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1.
“이야… 경치 죽이네.”
수영복을 맞춘 뒤 흔들림 없는 마차의 편안함을 느끼며 도착한 협해.
말로만 듣던 브루주아의 전유물, 프라이빗 비치에 첫발을 내민 시우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금보다 하얗게 깔린 모래와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태양.
파랗게 펼쳐져 수평선과 맞닿은 쾌청한 하늘에는 파도 소리가 기분 좋게 부서진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풍광이었다.
“그야말로 휴양지네.”
더군다나 해변에서 고작 20초 거리에 세워진 별장이 또 예사롭지 않다.
2층짜리 별장은 크기도 규모도 시우와 엘로아가 머무는 별채만큼이나 작았지만 바다를 향하는 곳이 전부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무슨 두바이도 아니고….”
“바다바다바다다!”
“오데트 류! 하이퍼 부스트!”
오도도 발소리와 함께 모래사장 위로 똑같은 사이즈의 발자국이 나란히 달린다.
감탄하는 시우의 양옆을 쓩 지나간 쌍둥이는 짐 가방도 내팽개친 채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영복도 갈아입지 않고 허리 높이의 바닷물로 입수한 쌍둥이.
“조수님! 빨랑 와! 엄청 시원해!”
“조수님도 들어와요!”
에메랄드빛 물 위로 치맛자락이 연못 위 꽃잎처럼 둥둥 떠오르고.
쌍둥이는 물방울 튀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시우도 멀리서 지켜보던 샤론도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할 만큼 신나보인다.
“오딜 님! 오데트 님! 옷 먼저 갈아입으셔야죠!”
“괜찮아요!”
“갈아입을 옷도 챙겨왔어!”
“엄청 좋아한다.”
“그러게, 눈 오는 날 허스키 같네.”
샤론과 나란히 서서 쌍둥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현세에 일이 떠올랐다.
쌍둥이가 잠깐 놀러 왔었을 적 놀아주면서 뭔가 부부가 된 감상을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묘하게 그림이 비슷한 것 같다.
“조수님!”
“빨리 오라니까요!”
물을 첨벙이며 시우를 재촉하는 쌍둥이.
시우는 쓴웃음을 머금고 샤론을 보았다.
“옷 입고 들어가게?”
“짐만 먼저 가지고 가 줘. 난 쌍둥이 데려가야 될 것 같아.”
“조오수우니임!”
“네~ 갑니다. 가요~”
샤론에게 짐을 맡긴 시우는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있는 쌍둥이들 옆으로 몸을 날렸다.
시원한 바다였다.
2.
“흐아아아암….”
파라솔을 설치하고 선베드에 누워 있는 시우.
휴양지에 온 기분을 제대로 만끽하며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파도 소리도 기분 좋고, 시원한 그늘에 속이 얼어버릴 것 같은 맥주도 기분 좋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소금기 섞인 바람까지 아주 좋다.
심지어 뷰는 어떠한가?
자연경관 뿐 아니라 첨벙거리며 신나게 물놀이를 하는 정다운 쌍둥이와 샤론의 모습이 참 눈부시다.
과연 플로라가 호언장담 할만했다.
과거 여성들이 어떤 수영복을 입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플로라는 특유의 현대적인 감성을 바탕으로 플로리다 해변에서 입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수영복을 각각 선물한 것이다.
우선 쌍둥이.
프릴이 한껏 달린 튜브탑 브라 형태의 비키니.
상체의 노출은 줄이면서도 품위와 우아함을 잊지 않게 하는 자연스러운 형태였다.
오딜은 검은색 오데트는 하얀색으로, 비키니는 검은색이냐 흰색이냐의 논쟁을 원천부터 차단해버렸다.
다음은 샤론.
벨리댄서의 화려한 의상을 연상시키는 장식이 달린 검정색 모노키니였다.
자연스럽게 배꼽을 노출하는 의상의 디자인이나 등 허리를 감싸는 와이어.
언뜻언뜻 엿보이는 옆 가슴은 마치 서큐버스의 의상처럼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무튼 하늘 끝까지 찌르는 쌍둥이의 텐션에 지쳐 나가떨어진 시우와는 달리 샤론은 끝까지 쌍둥이들과 물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하하, 애들아 하지 마!”
“에잇! 에잇!”
“오데트 류, 물 대포!”
“하지 말라니까!”
물을 뿌리며 샤론을 쫓아다니는 쌍둥이와 장난을 받아주며 도망치는 샤론.
저렇게 셋이서 잘 놀고 있으니 꼭 쌍둥이가 아니라 세쌍둥이를 보는 것 같다.
의외로 잘 논단 말이지.
“어?”
뭔가 점점 스케일이 커지고 있지 않나?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처음에는 손으로 물을 찍찍 뿌리는 정도였던 싸움이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마력이 개입하고 있었다.
쌍둥이의 주변에 둥둥 떠다니는 발리볼 크기의 물 구슬이 일제히 샤론을 향해 쇄도한다.
마찬가지로 샤론은 바닷물 위를 탄탄한 지면처럼 달리며 현란한 회피기동을 펼치고 있다.
요즘 샤론이 쌍둥이에게 원소 마법을 가르치고 있다니 놀이식 수업의 일환이려나?
-쿠구구구궁!
그때 지진 같은 흔들림이 생기더니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지간한 건물 한 채는 충분히 집어삼킬 법한 거대한 바다의 장벽이 일어선 것이다.
“내가 그만하랬지!”
게헨나에 뜬금없이 지진이 일어나 쓰나미가 생겼을 리는 없고.
저게 물놀이의 일환이라는 의미이다.
높게 치솟았던 파도가 쌍둥이와 샤론을 덮치며 정신없던 물놀이도 일단락되었다.
3.
“코에 소금물이 들어갔어….”
“따끔따끔해요….”
“미, 미안해 애들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은 쌍둥이는 모래사장에 철퍼덕 주저앉은 상태로 칭얼거렸다.
샤론은 옆에서 미안한 표정으로 쌍둥이의 어깨 위에 거대한 타올을 덮어주었다.
물놀이하다가 격해진 건 사실인데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갑자기 높아진 20 위계의 마법에 익숙지 않았다는 점, 마법을 통제할 수 있는 예장인 완드와 마녀복이없었다는 점이 더해져 힘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저 먼바다로 휩쓸려 보더타운에 두둥실 떠오를 뻔 했던 쌍둥이를 시우가 리본으로 주워온 참이다.
“샤론 언니, 진짜 미안해요?”
“응,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 정말 미안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운 정 미운 정이 든 쌍둥이다.
샤론은 솔직하게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
“그럼! 피크닉 바구니 가져 와 주세요!”
“맛있는 거 많이 싸 왔어요! 같이 먹어요!”
“내가 갈게.”
시우가 몸을 일으키려던 때 샤론이 양팔을 내저으며 시우를 다시 선베드에 앉혔다.
“아냐, 내가 다녀올게. 금방 올게!”
말릴 새도 없이 달려 나가는 샤론.
샤론이 사라지자마자 쌍둥이는 언제 기운이 빠졌냐는 듯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지금이야 오데트!”
“응! 언니!”
곧장 바닷가 한 구석에 놓아두었던 짐으로 향한 오데트와 오딜은 돌돌 말려있던 일광욕 매트를 모래사장 위에 촤악 멋지게 펼쳤다.
이후 수영복 상의를 훌렁훌렁 벗었다.
바닷물에 절여진 수영복이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쌍둥이의 아담한 가슴.
오랜만에 보는 쌍둥이의 봉긋한 가슴이 싱그럽게 눈에 아른거렸다.
“지금 뭐 하시나요?”
별안간 상의 탈의라니.
깜짝 놀란 시우가 질문했을 때는 쌍둥이는 이미 슬라이딩하는 기세로 모래사장 위에 깔아둔 매트리스 위에 엎드린 이후였다.
“보면 알잖아! 조수님! 우리 오일 발라줘!”
“일광욕할 거에요!”
“너무 뜬금없는데요?”
“내가 오데트랑 연구했는데 피부를 적당히 그을린 여성은 섹시한 매력을 어필할 수 있대!”
“전 꼭 해보고 싶었어요! 저희 스승님들은 매 여름마다 하셨거든요!”
쌍둥이는 쌍둥이대로 흑심이 있었다.
아무런 의심도 사지 않고 자연스럽게 조수님과 맨살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이다.
샤론이 있으면 분명 견제해 올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녀를 멀리 보내버리고 그사이에 후딱 일을 치르는 것이다.
“빨리~ 조수님~”
“서두르지 않으시면 저흰 모두 햇볕에 마른오징어가 되어버릴 거에요.”
“어휴, 알았습니다.”
오딜과 오데트는 땅 짚고 헤엄치듯이 발을 통통 귀엽게 굴렀다.
쌍둥이의 애교에 넘어가 주기로 한 시우가 준비한 오일을 들고 옆에 철푸덕 앉았다.
계획이 순조롭게 이뤄지자 저들끼리 히히덕거리는 쌍둥이.
먼저 화사한 등 위로 오일을 쭈욱 뿌렸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 까봐 크기도, 면적도, 심지어 누워있는 자세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날개뼈 부근도 완전히 일치한다.
“으으….”
“흐으….”
갑자기 위로 부어진 오일에 오딜와 오데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조금 차가웠던 모양이다.
“합니다?”
“난 준비 완료야.”
“저두요!”
옆에 있는 물로 손에 묻은 모래를 대충 씻고 오딜과 오데트의 등에 손을 올렸다.
괜히 한쪽만 먼저 해줬다가는 군소리 듣기 뻔하기 때문이다.
-움찔!
-움찔!
시우의 손이 맨살에 닿자마자 오딜과 오데트는 알기 쉬운 반응을 보였다.
나름 편안하게 이완되어 있던 자세에서 갑자기 얼음이라도 올려놓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는다.
뭔가 발끝도 발레를 하는 것처럼 쭈욱 뻗고 있고 말이다.
-쓰윽 쓰윽 쓰윽
시우는 두 손을 번갈아 움직이며 허리께에서 등줄기를 타고 등 부위까지 골고루 오일을 발랐다.
근데 이거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손바닥과 살의 밀착감이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오일이 도포되며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는 쌍둥이의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은 여러 가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평상시 쌍둥이는 그저 귀여운 동생 같은 느낌이지만, 옷을 벗고 진심으로 유혹할 때는 소악마같은 위력을 자랑하니 말이다.
시우의 손이 엎드린 자세로도 전혀 삐져나오지 않는 옆구리에 닿았을 때.
오딜과 오데트는 동시에 나지막한 탄식으로 합주를 시작했다.
“하앙….”
“흐응…. 응….”
“이상한 소리 금지입니다.”
“그치만, 조수님 손길 오랜만인걸?”
“맞아요, 조수님이 저희 몸을 막막 주무르고 있다니…. 뭔가 야해요.”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구나 싶긴 한데.
뭔가 계속 만지게 된다.
생기 넘치는 살결과 선텐 오일의 조화는, 청각부터 촉각 그리고 시각을 흉악하리만치 자극했다.
“조수님은 어떤 기분이야?”
“미지근한 스테이크에 올리브유로 마리네이드 하는 느낌이요.”
“…그게 다예요? 막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어…음….”
“이따 밤에 몰래 우리 숙소로 넘어오면…. 다른 곳에도 오일 바를 수 있게 해 줄게.”
“조수님한테도 잔~뜩 발라 드릴게요!”
올 것이 왔다.
사실 슬슬 쌍둥이에게 전해야겠다고는 생각했다.
타이밍이 나지 않아 말을 건네지 못했을 뿐.
“큼큼, 오딜 님, 오데트 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시우의 헛기침에 고개만 살짝 돌린 쌍둥이가 시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신비로운 자색의 눈동자가 일제히 쏠리자 시우도 괜히 말문이 막혔다.
“저, 그게… 음….”
외롭고 기댈 곳 없던 허망한 풍요.
대화를 할 사람도 없고, 누군가 시우를 기억해주지도 않았다.
그때 만났던 사람이 샤론이다.
처음에는 빚투성이이던 샤론과 공생 관계라는 명목으로 함께할 뿐이었지만 서로서로 보드 담아 주면서 관계가 깊어져 갔다.
이제는 누군가 여자친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샤론이 떠오를 정도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대로 애매한 관계를 지속한다면 바람을 피우거나 어장을 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이런 모호한 관계는 확실히 정리를 해야 하긴 하는데…
“…….”
“…….”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쌍둥이는 굉장히 직감이 좋았다.
오딜은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차마 말을 뱉지 못하는 시우를 보고 있었고, 오데트는 거의 눈물을 글썽일 지경이 되었다.
시우가 아직 노예이던 시절 호기심으로 다가왔던 쌍둥이.
비록 쌍둥이의 강압으로 시작된 관계지만 함께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노예와 견습마녀 이상의 끈끈한 유대감을 쌓아갔다.
아멜리아와 결별하고 반쯤 폐인이 되었을 때.
살포시 끌어안아 주었던 오딜의 포근함을.
현세로 돌아가게 된 시우에게 정성 어린 선물을 준비해 주었던 오데트의 상냥함을.
시우를 향한 쌍둥이의 호의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을 피우거나 어장관리를 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지만.
시우만을 바라보는 쌍둥이에게 일선을 긋는 것은 그 이상으로 잔인하고 염치없는 일로 생각되었으니까.
진짜 결정하기 너무 어렵다.
그냥 세 사람다 행복하게 해주면 안되나?
같은 무책임한 생각만 떠오른다.
“…이따 바비큐 할 때. 제가 구울게요. 저 고기 잘 굽거든요.”
시우는 속으로 한숨을 푸욱 쉬며 결정을 미뤘다.
다음에 타카쇼 찾아갈 때 진지하게 상담을 좀 해봐야겠다.
타카쇼라면 조금 그럴 듯한 충고를 해주겠지.
“그, 그래? 그런 걸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해….”
“마, 맞아요…. 놀랐단 말이에요….”
쌍둥이의 어색한 미소가 맴돌 무렵.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저 멀리서 피크닉 바구니를 가져오던 샤론은 윗옷을 벗고 드러누워 있는 쌍둥이를 보며 헐레벌떡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