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
1.
타카쇼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술을 나눠 따랐다.
답지 않게 샴페인.
독특하게 생긴 병 모양과 방패 문양.
술에 딱히 관심 없는 시우도 한눈에 알아볼 만한 것이었다.
모엣&샹동 사의 돔 페리뇽이다.
“마셔.”
타카쇼가 연달아 담배를 꺼내 들었기에 시우도 하나 물었다.
오늘은 연애 상담이나 할까 가볍게 온 것이었는데.
분위기가 이렇다니.
-퐁!
능숙한 손길로 마개를 제거한 타카쇼는 길쭉한 샴페인 잔에 나란히 술을 따라주었다.
보글보글 예쁘게 올라오는 거품.
시우는 사양하지 않고 한 모금의 술을 머금었다.
마치 별을 마시는 듯한 감각과 함께 황홀하고 달콤한 과실의 향미가 입안에서 톡톡 터진다.
꽤 비싼 걸로 알고 있는데 비싼 값을 하는 술이었다.
엘로아와 종종 마시는 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마시는 건 거의 대부분 꼬냑과 위스키인지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어찌 됐건 훌륭했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이야?”
“폴 한테는 어디까지 들었어?”
“손님이 없어서 적자가 난다는 것 정도?”
“….그러냐?”
타카쇼는 조심스러운 시우의 말에 다시 침음했다.
거의 6년 가까이 알고 지낸 시우지만 타카쇼가 저러는 모습은 처음 본다.
하늘이 뒤집혀도 껄껄 웃으며 살아갈 사람으로 보였는데.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타카쇼의 등을 빡 소리가 나게 때렸다.
“끄악! 이게 뭔 개짓거리야, 새꺄!!”
머리를 감싸던 자세 그대로 바르르 경기를 일으키는 타카쇼.
“괜히 존심 세우지 말고 털어놓으라니까. 우리가 하루 이틀 친구냐? 자기 썸녀한테 고추 사진 보냈던 건 말해주고 이런 건 왜 숨기는데?”
“말은 고맙지만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란 말이지. 괜히 너까지 걱정시키면 이 타카쇼 꼴이 뭐가 되냐.”
“샴페인.”
“뭐?”
“샴페인 먹은 값으로 칠게.”
타카쇼는 멍하니 퉁명스럽게 말하는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안쪽으로 꽉 깨물고 울음을 참는 히로인 전용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우야… 시우야… 타카쇼는 말이야….”
“잠깐 딴 데 보고 울면 안 되냐? 속이 매스꺼운데.”
“시우가 너무 좋아!”
“끄아아아악!”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우를 끌어안는 타카쇼.
양복 아래로 숨겨진 근육질 그 괴력에 비명을 지르는 시우.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촌극을 벌인 뒤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시발… 여전히 힘은 더럽게 세구나.”
“시우쿤을 향한 사랑의 힘이라면 믿어줄래?”
이후 타카쇼에게 간단한 사정청취를 듣자 가닥이 잡혔다.
이건 혼자 도우려는 것보다 훨씬 좋은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일단 됐고, 도움 좀 요청해야겠다. 너 원격 수정구 있어?”
“업무용으로 하나 비치해뒀지 왜?”
“잠시만 시간 좀 내주라. 내가 이 일에 적격인 사람을 알고 있거든.”
어리둥절해하는 타카쇼를 뒤로하고 시우는 지체 없이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연락을 했다.
2.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호스트바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어서 오세요!”
-또각 또각 또각
날카롭게 울리는 구두굽 소리와 함께 오늘의 구원투수가 등판했다.
고귀해 보이는 군청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자홍색 벨벳 드레스가 애무하듯 휘감은 굴곡진 몸매.
가슴과 어깨에 걸쳐진 모피 숄.
여차하면 발목이 삐끗할 것 같은 높디높은 하이힐.
척 봐도 명품인 핸드백을 옆구리에 낀 행운의 마녀.
키벨레 페리윙클이었다.
사실 현세에서도 공부만 한 샌님이었기에 사업이니 뭐니 잘 모르는 시우다.
이만한 고급 시설의 운영을 컨설팅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뇌리에 스쳐 지나간 사람이 바로 페리윙클이다.
어째 하는 행동은 속없어 보이는 재벌 3세 아가씨 같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텔 브랜드를 보유하고 경영했던 사람이니 말이다.
그녀는 살짝 눈을 치켜떴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상황 파악 완료까지 필요했던 시간은 고작 3초.
슬며시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내려간다.
‘어떻게 하면 더 기품있게 들고 있을까?’라고 고심한 듯 들고 있던 명품백도 대충 팔목에 건다.
품위 넘치던 자세가 갑자기 짝다리가 되었다.
곧장 못마땅한 눈길로 시우를 쏘아보는 페리윙클.
“초대에 응해주셔서 영광입니다. 페리윙클 님.”
“야, 신시우. 너 뒤질래?”
타카쇼가 준 턱시도로 갈아입고 정중하게 인사하는 시우.
페리윙클은 맥이 탁 풀린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성질을 냈다.
“데이트 신청인 줄 알고 한껏 꾸미고 왔는데. 맹랑한 녀석 봐라?”
날카롭게 날이 선 목소리와 눈초리.
타카쇼는 물론이오 그녀에게 환영 인사를 했던 가게 호스트들마저 바짝 굳는다.
성질을 부리는 주체는 마녀, 더군다나 모양새만 봐도 어중간한 마녀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다들 직감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든 불러만 달라고 하셨지 않나요? 그러지 마시고 안으로 드세요. 하하.”
두 번째 경악의 순간.
호스트들은 시우의 정체를 모른다.
그냥 마담 타카쇼의 친구, 마녀의 총애를 받는 남자 정도로만 인지하고 있을 뿐.
분노한 마녀 앞에서 당장 바닥을 기며 사과해도 모자랄 판국에 너스레를 떨고 앉았으니.
쩍 벌어진 악어 입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벌써 눈을 감고 기도문을 읊조리는 사람도 있었다.
“…꿀꺽….”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 무서운 마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시우를 노려보고 있다.
수틀리면 여기에 있는 모두가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중되던 와중.
“하아, 이게 뭐야. 옷도 새로 맞춰 입고 속옷도 벗고 왔는데.”
“그건 좀 과도한 정보인데요.”
“한마디만 더 하면 나 그냥 간다?”
“저도 정말 정말 아쉽네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페리윙클 님과 독대할 기회였는데… 피치 못하게 이렇게 낭비해 버리다니.”
시우는 곧장 아부를 시작했다.
페리윙클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좀 더해봐.”
“사실 저도 이렇게 그 기회를 날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어요. 저와 친분이 있는 마녀님들은 몇몇 분 계시지만 가장 먼저 페리윙클 님이 떠오르더군요.”
“그랬니?”
“네, 페리윙클 님이라면 복잡한 현 상황을 현안으로 간파하시고 가장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실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페리윙클이 뭘 좋아하는지는 대충 파악이 끝난 시우다.
의외로 그녀는 시우의 당돌하고 맹랑한, 아는 누님과 동생 같은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 한다.
또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졌으니 알아서 설설 긴다면 흔쾌히 소매를 걷고 도와줄 것이다.
“좋아, 합격! 들어가자.”
“숄은 저 주셔도 됩니다.”
“이거 안 두르면 꼭지 보일 텐데? 말했잖아, 노브라라고.”
“아, 그럼 됐습니다.”
완전히 상정 외의 사태에 굳어 있던 타카쇼.
사실 방금 시우가 보여줬던 모습은 타카쇼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걸 ‘누가’ 했는지는 꽤 충격적인 사안이다.
노예 시절 신시우는 끝까지 아멜리아 부교수와 대립하던 처세를 모르는 바보였다.
뭐 거기까지는 워낙 아멜리아가 못살게 굴었으니 반감에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타카쇼가 기억하는 시우는 쑥맥이고 모쏠아다였다.
저렇게 능숙하게 여심을 컨트롤하는 능력 따위는 없었단 말이다.
경험은 사람을 변화시킨다더니….
페리윙클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남은 인원들도 퓨후 한숨을 쉬었다.
“저기, 형님….”
“…….”
“형님!”
“어, 아. 왜?”
아까까지 기도문을 읊고 있던 리암이 슬며시 다가왔다.
주변에 오돌오돌 떨고 있던 다른 호스트들도 하나둘씩 타카쇼에게 몰려들었다.
“저분은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마녀랑 완전 친구 먹은 것 같은데요?”
“그 까탈스러운 마녀를 저렇게 애 다루듯이….”
“입안에 사탕처럼 굴리던데요?”
우선 타카쇼는 제자에 대한 감탄을 숨겼다.
대신 엄숙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호스트를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애들아, 저것이 호스트가 지향해야 하는 극의이자 정점이다. 우리는 단순히 성적 유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유대감을 쌓아야 하는 거야. 오늘 본 모습, 전부 너희 가슴에 새겨라.”
“네! 형님!”
“저것이 궁극의 호스트….”
“아무튼 일들 봐. 나도 얘기에 끼어야 하니까.”
타카쇼도 허둥지둥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바의 살롱으로 향했다.
3.
구조 요청에 응한 페리윙클.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시우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내 것인 양 은밀한 손길로 허벅지를 쓰다듬는 것은 덤이다.
“안녕하십니까. 로즈 글래스의 마담 미마야 타카쇼입니다.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타카쇼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오두방정을 떨지 않았다.
낮게 가라앉은 차분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품위 넘치게 인사하더니 앞에 마주 앉는다.
생각해보면 이 녀석도 나름 마녀들을 꼬시면서 살아왔었지 싶었다.
“마담? 예상대로 호스트바구나.”
“네, 이번에 친구가 가게를 새로 차렸는데. 아무래도 영업이 어려운 것 같아서요. 페리윙클 님의 경영 컨설팅을 받고자 이 자리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흠, 난 공짜는 싫어하는데….”
사실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시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그녀가 뭉그적거리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1박 2일.”
“2박 3일.”
“그럼 무박 2일로 하죠.”
“싫어, 무박 3일로 할 거였어 원래.”
시우와의 뜨거운 시간을 약조 받고 싶은 것이다.
물론 시우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다.
페리윙클 같이 편한 누님과 섹스하는 게 대가라면 얼마든지 환영이기 때문이다.
이미 한번 몸을 섞은 상대라 그런지 이상하리만치 거부감이 적었다.
이제는 샤론이 쓰러져 있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뭔가 마냥 주도권을 내주는 것도 재미없지 않은가?
시우는 페리윙클의 허리를 휘감고 귀를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욕심부리면 혼나는데. 자신 있으세요?”
“푸하하핳!”
웃을 때도 점잖게 입가를 가리던 페리윙클이 폭소를 쏟아냈다.
어찌나 실컷 웃는지 몇 번이나 테이블을 발로 찬다.
아마 바닥에 눕혀준다면 데굴데굴 굴러다닐 것 같았다.
“뭐, 뭐야 그거…! 흐하하!! 안 어울려!”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던 페리윙클은 3분이 지난 뒤에야 웃음보를 수습하고 웅크린 새우처럼 배를 껴안은 채 입을 열었다.
“하아… 눈물 났어. 우리 시우 어디 인터넷에서 이상한 거 봤니? 그런 거 써먹으면 못 써.”
“크흠, 머쓱하네요.”
실로 머쓱하다.
아마 ■ ■ ■였더라면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별생각 없이 넋두리하고 있자니 페리윙클은 웃음기 가득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 웃기도 했으니까. 네 말대로 무박 2일로 하자. 48시간인 거다?”
“네, 알겠습니다.”
타카쇼는 믿을 수 없었다.
저거 진짜 시우 맞나?
살짝 오바스러운 유머로(그것도 섹드립으로) 마녀의 폭소를 자아내면서 섹스 약속까지 잡다니.
차라리 미마야 타카쇼가 속세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스님이 되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그럼 뭐가 문제인지, 마담?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겠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광경에 반쯤 넋이 나가 있던 타카쇼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머리 좋은 시우가 불렀다면 이 상황에 정말 큰 도움이 될 마녀임은 분명했다.
앞으로 가게 운영의 사활이 걸린 것이다.
타카쇼는 품에 넣고 있던 봉투들을 촤르륵 테이블에 늘어놓으며 당당한 눈빛으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네, 준비한 자료와 함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EP.321 #71_게헨나의 호스트바(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