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1.
타카쇼가 기꺼이 내온 술은 또페리뇽.
시우는 타카쇼의 광적인 돔페리뇽 사랑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흰 장갑을 끼고 애물단지 다루듯 아이스 버킷 안의 샴페인을 꺼내는 타카소.
“도와주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페리윙클 님께 대접하기 위해 칠링을 끝내 두었습니다. 샴페인 병은 탄산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와인보다 유리가 두꺼워서 장시간의 칠링이 필요하죠.”
마시기 좋은 온도로 차갑게 식혀진 병을 조심스럽게 흰 냅킨으로 감싸고 병을 확인시켜준다.
“제가 준비한 것은 돔페리뇽 1973 P3 Plenitude Brut. 전설적인 빈티지 라인인 70년대 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샴페인입니다.”
“이런 거라면, 또 이야기가 다른데.”
시우는 페리윙클을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사실 시우야 빈티지니 뭐니 잘 모른다.
하지만 척 봐도 포스 넘치는 병의 모양새나 매우 매우 흡족해하는 페리윙클의 반응을 봐도 보통 고급술은 아닌 것 같다.
“오픈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타카쇼는 군인처럼 절도있는 동작으로 병을 가슴에 받쳐 들고 병목을 비스듬히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예식검처럼 생긴 뭉툭한 칼로 슬라이스하듯 병목을 쳐냈다.
샴페인 내부에 기포로 생겨나는 압력과 칼날이 병목 아랫부분을 치는 힘으로 병목을 잘라내는, 사브라주라는 오픈법이다.
-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서리는 연기.
코르크와 함께 병목이 저 멀리 날아가자 페리윙클은 짝짝 손뼉을 쳤다.
“자세 좋은데?”
“감사합니다.”
타카쇼는 한 손으로 병 밑을, 한 손으로는 냅킨을 이용해 몸통을 감싸고 페리윙클과 시우의 잔에 조심스럽게 따라주었다.
아까 것보다 살짝 무거운 황금빛.
생산된 지 5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탄산기포를 보니 조금 신기하다.
“자, 너도 마셔.”
고급스러운 샴페인 잔과 조명이 어우러지자 별을 품은 바다처럼 빛나며 고급스러움을 연출했다.
페리윙클은 기꺼이 시우에게도 잔을 들려주었다.
“이거 제가 먹기엔 너무 비싸 보이는데요?”
“그런가? 마담 이거 얼마야?”
“게헨나의 관세까지 포함하면 금화 24파운드 정도 됩니다. 판매가는 35파운드로 책정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는 해야 대접받는 느낌이 들지 않겠어?”
시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게헨나의 물가는 현세와는 전혀 다른 구조로 작용하기에 금화 한 장이 얼마다! 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노예 생활 동안 대강 어림잡아본 결과 1파운드는 84만 원 정도.
즉, 여기 이 샴페인은 가게로 들여오는 원가만 2000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는 의미다.
마진을 붙이면 3000만 원 가까이 되는 거고.
시우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타카쇼는 마치 소믈리에처럼 설명을 이어나갔다.
“우선 돔페리뇽 특유의 건스모크 풍미가 충분히 우러나옵니다. 로제처럼 프루티한 향은 부족하지만 대신 구운 아몬드처럼 넛트한 향과 크리미하게 달라붙는 기포를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공부 많이 했나 보네?”
“아무래도 대접받는 느낌을 받으시려면 필요하겠다 싶어서요. 다른 호스트들에게도 공부시키고 있습니다.”
“좋네, 좋아.”
페리윙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을 입에 머금었다.
“씀씀이도 아주 마음에 들어. 좀생이처럼 깨작깨작 내왔다면 실망했을 텐데. 기개가 있는 친구네.”
“이렇게 귀한 조언을 해주시는데 어떻게 주판을 두드리겠습니까.”
타카쇼가 비록 지금은 주춤하지만 난놈인 것 같기는 하다.
시우라면 안 그래도 영업이 힘든 판국에 이렇게 대단한 대접을 할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샴페인과 함께 곧장 컨설팅이 시작되었다.
“자, 그럼 어디부터 손을 봐볼까? 장부 좀 다시 보자.”
“여기 있습니다.”
2.
“첫 번째, 입장료는 없애. 아까도 설명했다시피 급을 나눈다고 느끼게 할 수도 있어. 입장료에 따라 준비하던 와인과 돔페리뇽은 무료, 기본으로 제공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타카쇼에 비해 옆에서 대신 놀란 것은 시우였다.
페리윙클이 보던 장부는 시우도 함께 보고 있었다.
기본상이라고는 하지만 대충 소주나 캔맥주를 내주던 것이 아니다.
저것만 해도 1파운드 3파운드 이렇게 높은 가격이 매겨진 상품이었던 것이다.
“만약 마녀들이 별다른 주문 없이 기본 술만 마시고 가면 고스란히 적자가 될 텐데요?”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겠지.”
페리윙클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내가 말했지? 마녀와 부자는 모두 저들만의 오만함이 있다고? 그 오만함을 역 이용하는 거지.”
게헨나의 마녀는 대체로 부유하다.
레노먼드 타운에서 머물고 여가를 위해 말쿠트 갤러리를 찾는 마녀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오만한 마녀가 공짜 술을 먹고 내뺄까? 그것도 주변에 다른 마녀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그건 자기 품위와 평판을 깎아내리는 거지.
설령 그런 마녀가 있다고 해도 주위에서 빈축을 사고 금방 다시 업장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될 거야.”
“그건 그렇네요.”
“어휴, 우리 귀여운 시우.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해줘야 알아듣는 것도 귀엽네.”
시우의 뺨을 꼬집은 페리윙클은 설명을 덧붙여 나갔다.
“아무튼 입장료 대신 팁을 받도록 해. 서비스를 ‘구매한’ 고객이 아니라 충분히 ‘대접받은’ 고객이 만족의 표시로 금화를 건네게 만들어. 그 뉘앙스 차이는 네 생각보다 중요해.
마담이 준비한 돔페리뇽 라인업이 돈을 주면서 마시기에는 뭔가 급이 달리지만, 그렇다고 공짜로 얻어 마시기에는 은근히 가격이 있는 술이란 말이지? 체면상으로라도 술값보다 넉넉히 웃돈을 얹어 팁으로 줄 거야. 물론 너희가 적당히 즐겁게 해주었다면.”
“명심하겠습니다.”
“또 하나 더. 고객이 주문하는 ‘선물’에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각종 꼬냑, 위스키, 와인, 브랜디 등등 미들급은 줄이고 가능한 최고가로, 조금 전에 나한테 내준 샴페인처럼 ‘오늘 특별한 술 먹었네~’라고 느낄 수 있게끔. 지금은 종류도 적고 재고도 부족해.”
“이미 준비해 둔 미들급은 어떻게 할까요?”
“그건 앞으로 발주 수량을 줄이되유지하도록 해. 그렇다고 너무 고가의 상품만 남겨놓는다면 ‘이 새끼들 돈 뽑아먹으려고 작정했네?’ 같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으니까. 비교할 만한 상품을 남겨서 사치를 부리고 있다는 실감을 주는 것도 중요하고.”
열심히 페리윙클의 말을 받아 적던 타카쇼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제가 이런 고급술을 일일이 구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돈 문제를 떠나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무척 적습니다.”
타카쇼도 어디까지나 아도나이 상회를 낀 커넥션을 지닌 만큼 희귀한 술들을 마음껏 사들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흠, 그것도 그렇네. 그럼 특별히 그것까지 도와줄게. 내 호텔에도 술을 공급하던 업체가 여럿 있거든.”
“정말이십니까?”
난색을 보이던 타카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는 거듭거듭 고개를 숙이며 페리윙클에게 감사를 표했다.
“물론이지. 시우의 절친한 친구라면서? 나도 볼 일이 있어서 온 거라 지금 당장은 힘들어. 다음에 현세에 나갈 때 도와줄게. 그전까지는 지금 있는 거로도 충분할 거야.”
페리윙클의 아낌 없는 지원사격에 타카쇼의 얼굴에도 근심이 사라져간다.
사실 겉으로는 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꽤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자칫하면 목숨이 걸린 사업이 시들시들 시들어가고 있던 형국이니 말이다.
페리윙클은 그 외에도 장부를 뒤척이며 이것저것을 짚어주었다.
매달 주문해야 할 술의 종류와 가격을 얼추 추려주고, 실내장식용 예술품을 대여할 수 있는 게헨나의 업체도 소개를 약속했다.
“적당한 주기로 이벤트를 여는 것도 생각해 봐. 중요한 건 쉽게 질리도록 하면 안 된다는 거야.”
“그것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자리를 잡으면 아예 회원권을 발급하는 것도 좋겠네. 접근이 어렵다는 건 그만큼 특별하다는 인상을 주니까.”
“그건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검토해보겠습니다.”
“운영비에 비해 마진율이 너무 낮아.”
“이미 40~50%의 마진을 붙였는데 말입니까?”
“응, 차라리 값을 높이고 서비스를 내주거나 실내장식을 자주 바꿔서 분위기를 환기해 줘.”
뭔가 사업상 이야기가 오가고 나니 어느새 세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타카쇼의 사업 실적이 부족했던 이유는 너무 서민적인 마인드로 접근했기 때문이고, 페리윙클은 그런 부분을 매끄럽게 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인데….”
모든 것이 원활하게 해결되었느냐면 아직 아니다.
이 호스트바에는 아직 중대한 문제가 남아있다.
“어떻게 고객을 끌어 모으느냐야. 원래는 게헨나의 장사는 마녀의 입소문을 타야 하는데 마담은 적기에 손님을 놓쳐버렸어. 오히려 지금쯤이면 악평이 돌고 있겠지.”
“흐음….”
“게다가 창관과 대욕장의 수국정원은 생긴 지 100년이 넘은 선발주자잖아? 까마득히 늦은 후발주자가 따라가려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힘들어. 단골을 빼와야 하는 거니까.”
“남은 건 홍보 문제이군요.”
페리윙클도 이점만큼은 뾰족한 해답이 없는 것인지 흠 하는 콧소리를 내었다.
“신문에 광고를….”
“안 돼. 너무 천박해. 이거 깜빡했는데 밖에 둔 입간판도 없애도록 해.”
“넵.”
잠자코 지켜보던 시우가 나섰다.
사실 타카쇼가 곤란한 상황을 들었을 때부터 생각하던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해 페리윙클의 도움을 청했을 뿐이지 나름대로 생각이 있던 것이다.
“페리윙클 님, 저 정도면 홍보 감이 될까요?”
“어? 그렇네. 여기 있었네!”
페리윙클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아직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타카쇼는 고개를 갸웃했다.
“최초의 남자 마녀를 만날 수 있는 술집이라면… 이건 못 참지.”
시우는 그냥저냥 유명 인사가 아니다.
이미 보더타운에서 경험했듯 걸어가는 것만으로 마녀를 모으는 피리 부는 사나이인 것이다.
입소문에 의존을 많이 하는 게헨나 술장사에서 이보다 더 화끈하고 자극적인 선전이 있을까?
어차피 소문이 날 대로 나서 정상적으로 길거리도 나다니지 못하는 시우다.
이왕 버린 몸.
친구를 위해 알차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 시우가 잘생긴 것도 맞고, 접객 솜씨도 좋고,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정말 그렇게 도움이 될까요?”
“지금 게헨나에서 시우만큼 주목도가 있는 사람은 없을걸? 적어도 레노먼드 타운의 마녀라면 한 번은 올 거야.”
타카쇼는 진짜냐? 하는 기이한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나도 이러고 싶었던 건 아닌데.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접객용 말투도 잊고 아연해하는 타카쇼 앞에서 페리윙클은 최종 정리에 들어갔다.
“그럼 내일 당장은 무리고, 내일모레쯤부터 본격적으로 호스트바 살리기 프로젝트를 시작해 보자고.”
마지막으로 각종 세부 사항에 대해 팁을 건네준 페리윙클은 오늘 대접받은 샴페인 값까지 팁을 얹어 쾌척하고 가게를 떠났다.
시우는 그날 저녁부터 즉시 타카쇼에게 테이블 매너, 마녀를 대하는 태도, 대화를 이어가기 편한 간단한 상식, 교양있는 대화를 위한 게헨나 시사에 대해 지도받았다.
생각보다 세세한 포인트가 많았고 본격적이었다.
“이건 무조건 외워야 해.”
테이블 매너만 해도 잔에 얼음을 넣을 때 움푹 파인 부분이 옆을 향하게 하기.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이 내려가지 않도록 하기.
잔을 내려놓을 때 소리가 나지 않게끔 손가락 끝으로 한번 받치기.
술을 따를 때 입구가 고객의 몸쪽을 향하지 않게 하기.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방법.
등등.
까다롭고 격식 있는 예절교육이었다.
그 외에 마녀를 대하는 간단한 요령에 대해서도 들었지만 테이블 매너를 제외하고는 시우에게 아주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나름대로 5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면서 마녀의 사고방식이나 떠받드는 법 정도는 숙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거의 날밤을 새우며 특훈을 받으며 하루를 보낸 뒤.
드디어 게헨나 유일의 호스트바 로즈 글래스, 그랜드 오픈의 시간이 다가왔다.
EP.323 #71_게헨나의 호스트바(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