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1.
오후 1시.
개전의 날이 밝았다.
밤새 그리고 오전까지도 접객 매너에 관해 공부하던 시우는 문득 창밖을 내려다보고 오랜만에 속쓰림을 경험했다.
“타카쇼, 저거 뭐냐. 좀 무서운데.”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너 도대체 뭘 어떻게 살아온 거냐?”
커튼 사이로 보이는 말쿠트 갤러리의 골목에는 사람이 가득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녀들이 줄지어 서 있다.
게헨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타카쇼도, 같이 노예 생활을 한 시우도.
태어나서 저렇게 많은 마녀의 행렬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아직 가게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페리윙클이 적당히 소문을 흘려주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후우… 이건 기회야. 미래의 고객들께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거야…. 난 할 수 있어….”
“슬슬 준비해야지.”
옆에서 중얼거리던 타카쇼는 덥썩 시우를 끌어안았다.
가게 앞에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입장을 기다리는 손님이라니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저걸 다 어떻게 감당할지 부담스러운 한편, 시우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고맙다 친구야. 너가 준 기회 절대로 놓치지 않을게.”
“다 돕고 사는 거지. 나도 너 덕분에 많이 덕 봤는데 뭘 또 남사스럽게 그러냐.”
타카쇼보다도 정확하게 사태를 예상했던 시우지만 눈앞에서 보니 감회가 다르다.
물론 몸을 팔 생각으로 타카쇼를 돕기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시우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미끼상품.
한 테이블당 15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며 순례를 돌 예정이다.
최고가의 술을 구매하는 마녀에 한해 서비스 차원에서 한 시간 정도 지명이 허가되며, 당연히 2차는 불가이다.
남자 마녀의 존재가 없어도 고객이 유치될 정도로 어그로를 끌어주며 대략 2주 정도 일을 거들어 줄 생각이었다.
“타카쇼. 근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근데 그건 둘째치고 솔직히 별로 자신이 없다.
그냥 대화하는 거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시우가 해야 하는 것은 ‘접객’이다.
더군다나 저 정도의 숫자에 까다롭기 그지없는 마녀들이 상대라….
“무슨 소리야 너 잘할걸? 틀림없어.”
별 기이한 말을 한다는 듯 쳐다보는 타카쇼.
어디서 이런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거울로 꾸밈새를 확인했다.
깔끔하게 넘긴 올백에 제비 꼬랑지처럼 치렁치렁 늘어진 옷이 뭐가 예쁘다는 건지.
타카쇼는 체인 달린 외눈 안경까지 권했지만 극구 거절했다.
가끔 마녀들의 미적 기준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럼, 전설 한 번 써볼까?”
“좋지 친구.”
완벽한 양복 핏의 두 사람이 뚜벅뚜벅 정문으로 향한다.
게헨나 최초의 호스트바 로즈 글래스가 공식적으로 문을 연 기념비적인 오후였다.
2.
“이렇게 마녀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현재 업장의 크기에 비해 많은 분이 찾아주신바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대기표를 발부하고 있습니다.
원격 수정구의 연락처를 알려주신다면 순번에 맞춰 즉각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가는 것이 번거로우신 분들은 2층 3층에 마련된 살롱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실 수 있으니 편하실 대로 이용 부탁드립니다.”
고객이 많이 찾아왔다 하여 무작정 손님을 받아서는 안 된다.
호스트바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최대 30명 선.
정숙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해야 할 고급지향형 호스트바가 도떼기 시장처럼 변한다면 참사도 그런 대 참사가 없다.
따라서 타카쇼는 파트를 넷으로 나누고 대기권을 발부해 하루에 최대로 수용할 수 있는 고객을 120명으로 제한했다.
또한 기다린 마녀들을 대상으로는 양해와 감사의 표시로 미들급의 주류를 무료로 제공했기에 별다른 잡음 없이 접객이 시작되었다.
“12번 테이블에 안주 떨어졌다. 보충해. 치즈를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스틸턴 치즈 위주로.”
“네!”
“2번 테이블 와인 주문 들어왔으니 디켄터 준비해 줘. 캐비어 들어 왔던가?”
“오늘 새벽에 들어왔습니다.”
“먹어보고 상태 괜찮으면 같이 내보내.”
“네, 지배인님.”
타카쇼는 서비스와 안내를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며 불편 사항을 접수하고 직원들이 잘 접객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오늘은 직접 호스트로 접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인인 겸 주방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 호스트 바에는 전직 호텔 셰프와 소믈리에까지 준비되어 있으니 아마 깝깝한 서비스는 아닐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마녀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리암이라고 합니다.”
“폴이라고 합니다.”
각기 에스코트를 받아 좌석에 착석한 마녀와 입장하는 선수들.
각 좌석은 프라이버시와 안정감을 위해 스탠드형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다.
페리윙클의 조언대로 사전에 칠링이 완료된 돔페리뇽과 안주가 기본으로 제공된다.
분위기 조성을 위해 어스름한 조명을 유지하는 것과 축음기를 틀어 놓은 것은 물론이다.
나중에 사정이 좋아진다면 악단을 고용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시우한테 기대기만 하면 안 되지.”
마녀들은 아직 ‘호스트바’라는 것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다.
굳이 비유하자면 한국에 처음 상륙한 마라탕 집인 셈이다.
신시우라는 찹쌀탕수육을 반짝 판매하는 동안 마녀들에게 마라탕의 참맛을 어디까지 알려줄 수 있는가.
여기에 이번 사업, 더불어 타카쇼의 목숨이 달려있다.
하지만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도 환희와 흥분을 느꼈다.
“아… 나는 살아있다.”
고객이 가득한 영업장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샴페인이 터지는 소리.
언제 돌변할 지 예측할 수 없는 작고 무서운 아가씨들의 작은 웃음소리.
가부키초에서 일할 적이 떠오르며 피가 끓는다.
동료 6명과 기숙사에서 웅크려 지내는 말단으로 시작했다.
서른 명이 함께 쓰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술을 한 병이라도 더 선물 받기 위해 샴페인을 양동이째 들이켰다.
온갖 라이벌을 무찌르고 랭킹을 갱신하며 청춘을 불태웠다.
자전거가 포르쉐로 변하고, 12평짜리 숙소가 펜트하우스로 변해갔다.
밤의 거리에 타카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인생을 함께했던 호스트바.
이제는 영영 오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사나이의 꿈이 잠든 전장.
타카쇼는 그 거리에서, 줄곧 밤의 왕이 되는 것을 꿈꿨다.
갑자기 달려든 트럭과 함께 이세계 전생을 해버리면서 물거품이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비로소 지금.
다시 한번 꿈을 꿀 기회를 잡았다.
그것도 지구에 있을 땐 상상도 못했던 초호화 호스트바를 운영할 기회가 말이다.
아주 작은 실수도 용납할 생각 없다.
“나는 남자 마녀인가 뭐인가 하는 녀석을 만나러 왔거든? 아까부터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데 네가 날 기쁘게 해주겠다고? 건방진 소리.”
사방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타카쇼의 귀가 첫 번째 불만의 목소리를 포착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그에 대한 대응 메뉴얼과 직원 교육도 이미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우선은 숙련된 시범을 보이는 것이 낫겠지.
타카쇼는 숨을 들이 쉬고 스탠드형 블라인드를 파고들었다.
거기에는 갈색 머리를 한 슬라브계 마녀가 한껏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녕하시니까, 실라 크리스탄 마녀님. 지배인 미마야 타카쇼라고 합니다.”
타카쇼가 등장하자마자 마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너 내 이름 알아?”
왜냐하면 여기 앉은 이래로 단 한 번도 자기소개를 한 적이 없거늘 갑자기 튀어나온 지배인이라는 사람이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말쿠트 갤러리에서 친구분이 성함을 부르시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오늘을 위해 게헨나 내 저명한 마녀의 이름과 레노먼드 타운 주위에 거주하는 마녀의 이름과 얼굴을 죄다 외워두었을 뿐이다.
중요 고객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진정한 호스트는 한 번 찾아온 고객의 이름을 잊지 않는 것 뿐만이 아니라 찾아오지 않은 고객의 이름도 외운다.
“워낙에 아리따우셨던지라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요.”
극존칭에서 자연스러운 존칭으로 넘어가며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는 타카쇼.
하지만 이 정도로 까탈스러운 마녀의 화가 풀릴 리 없다.
잠깐 놀란 듯했던 실라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쾌함이 가득했다.
“쯧, 아무튼 그건 됐고. 내가 여기서 남자 하나 기다릴 만큼이나 한가한 마녀인 줄 알아?”
“어떻게 하면 용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용서? 네가 나한테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언뜻 계속해서 화를 내는 듯하지만 확실히 초장보다 기세가 꺾여있다.
타카쇼의 작전이 제법 먹혀들었다는 의미이다.
이 타이밍에 타카쇼는 실라의 눈빛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제 진심이 전해진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고객의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해라.
그러나 절대 비굴한 모습은 보이지 마라.
마녀는 기본적으로 고압적이고 권위 의식을 똘똘 두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한 명의 여성임은 틀림없다.
짜증을 부리는데 벌벌 기는 남자는 짜증을 유발하면 유발했지 절대 플러스 요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단 말이지?”
실라는 입술을 비틀며 제 구두를 벗었다.
개봉되어 있던 돔페리뇽을 구두에 한가득 채운다.
그리고는 ‘이건 못하겠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가학심 어린 웃음을 지었다.
우습게도 이런 유치한 기 싸움이 호스트바에서는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걸 깨끗하게 마신…어?”
타카쇼는 실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두를 들어 안에 있는 샴페인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그리고 싱긋 웃음을 지으며 되묻는다.
상쾌한 미소에는 어떠한 불쾌한 내색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미녀의 하이힐에 담긴 돔페리뇽이라니 엄청난 포상이다.
“이걸로 조금은 기분이 풀리셨나요?”
설마 아무런 주저도 없이 그런 모멸을 받아들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도리어 굳은 실라.
멍하게 굳은 그녀를 뒤로하고 타카쇼는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옷을 정리했다.
“이걸로 모두 용서받았다고 하긴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볼일은 끝났다는 식으로 뒤를 돌아보자 다급하게 말을 거는 실라.
“자, 잠깐…!”
“네, 듣고 있습니다.”
“그걸 마시라고 진짜 마시면 어떡해? 넌 자존심도 없어?”
“실라 님의 화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질 수 있다면 저의 알량한 자존심 필요 없습니다.”
짜증이 가득 번졌던 실라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군데군데 박히기까지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고객의 컴플레인에 대응할 때는 화를 마음껏 풀게 해주는 것이 좋다.
마녀라고 해도 게헨나라는 온실 속 화초.
일본의 업소녀들을 비롯해 돈 많은 아줌마까지 온갖 진상을 상대해온 백전노장의 타카쇼 앞에서는 풋풋한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이 타이밍에 게헨나 향을 살짝 첨가한 오바스러운 멘트.
“비록 성에 차지 않으시겠지만, 저희는 실라님의 얼굴에 한 떨기 미소를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부디 조금이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면 좋겠다는 게 저의 유일한 바람입니다.
사죄의 의미로 조금 더 좋은 술을 내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물론 비용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
한결 부드러운, 심지어 조금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 실라.
더 좋은 술을 내오겠다는 말 역시 철저하게 계산된 발언이었다.
여자는 화가 풀렸을 때와 작은 미안함을 느낄 때 가장 관대해진다.
예상대로 실라는 타카쇼의 공짜 서비스를 거부했다.
“됐어, 내가 마시는 술은 내가 사야지. 괜히 억지를 부렸으니까. 이걸로 줘.”
“그러지 않으셔도….”
“이걸로 줘. 나랑 여기 이 친구 거까지 두 병.”
“속히 대령하겠습니다.”
팔짱을 낀 채 새초롬하게 굴지만, 힐끗힐끗 멀어지는 타카쇼의 뒷모습을 훔쳐보는 실라.
타카쇼는 등 뒤로도 느낄 수 있었다.
화가 잔뜩 났던 여자들의 화를 사르륵 녹이고, 까탈스럽게 굴던 여자들이 보고 싶다고 찾아오게 만드는 것.
이것이 호스트의 참맛이 아니겠는가?
타카쇼는 표정 관리에 힘썼다.
지배인이 멍청한 웃음을 지으면서 돌아다닐 수는 없지.
다시 업장을 돌며 접객 상태를 점검했다.
“시우는 잘하고 있으려나?”
페리윙클을 대하던 때를 생각해보면, 또 그의 휴대폰에 저장된 온갖 마녀의 사진을 보면 별걱정은 없을 것 같지만.
타카쇼는 조용히 시우가 접객하는 중인 중앙 좌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P.324 #71_게헨나의 호스트바(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