뱅이인 아이로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사실 아이라고 불려야 할 나이도 진작에 지나지 않았던가?

“눈물 뚝! 다 알고 있으니까 연기 그만해!”

“훌쩍, 연기 아닌데….”

연기가 아니라는 주장과는 다르게 수도꼭지 잠기듯이 잠기는 눈물샘을 보고 있자니 예소드 백작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되겠죠?”

“당연히 안되지! 게으름에 거짓말, 거기에 연기까지? 엄마 쓰러지는 꼴 보고 싶어?”

필살기가 무시당한데다가 서릿발 같은 꾸짖음까지 이어지다니.

이번 사태가 어물쩍 넘길만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곧이어 백작의 입에서 대충 짐작하고 있던 디아나조차 깜짝 놀랄만한 파격 선언이 떨어졌다.

“집에서 나가렴.”

“…네?”

더듬더듬 되묻는 디아나.

“바, 밖에요?”

“그래! 매일 집구석에만 있어봤자 빈둥빈둥 뒹굴뒹굴하기나 할 거니 차라리 엄마 눈 안 보이는 데서 해!”

“그치만…. 집이 제일 편한걸요….”

“쓰읍!”

디아나는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집 밖으로 나가라니 설마 그런 무시무시한 형벌이 내려질 줄은 몰랐다.

디아나는 집에서 멀어질 때마다 거리에 비례해 체력이 떨어지는 패시브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징벌이라해도 예소드 백작은 무시무시한 딸바보이다.

디아나를 완전히 집 밖으로 쫓아내려는 것은 단연 아니었다.

“매일 아침 먹고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하다가 저녁 먹을 때 돌아오렴! 당연히 욕장도 가면 안 돼!”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늘부터란다. 지금! 당장! 나가!”

“네… 엄마….”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낙담하는 디아나.

발끝을 바라보는 디아나의 사랑스러운 뒤통수에 예소드 백작은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딸을 밖에 내놔야 한다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끌어안고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지?’를 연발하며 어루만져주고 싶다.

“후우….”

그러나 참아야 한다.

지금은 백작이 옆에서 잔소리라도 할 수 있지만 낙인을 물려주고 나면 디아나 혼자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하지 않는가?

고질적인 게으름은 질병이다.

디아나의 게으름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예소드 백작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다.

“힘내렴… 우리딸….”

무용실에서 탈의실로 힘없이 걸어가는 디아나의 뒷모습을 보며 루시 예소드는 눈물 젖은 손수건을 물어뜯었다.

EP.326 #72_지명할게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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