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1.
“샤론 언니! 저희도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어? 어?”
오딜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는 오데트의 손목을 끌고 후다닥 밖으로 나섰다.
조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아니다.
거사를 앞두고 작전 회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얘! 얘! 정신 좀 차려봐 오데트.”
“언니… 나는 틀렸어…. 양지바른 침대 위에 올려줘….”
“꽁트 할 때가 아니라니까!”
“하아아아암….”
하지만 오데트는 영 의욕이 없어 보였다.
어제 밤 늦게까지 묘약을 만들고, 하루 종일 놀고, 배도 부른데 술까지 들어가니 오딜보다 술에 약한 오데트가 먼저 그로기 상태가 된 까닭이다.
“후우, 얍!”
“힉! 아팟!”
오딜은 한숨을 푹 쉬더니 수영복에 감싸이지 않은 오데트의 엉덩잇살을 꼬집었다.
찌릿한 통증에 눈물이 찔끔 나면서 눈을 치켜뜬 오데트.
오딜은 오데트의 말랑한 뺨을 잡고 척 눈을 마주쳤다.
“오데트! 정신 차려! 여긴 전장이야!”
“오로쏘….”
오딜의 불호령에 완전히 정신을 차린 오데트.
오딜은 손바닥에 찌그러져 붕어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온 입술에서 대답이 나오고서야 오데트의 뺨을 놓아주었다.
“너도 아까 느꼈잖아. 조수님이 우리한테 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
“언니, 그런데 나는 있잖아….”
“…우리의 비밀 관계 그만하자고 하려고 했어.”
“…알아.”
선텐 오일을 발라달라고 요청하고 평소처럼 야한 농담을 던졌을 때의 조수님의 반응.
시우의 망설이던 눈빛과 반쯤 열렸던 입술이 무슨 말을 뱉으려 했던 것인지는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원체 감정을 숨기는 것이 미숙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샤론 언니와의 싸움은 지금이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인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이대로 패배해 버리고 마는, 그런 순간.
하지만 그런 긴박한 순간 속에서 오데트에게는 일말의 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점이 오딜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묘약도 만들어왔잖아. 작전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언니….”
“그 축 늘어진 어깨는 뭐고?”
“언니, 있잖아. 내 말 좀 들어줘.”
오딜은 머리에 오르는 열을 가라앉히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여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뭔데?”
“나도 생각해 봤어. 우리는 아직 견습마녀이고 또 조수님 옆에는 새로운 사람이 생겼잖아….”
순간 오딜의 입이 댓 발 튀어나온다.
벌떡 일어나서 반쯤 윽박지르듯이 오데트에게 소리쳤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무시하며 화를 낼 뿐이다.
“그래서 뭐! 이대로 포기하자고? 아직 우리한텐 묘약이 남아 있다니까?”
마시고 난 이후 개인차가 있지만 대략 일주일간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묘약.
그 묘약을 조수님께 먹이고 샤론 언니 앞에서 알콩달콩한 애정행각을 보여준다면?
그야말로 상황을 뒤집을 반전의 한 수가 되는 것이다.
“그치만, 묘약이 어떤 건지는 언니도 알잖아.”
“…….”
“그건 진짜 마음을 보여주는 약이 아닌 걸….”
오딜은 오데트가 우물쭈물거리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사실 그건 오딜이 이미 알고 있던 부분이기도 했다.
금지된 묘약을 통해 조수님의 사랑을 받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샤론 언니 앞에서 보여주는 것.
모두 편법이고 반칙이다.
조수님의 의사를 깡그리 무시한, 대책 없는 떼쓰기나 다름없다.
“조수님이 묘약을 마시고 우릴 좋아해 주고 사랑해줘도. 그게 의미가 있을까?”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하는 건데. 설마 겁먹었어?”
오딜은 애써 그런 진실을 외면하고 도리어 오데트를 도발하듯 물었다.
오데트는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의 언니와 마주한다.
“응, 무서워.”
“…….”
“조수님한테 묘약 효과가 사라졌을 때 그때는 얼마나 우리한테 실망하실지, 어떤 생각을 떠올리실지, 어떤 눈빛으로 우릴 바라보실지 모두 무서워.”
“그, 그럼… 효과가 끝날 때쯤마다 계속 먹이면 되잖아!”
“언니.”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오딜 쪽이었지만 어쩐지 궁지에 몰린 듯한 것도 오딜이었다.
오데트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오딜을 꼭 껴안았다.
“우리 정정당당하게 해보자. 지금 당장은 샤론 언니를 이기지 못해도 진짜 실력으로, 우리 매력으로 싸우는 거야.”
“…….”
“언니가 말했잖아. 우리는 포기를 모르는 제머나이라고. 지레 겁먹고, 체념하고, 포기하는 건 제머나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
“우리만 할 수 있는 건 아직 남아 있어. 그러니까 묘약을 사용하는 건 관두자.”
“그러다가 조수님이… 완전히 우릴 포기하면 어떡해?”
오데트의 눈이 스산하게 빛난다.
“그땐 밤에 가서 덮치자. 묶어 놓고.”
“오데트….”
힘이 바짝 들어갔던 오딜의 어깨가 흐물흐물 물렁해진다.
오딜은 후웁 심호흡을 하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좋아! 결심했어!”
오데트의 말이 하나부터 열까지 옳다.
견습마녀는 원래 실패로부터 배우는 법이다.
쌍둥이는 자신들의 일차적인 패배를 인정한 순간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우리는 오늘 졌어! 하지만 전의가 사그라들지 않는 이상! 제머나이의 심장은 멈추지 않아!”
“맞아! 맞아!”
“비겁한 하책에 기대지 않고 정진 정명한 수단으로 싸움에 임하자! 묘약 따위는 당장 버려버리는 거야!”
“언니! 멋져!”
쌍둥이는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타박타박 술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씩씩한 발걸음으로 앞서가는 오딜의 옆에 쪼르르 달려든 오데트가 붙는다.
“오데트.”
“응? 언니.”
“근데 조수님이 묘약 먹으면 어떻게 될 지 궁금하지 않아?”
“나중에 조수님을 쟁취하고, 그 뒤에 먹여보자.”
“그래그래.”
오늘도 조금 더 성장한 오딜과 오데트였다.
2.
“앗 뜨거 시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필터 끝까지 타오르고 있었다.
졸지에 손가락을 델 뻔하고 꽁초를 던진 시우.
“뭐야?”
너무 고민을 깊게 했나?
장초였던 담배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다니.
조금 어이가 없어서 어깨를 으쓱하게 된다.
“별일이 다 있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기다리게 한 것 같다.
별장으로 돌아오자 질펀하게 벌어진 술판이 시우를 반겼다.
생각보다 고민의 시간이 깊었던 탓일까?
쌍둥이는 겨울잠 자는 작은 동물처럼 서로의 몸을 딱 붙이고 소파에 누워있다.
하긴 아직 견습마녀인 쌍둥이가 침실에 들 시간이긴 하다.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샤론 역시 졸린 눈을 끔뻑이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하암, 왜 이렇게 늦었어?”
“잠깐 생각 좀 하느라. 많이 피곤해?”
“하아… 오늘 너무 재밌게 놀았나 봐 자꾸 졸리려고 하네.”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 정리는 내가 할게.”
“아냐, 나도 해야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며 작게 코를 고는 쌍둥이를 번쩍 들어 침대에 눕혔다.
주섬주섬 일어나 정리를 도우려는 샤론도 반쯤 억지로 떼어내 침실에 먼저 밀어 넣었다.
피곤해 하는 샤론도 예쁘다.
침대에 눕히는 김에 자연스럽게 키스하려고 하자 샤론이 손바닥으로 막아선다.
“응?”
“오, 오늘은 좀 그래. 쌍둥이도 있잖아.”
“고작 키스만인데 뭘.”
“너랑 키스하면 못 멈추겠단 말이야…. 나 피곤하기도 하고…. 오늘은 좀 자려고.”
조금 놀랐다.
샤론이 먼저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마 쌍둥이가 신경 쓰이는 것이겠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짤막한 대화 이후에 다시 거실.
“적막하구먼.”
시끌벅적하던 소란이 잠잠해지자 괜히 어질러진 자리가 더 더러워 보인다.
그래도 손님으로 재밌게 놀았으니 뒷정리 정도는 깔끔하게 해야지.
너부러진 빈 병부터 바닥에 떨어진 각종 부스러기까지 깔끔하게 청소.
활짝 펼쳐져 있던 피크닉 바구니를 정리하던 시우는 보온병에 담긴 차를 찾아냈다.
투명한 병에 담긴 차 색깔이 참 예쁘다.
“마침 목말랐는데 잘됐네.”
술도 잔뜩 마시고 담배도 피워서 그런지 입이 텁텁했는데.
시우는 주저않고 뚜껑을 열어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시원하면서도 향긋한 홍차의 풍미를 느끼며 마저 청소했다.
3.
엘로아는 협해의 모래사장을 따라 걷고 있었다.
발걸음은 마치 족쇄를 찬 죄수의 것처럼 무겁다.
“후우….”
오늘로 몇 번일지 셀 수도 없는 한숨이 푸욱 새어 나왔다.
엘로아는 어제 자신의 추태를 떠올렸다.
샤론을 끌고 들어와 엘로아에게 보란 듯이 성교 소리를 들려주었던 시우.
그를 엄격하게 질책할 것을 다짐했던 엘로아였지만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거의 3시간 내리 테이블 모서리를 축축하게 물들이고 말았다.
“정신이 나갔던 게지….”
다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자의 성교 소리를 듣고 홀로 자위행위를 하는 스승이 있다니.
누군가 알게 된다면 엘로아는 주저 없이 목숨을 끊을 용의가 있었다.
스스로의 허물이 부끄러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엘로아는 고개를 푹 숙일 따름이었다.
“아….”
저 멀리서 불빛이 아른거리는 걸 보니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걸 도대체 시우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원래대로라면 그를 엄격하게 훈계 이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재발 방지를 약조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솔직과 정직을 미덕으로 삼는 엘로아는 도저히 자신의 추태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제 옷에 묻은 검댕이는 모른 채하고 남의 더러움만을 질책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엘로아가 길을 나선 것은 비단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닌.
고해성사를 위한 순례길인 셈이다.
그것이 엘로아의 발걸음이 무거운 이유였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시우, 그대의 성벽이 독특하다는 것은 알겠네. 하지만 그것은 옳지 못한 행위라네. 남녀 간의 사랑이란 비밀스러워야 하고 또한 정숙하여야 하네. 몸을 섞는 것은 말초적인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고결한 과정이여야 하네….”
엘로아는 자신의 몇 번이나 고치고 수정한 쪽지를 읽으며 타박타박 걸었다.
사실 이 부분까지는 낯 뜨겁긴 해도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다.
올바른 성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스승의 소임이니 말이다.
문제는 이 뒷부분인데….
“더불어 그대에게 사죄하고 싶은 일이 있네 오해 않고 들어주길 바라겠네. 나 역시 그대에게 큰 죄를 저질렀네.
그대가 샤론 에버그린과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들었고…. 순간의 충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음(手淫) 행위를 하고 말았네.
하지만 이건 그대를 이성적으로 의식했기 때문이 아니라네 생리적인 반응이었으며….”
다시 봐도 머리가 아득해진다.
어제의 자신이 눈앞에 있다면 두들겨 패버리고 싶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만행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냥… 입에 담지 말아야 할까…?”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아예 통째로 없던 일로 해버려야 할까?
엘로아는 반쯤 울상이 된 채로 별장에 도착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둑한 조명 속 소파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시우가 보인다.
“시우.”
엘로아는 시우를 바라보며 주눅이 잔뜩 든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 스승님! 오셨군요? 늦으셨네요.”
시우도 엘로아를 보았다.
EP.311 #70_사랑보다 먼 제자보다는 가까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