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16화 (316/917)

#316

1.

엘로아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이 든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남은 반병의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연주홍빛의 어여쁜 주정(酒精)이 목구멍 속으로 흘러 들어가며 화끈한 열기를 띠었다.

“…….”

엘로아의 가벼운 마법, 손짓과 함께 사라지는 정사의 흔적들.

시트에 묻은 체액도, 서로의 몸에 묻은 체액도.

한곳에 모인 오탁들은 정화의 불길 아래서 말끔하게 사라져 나갔다.

마지막으로 시우의 옷을 도로 입혀준다.

이것으로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이 된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도 그리 다를 게 없지.”

제아무리 행복한 순간도 지나가고 나면 과거에 파묻히기 마련이다.

따뜻한 추억이 두 사람의 것이라면 두 명의 가슴에 남는다.

그것을 추억이라 일컫는다면 오늘 밤의 행복은 반쪽짜리 추억이 되겠지.

엘로아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고,

시우는 영원히 떠올리지 못할 테니 말이다.

엘로아는 잠시 그것을 ‘함께한 추억’이라고 여겨도 되는지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쓸데없는 생각이란 걸 깨닫고 잘라내듯 일축했다.

시우에게 몸을 허락한 순간부터 다짐했던 바이다.

이제 와 안타깝게 여기거나 우울해하기에는 궁상도 이런 궁상이 없다.

“시우….”

잠이 든 시우의 머리맡에 앉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로아는 계약 3획을 사용하여 시우의 기억을 지웠다.

가뜩이나 충분한 휴식을 요구하는 몸에 자성 마법을 사용하는 짓을 저질렀으니 몸이 정상일 리 없다.

전류에 감전된 직후처럼 손끝에 감각은 사라졌고 심장은 부정맥을 일으키며 불만을 호소한다.

그럼에도 그의 체온만큼은 애틋할 만큼 여실히 느껴졌다.

“예정된 일이네, 정해진 일이네….”

사실 엘로아의 그리 능숙하지 않은 기억 조작 정도라면 어지간한 ‘자율방어’에 가볍게 막힐 것이다.

애초에 정신조작계의 마법은 고등한 정신계를 지닌 마녀에겐 통용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시우는 대략 16~17위계 정도의 자성 마법을 갖추고 있음에도 자율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엘로아는 그 점을 노렸고 보시다시피 쉽게 성공했다.

오늘 밤 술에 취해 몸을 섞었던 뜨거운 기억 전체를 비롯하여, 과거 빗물 터널에서 몸을 겹쳤던 기억까지 소거했다.

또한 사건의 인과가 틀어짐을 깨달은 그가 위화감을 느끼고 기억을 되찾을 것을 대비해 다른 기억으로 채워 넣었다.

시우에게 있어 ‘엘로아 스승님과 정사를 나눈 적이 있다’라는 기억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허락받지 못한 독단이었으나 어긋난 제자를 바로잡는 것이 스승의 소임.

애초에 이 지경까지 오게 두면 안 되었던 일이다.

엘로아가 총대를 맨 결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우를 시험에 들게 하고, 또 엘로아가 끝없이 여지를 남기게 했던 사건이 사라졌다.

스승과 제자의 경계가 붕괴했던 빗물 터널의 첫 경험 말이다.

뭐든 한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다.

실제로 엘로아도 그 이후로 시우를 이성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끝내 인륜을 져버리는 행동까지 하고 말았다.

“…훌쩍.”

엘로아는 코끝이 찡하게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스승을 사모하는 제자를 엄하게 혼내지 못하는 스승도.

도리어 제자에게 연정을 품고 몸을 허락한 스승도 이젠 없던 게 된 것이다.

분명 기뻐해야 할 터인데.

엘로아는 꾸욱꾸욱 눈 뒤가 눌리는 느낌을 받으며 흐릿해진 시야를 소매로 훔쳐냈다.

어느샌가 주책없이 뜨거운 눈물이 흐르려 하고 있었다.

“시우….”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라피를 잃고 방황하던 엘로아를 이끌어주고 살아갈 이유가 되어준 그를,

엘로아가 모르던 세상을 알려주었던 그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미안하네. 멋대로 행동해서. 그대에겐 늘 민폐만 끼치는군.”

그렇기에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자 오늘 하루 그에게 마음껏 어리광을 부렸다.

시우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게 해주고, 해주고 싶었던 것을 모두 했다.

그는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엘로아는 잊지 않을 것이다.

“…….”

아무 답도 없이 곤히 잠이 든 시우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인 엘로아는 가볍게 키스했다.

이걸로 정말 마지막.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조용히 마차를 나섰다.

2.

이른 아침.

개운하게 깨어난 쌍둥이는 이변을 발견했다.

“…….”

“…….”

거실 짐 더미에 쌓아두었던 피크닉 바구니.

그 안에 고이 잠들어 있어야 했던 ‘스윗 묘약’이 절반가량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데트, 네가 잠결에 마신 거 아니야?”

“언니, 언니가 잠결에 마신 거 아니야?”

“난 밤새 한 번도 안 일어났는걸?”

“나도 그래.”

반사적으로 가장 유력한 용의자에게 심문을 던지는 오딜 오데트 자매.

하지만 서로의 반응으로 그럴 리가 없다는 결론을 재빠르게 도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겨나는 또 다른 의문.

““그럼 누가 마셨지?””

가장 중대한 사안은 쌍둥이가 자는 동안 어떤 변수가 발생했는가를 파악하는 것.

이 호화 맨션에 있던 사람은 쌍둥이, 조수님, 샤론 언니.

당연하지만 밤새 실컷 잠들어 있던 쌍둥이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된다.

그렇다면 샤론 언니, 혹은 조수님이 절반가량 차를 마셨다는 것이다.

“크, 큰일인데?”

“샤론 언니가 마셨다면 괜찮을 거야.”

오딜은 뻘뻘 쏟아지는 식은땀을 느꼈다.

샤론이 마셨다면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묘약은 어디까지나 ‘남성’에게만 효과가 한정되니 말이다.

“근데 조수님이 마셨으면 어떡해?”

그러나 시우가 마셨더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쌍둥이가 푹 자고 일어난 시점에서 얼굴을 마주할 사람은 샤론밖에 없으니 ‘사랑’의 효과가 발동할 대상은 자명했다.

즉, 죽 쒀서 샤론 언니를 준 꼴을 넘어….

“칠첩반상을 가져다 바친 거잖아!”

“오데트! 큰일이야! 큰일!”

“언니! 어떡해! 어떡해!”

말벌집을 들쑤신 것처럼 대혼란 상태에 빠진 쌍둥이.

앞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사실이지만 안 그래도 우세한 연적에게 지원사격을 해주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아암…. 아침부터 뭐해?”

그때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샤론이 어슬렁어슬렁 잠옷 바람으로 나타났다.

허둥지둥거리던 쌍둥이의 시선이 샤론에게 집중된다.

“뭐, 뭐야?”

“…….”

“…….”

빤히 샤론의 상태를 스캔하는 오딜과 오데트와 당황하는 샤론.

단서.

흐트러진 잠옷과 머리카락, 찍찍 끄는 실내화, 늘어지게 하는 하품.

적어도 밖으로 드러난 부분에 한해서 격렬한 사랑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가령 목덜미에 키스 마크라던가 손목에 난 손자국이라던가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판별할 수 없다.

“좋은 아침이에요.”

“잘 주무셨어요?”

“응, 난 잘 잤지. 어어? 어디가?”

샤론을 좌우로 쓰루하고 오도도 달려가는 쌍둥이.

“실례하겠습니다!”

“잠시만 살필게요!”

-벌컥!

곧장 샤론이 묵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를 살핀다.

“침대, 이상 무.”

“조수님 냄새, 이상 무.”

쪼르르 달려가 침대를 살피는 오딜과 아예 코를 파묻고 탐지견처럼 킁킁거리는 오데트.

“너, 너희 뭐 하는 거야!”

쌍둥이의 특이 행동에 샤론은 얼굴을 붉히며 펄쩍 뛰었다.

아무리 숙소를 제공해주었다지만 남의 방을 이렇게 허락도 없이 들어와 헤집고 다니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상당히 기분이 상한 샤론은 쌍둥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꿀밤을 쥐어박았다.

“꺅!”

“아파요….”

“어휴! 왜 댓바람부터 왜 이렇게들 정신이 없어!”

오딜과 오데트는 겸허히 꿀밤 처벌을 받아들이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조수님이 차를 마셨다면 이렇게 깔끔한 방을 유지하고 있을 리 없다.

그래도 확인차 물어본다.

“샤론 언니, 혹시 밤에 이 병에 든 차 마시셨어요?”

“홍차거든요?”

“응? 아니?”

묘하게 안심하던 쌍둥이의 얼굴이 다시 바짝 굳는다.

그렇다면 역시 조수님이 마신 게 된다.

“뭔데? 뭔 일 있어?”

“아, 아무것도요.”

그때 현관에 달린 종소리가 딸랑이는 소리를 들은 쌍둥이가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아침부터 하늘을 찌르는 활기참에 한숨을 푹 쉬던 샤론도 시우의 얼굴을 보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3.

“여긴 또 어디냐.”

눈을 뜨고 보니 쌍둥이네 마차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른 사람도 없었다.

혼자 술을 퍼마시고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모양이다.

“이걸 혼자 다 처먹으니까 필름이 끊기지.”

위스키 한 병이 말끔하게 비어있는 것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짓는 시우.

기억만 날아가고 숙취가 이 정도로 끝난 것도 영체의 우수함 덕분인 듯싶었다.

아무튼 대강만 정리하고 별장으로 돌아가자마자 쌍둥이가 반겨주었다.

눈이 똥그래져서 물어오는 오데트.

“조수님! 조수님! 이거 조수님이 드셨어요?”

예쁜 병에 담긴 예쁜 홍차를 보고 순순히 시인했다.

어제 청소 중에 목이 칼칼해서 마시지 않았던가?

“네, 어젯밤에 청소하다 마셨어요.”

“…….”

별안간 침묵하는 쌍둥이의 모습에 괜스레 불안함을 느꼈다.

“혹시 다 같이 마시려고 했던 건가요? 괜히 죄송하네요.”

“아, 아니야…. 그 실패작이라서 버리려고 했던 거거든.”

“맞아요! 그런데 혹시… 어젯밤에 누구랑 같이 계셨나요?”

누구랑?

갑자기 그런 말을 묻는 쌍둥이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면서도 시우는 곰곰이 기억을 떠올렸다.

혼자 술 마시다가 마차로 기어들어 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성둥 잘려 나간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샤론이랑….”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던 쌍둥이의 표정.

“오딜 님이랑 오데트 님이요.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이어진 뒷말에 휴우 한숨을 쉬는 쌍둥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아침부터 요란스러웠던 쌍둥이를 앉혀두고 아침 식사까지 끝낸 네 사람은 슬슬 돌아갈 채비를 끝냈다.

먼저 앞서나가는 쌍둥이와 짐을 옮기는 시우를 거드는 샤론.

“오딜 님이랑 오데트 님이랑….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런가?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 없었으니까 내가 이상하다고 하는 거지. 난 그냥 푹 잤는데?”

시우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한편 샤론은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난데없이 마차에서 잠을 잤다고 하는 시우도 어딘가 수상하고, 유난을 떨며 누구랑 있었냐고 묻는 쌍둥이도 수상하다.

여자의 촉이 어젯밤 이변이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사실 시우가 누구랑 함께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다짐하지 않았던가?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시우가 누구를 만나던지 신경 쓰지 않기로.

하지만….

“진짜 마차에서 혼자 술마시다 잠만 잤다고?”

“그렇다니까.”

샤론의 눈은 모래사장을 향해 있었다.

쌍둥이가 앞서나간 두 쌍의 발자국 이외에도 어젯밤 시우가 남긴 것 같은 큰 발자국이 남아있다.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내가 뭣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 진짜 혼자였는데.”

“…응.”

그리고 그 옆에, 몇몇은 파도에 휩쓸리고, 몇몇은 바람에 지워진 것 같지만 분명 있다.

쌍둥이의 것도 시우의 것도 아닌 ‘다른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아있다.

마치 시우와 함께 나란히 마차로 걸어간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가슴이 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시우가 거짓말을 했으니까.

EP.319 #71_게헨나의 호스트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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