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1.
시우는 엘로아를 보자마자 무척이나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환대해 주었다.
그야말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비록 엘로아가 몰래 야한 짓을 했다는 것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샤론을 끌어들여 그 소리를 들려준 것은 어찌됐건 시우이다.
“스승님이 오셔서 좋네요. 조금 더 일찍 오셨으면 한결 재밌었을 텐데.”
그런 행동을 한 뒤에 어떻게 저리 천연덕스러운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인지.
엘로아는 겉과 속이 다른 듯한 시우의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시우는 누구보다도 한결같은 사람인데 말이다.
혹시 모종의 실수나 오해가 있었던 걸까?
라는 생각까지 슬금슬금 가슴에 떠오르고 있었다.
시우의 제안으로 산책에 나서게 된 두 사람.
모래사장에는 달리 산책로가 없었다.
하지만 철썩철썩 파도가 치는 밤바다를 유유히 거니는 것만으로 훌륭한 산책 코스가 되어주었다.
“달이 정말 예쁘네요.”
“그러…게 말일세.”
“스승님과 함께라 더 예쁜 것 같습니다.”
“…….”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짓고 그와 대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틀간이나 시우를 피해 방에 틀어박혀 있던 거니까.
말할 것이 있는데, 말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엘로아는 시우의 뒤를 졸졸 쫓아가며 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협해가 게헨나의 다른 지역보다 무더운 편이라고 해도 해가 저물자 계절에 맞게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말하지 말까?
그냥 이대로 묻어둬야 할까?
수백 번씩 반복되는 난제에서 끙끙거리고 있을 무렵.
갑자기 엘로아의 어깨에 무엇인가 감싸였다.
“바람이 찹니다. 아직 회복 중이시잖아요.”
“…고, 고맙네.”
시우가 가디건을 벗어 건네준 것이다.
엘로아는 공연히 시우가 덮어준 가디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크게 결심했다.
역시 말하자.
모두 말하고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자.
잘못된 일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게 의지를 다진다.
“시우, 들어줬으면 하는 말이 있네.”
“뭔가요?”
둘 사이에 지금껏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유롭게 앞서가던 시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엘로아를 돌아보았다.
창연한 만월 아래서 빛나는 수려한 용모.
외모로는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엘로아지만 시우가 잘생겼다는 것은 차마 부정할 수 없다.
아니지.
새삼 그의 외양에 감탄할 때가 아니다.
이제 슬슬 말을 하지 않으면 오늘은 영원히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엘로아가 더듬더듬 말을 꺼내려던 때.
갑자기 거리를 좁혀 온 시우.
슬슬 운을 띄우려던 엘로아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다시 쏙 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놀라서였다.
지금까지 시우는 대련을 제외하면 은근히 엘로아와 물리적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는데 말이다.
“그 전에.”
오늘 시우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조금은 숫기 없고, 엘로아를 은근히 어려워하던 태도가 간데없다.
어디까지나 여유롭고 차분해 보였다.
“스승님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주실래요?”
“무엇인가?”
그간 있던 말을 꺼내기에 앞서 시우가 먼저 사과를 하려는 걸까?
먼저 시작하기 굉장히 어려운 주제였던 만큼 엘로아는 그의 말에 이목이 쏠렸다.
시우가 물꼬를 터 준다면 한결 쉽게 해결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스승님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예상대로였다.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고민, 이것은 엘로아가 시우를 상대로도 항상 하던 것이다.
점점 깊어지는 고뇌 가운데서 그녀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던 것이기도 하다.
“나, 나도 마침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네만….”
“그럼 대화가 길어질 것 같네요. 조금 더 걸을까요? 앉아서 이야기하기 좋은 곳이 있거든요.”
실로 절묘한 타이밍에 시우는 대화를 끊었다.
엘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가 엘로아를 이끌고 간 곳은 해변가에 주차된 쌍둥이네 마차였다.
공간 왜곡이 걸려 움직이는 캠핑 트레일러라고 불러도 좋을 넓이를 지닌 마차 말이다.
정중하게 손을 뻗어 엘로아를 에스코트한 시우는 곧장 미니바에서 술 하나를 꺼내왔다.
“한 잔 받으시죠.”
“고맙네.”
두 사람이 대화할 때는 항상 술을 곁들였기에 새삼 이상한 것도 없었다.
시우가 따라주는 술을 받은 엘로아는 벌컥벌컥 그것을 들이켰다.
괜스레 바짝바짝 말라가던 목구멍을 알코올이 적셔주니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이어서 할까요?”
“나 역시 생각을 정리해 왔으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잘됐네.”
엘로아는 기묘하게 직감할 수 있었다.
시우가 말하려는 주제와 자신의 주제가 겹친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혼자만 부끄러운 말을 꺼내야 했으면 완전 막막했을 터인데.
“그럼 동시에 말해 볼까요?”
엘로아는 장난기 어린 시우의 미소에 화답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리봐도 오늘의 시우는 조금 달라 보인다.
오늘 여행이 그만큼 즐거웠던 것일까? 아니면 술이 적당히 들어가 느슨하게 이완된 것일까?
이렇든 저렇든 꽤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좋네.”
앉은 자세를 바로 하고 허리를 꼿꼿이 펴는 엘로아.
반면 시우는 편안한 자세로 싱긋 웃음을 짓고는 술잔 안 얼음을 빙글빙글 돌렸다.
“시우, 그대의 성벽이 독특하다는 것은 알겠네….”
엘로아는 눈을 질끈 감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쪽지를 줄줄 읊었다.
아니 읊으려 했다.
“스승님을 원해요.”
청천벽력 같은 시우의 말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번쩍 들고 시우의 눈을 마주한 엘로아가 본 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올곧게 그녀를 마주 보는 시우의 눈이었다.
그 눈동자엔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눈을 동그랗게 뜬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더군다나 시우는 멈추지 않았다.
“스승님을 안은 날 이후 한 시도 잊지 못했어요.”
몸을 일으킨 시우는 자연스럽게 엘로아에게 다가온다.
경악한 엘로아의 턱을 받쳐 들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스승님의 몸을 마음을, 영혼까지도 원합니다.”
엘로아는 머리가 백지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수백 수천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이곳까지 왔지만 이런 경우의 수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경악으로 굳은 목덜미를 파고든 단단한 손바닥.
시우는 엘로아를 끌어 일으키고는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마치 함부로 다루면 깨져버리는 비눗방울을 다루는 것처럼 말이다.
커다란 바다도 갈라버릴 수 있는 엘로아지만 시우가 그녀를 안아 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휘청 풀렸다.
넘어지려는 엘로아의 허리를 파고드는 시우의 손.
단단하게 지탱한 채 서로 코가 맞닿을 거리에서 눈을 마주한다.
“시…시우….”
그 순간 미칠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
머리가 어지러워 졸도할 정도의 당황이 엘로아를 잠식했다.
이제 엘로아도 알 건 다 안다.
지금 시우의 말 그리고 이 분위기가 무엇을 암시하는지는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다.
엘로아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비단 그의 파격적인 행동만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은 심경의 변화가 엘로아가 짐작했던 것과는 너무 다르다.
사제 간의 도리와 정해진 규율을 벗어나 ‘스승님을 가지고 싶다’는 시우의 말에 순수하게 품은 본심.
기쁘다.
내심 기쁘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시우가 엘로아를 가지고 싶다고 말해준 것이.
이렇게나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것이 기쁘다.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그와 살이 맞닿는 것이.
정말로 죄악스럽게도 기쁘기 짝이 없다.
“이래선 안 되네….”
하지만 안된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다.
이건 더 깊은 수렁에 발을 들일 뿐인 행동이다.
실수의 답습일 뿐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전혀 밀쳐내지 않으시네요.”
“힛…!”
하지만 시우는 엘로아의 거절을 들었음에도 더욱 과감하게 손을 뻗었다.
엘로아의 드레스 자락을 들치고 뱀처럼 기어들어 간 손이 맨살을 감쌌다.
숨을 집어삼킨 엘로아의 교구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말대로 엘로아는 그를 밀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품에 안긴 그 순간부터 몸에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중이다.
그의 손이 맞닿은 맨살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고 숨마저 가쁘게 변했다.
“스승님도 저와 같은 마음인 것이겠죠.”
엘로아는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 해 이를 꽉 물고 시우를 밀쳤다.
“그만하게나!”
노성을 내뱉으며 일부로 표정을 찡그린다.
사실 화나지 않았다.
당혹감 이외에는 어떠한 분노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에 잡아 먹혀버릴까 봐 발버둥 친 것뿐이다.
“시, 시우… 이래선… 이래선 안 된다네…. 나, 나는… 나는 그대의 스승이 되기로 다짐했네….”
그 증거로 엘로아는 시우와 떨어지는 순간 제 일부가 뜯겨나간 듯한 허탈함을 느꼈다.
상실감을 느꼈다.
그것을 애써 모른 체하며 정론을 입에 담는다.
“그대는, 비록 나의 낙인을 계승 받지 않았지만… 내 제자이지 않은가? 그대 역시 날 스승이라 부르지 않는가?”
“…….”
“스승과 부모는 다름이 없네. 자식이 부모를 섬기듯 스승을 섬긴다는 것은 스승 역시 제 자식을 사랑하듯 제자를 사랑한다는 걸세! 남녀 간의 정욕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천륜의 영역이라네!”
마치 변명처럼 빠르게 말을 잇는 엘로아.
“스승님.”
시우는 한 걸음 내디뎠다.
엘로아는 뒷걸음질 쳤다.
시우가 한발을 내밀 때마다 엘로아는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여기서 말려 들어 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실감이 엘로아를 그저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실력을 행사할 수도 없다.
상대는 시우이다.
엘로아가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그녀의 제자다.
-덜컥!
공간 왜곡이 걸린 마차라고 해도 실내 공간이었다.
무작정 뒤로 물러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엘로아의 등이 벽에 닿고 시우는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저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으며 벽에 바짝 붙는 엘로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잘 풀어나갈 수 있을까?
열심히 이것저것을 떠올리던 엘로아의 머리에 팟 떠오른 한 사람.
시우를 멈춰 세우고, 엘로아 자신도 멈춰 세울 수 있는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더군다나… 더군다나… 그대의 곁에는 샤론 에버그린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시우의 옆에는 이미 연인이 있다.
정혼 관계라고 해도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여성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이거라면 시우도 자중하겠지.
-턱!
그러나 시우의 행동은 예상과 달랐다.
엘로아를 벽에 몰아넣은 시우는 그녀가 도망갈 공간을 차단하겠다는 듯.
그녀의 머리 옆 공간에 팔을 박아 넣었다.
그림자에 삼켜진 엘로아는 떨리는 눈동자로 시우를 올려본다.
“지금 제 앞에는 스승님 밖에 계시지 않은 걸요?”
엘로아는 숨을 집어삼켰다.
시우는 손을 뻗어 엘로아의 분홍빛 머리카락 사이를 어루만지더니 새빨갛게 달궈진 귀를 슬며시 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끝이 시우 가슴을 밀어내려 들었다.
그러나 거리를 벌리고 싶다기에는 너무나도 약한 힘이었다.
이러면 안되는 데를 벌써 천 번쯤 속으로 되뇌고 있었지만 도저히 뿌리칠 수 없다.
왜일까?
왜 뿌리칠 수 없을까?
흔들림 없이 직시해오는 그의 눈동자에 잡아먹힐 것 같기 때문일까?
아니면 실은 엘로아 자신도 이런 상황을 원했기 때문일까?
“그만… 하게나….”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시우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온다.
피할 수 없게 엘로아를 단단히 고정하고 점점 거리를 좁혀온다.
“이제 숨기지 않을래요.”
엘로아의 몸이 벽에 찰싹 붙었다.
아예 벽과 하나가 될 정도로 도망치고 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기 직전 엘로아는 고개를 휙 돌렸다.
만약 여기서 입을 맞춘다면.
정말로 멈출 수 없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엘로아는 불쌍할 정도로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네… 시우. 조금 진정하고… 차분하게 대,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
멀어지는 시우의 기척을 느끼고 한쪽 눈만 빼꼼 떠서 시우를 바라본 엘로아.
그가 바라는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바라는 것을 엘로아도 전혀 원치 않는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일까?
실망이 가득 서린 그의 얼굴을 본 엘로아는 어쩐지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희가 사제 관계라 그런 건가요?”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그대와 나는….”
“엘로아.”
시우의 낮은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귓가를 파고든다.
스승님이라는 호칭이 아니었다.
금단과 배덕의 선을 넘어선 달콤하고 감미로운 호칭이었다.
시우의 무릎이 엘로아의 다리 사이를 강제로 파고든다.
부드럽지만 강인한 힘으로 단단하게 엘로아의 목덜미를 받쳐 든다.
또 한 번 입술이 가까워진다.
“거짓말은 그만해.”
엘로아의 입술에 시우의 입술이 맞붙었다.
꾹 다물려던 엘로아의 입술 사이로 말캉한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EP.312 #70_사랑보다 먼 제자보다는 가까운(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