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1.
달빛마저 구름 뒤로 꽁꽁 숨고 풀벌레도 쿨쿨 잠이 든 야심한 시각.
어둑한 방 안에서 쌍둥이의 속삭임과 더불어 보글보글 액체가 끊는 소리가 들렸다.
“오데트, 다시 확인해 봐. 이거 아니잖아.”
“어? 그렇네. 잠시만 언니….”
오딜과 오데트가 머리를 맞대고 쑥덕이는 이곳은 구 서고 옆에 딸린 연금 제조실.
재벌 총수 제머나이 백작이 ‘우리 애들 교육에 좋으니까~’라고 만들어준 것이기에 어지간한 연금 계통의 마녀들도 탐을 낼 만한 최첨단 장비와 재료로 가득하다.
복합증류관과 원심분리기, 저울과 마력 가열판, 정밀 계측 시험관과 시약 등 수백 가지 연금 기구들이 즐비해 굉장히 본격적이었다.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어둑한 랜턴 아래서 책을 펼쳐둔 쌍둥이.
오데트는 열심히 연금에 필요한 재료를 손질 중이었고, 오딜은 마녀의 솥을 올려 가열할 초크 보드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쌍둥이가 열심히 힐끗거리며 참고하는 것은 받침대에 펼쳐진 두툼한 고서.
바로 오늘 구 서고에서 발견한 ‘금지된 묘약 제조서’ 제2권이다.
오딜과 오데트는 절박했다.
이제까진 샤론 언니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는 중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어디까지나 대등한 상대로서 그녀를 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샤론 언니와 뜨거운 성교를 나누던 조수님, 그리고 친밀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쌍둥이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게다가 샤론에게는 쌍둥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앙큼한 색기가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명백히 뒤처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원숭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전황을 뒤집을 일발 역전의 한 수를 위해 서고를 꼼꼼히 뒤진 끝에 원하는 묘약 제조서를 찾아내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즉각 제조에 돌입.
지금은 한참 묘약을 연금 중인 것이다.
으슥한 랜턴 조명 아래 역광이 비친 쌍둥이의 얼굴.
표표히 빛나는 광기 어린 자색 눈동자는 그야말로 매드 사이언티스트 혹은 마녀다웠다.
“오데트 내가 만들어 놓은 마력로에서 3.3초씩 5회 가동하래.”
“흐우우, 진짜 어려워 언니….”
“이리 줘 봐. 내가 할게.”
사실 제머나이의 자성 마법과 연금술은 크게 관련이 없다.
하지만 견습마녀는 의대생과 같은 존재다.
외과의가 되고 싶건 성형의가 되고 싶건 기본적으로 인체 전반에 지식과 실무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것처럼 쌍둥이 역시 각 계통의 마법을 공부하는 것이다.
샤론에게 원소 마법을 배우는 것도 같은 이치였고 말이다.
그중에서도 쌍둥이가 가장 뛰어난 분야를 꼽으라면 이 묘약 제조였다.
당연하지만 온갖 장난을 치기 쉬운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옛날에 스승님 턱에 수염 나게 했던 묘약보다 어렵네….”
“먹고 3일 내내 잠들었던 묘약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장난삼아 만들었던 턱수염이 자라게 하는 ‘바이킹의 묘약’.
수업을 듣기 싫으면 누가 깨워도 못 일어날 정도로 종일 자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발상에 만들었던 ‘동면의 묘약’.
모두 제법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묘약이었는데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제2권이라 그런지 난도가 확 올라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정성껏 손질 및 가공한 연금 재료를 솥에 넣고, 올바른 마력로(魔力爐) 위에서 올바른 타이밍 동안 마력열로 가열하면 묘약은 이름대로 신비로운 성질을 띠게 된다.
오딜과 오데트는 한참이나 고군분투한 끝에 예쁜 보라색의 약물을 만들어 내었다.
-치이이익!
“후우….”
“길고 긴 싸움이었어.”
오딜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플라스크를 얼음물에 병째 담가 열을 식히는 것으로 일단 제조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걸음.
“시약을 넣어서 안에 눈꽃 문양이 생기기만 하면 제대로 만들어진 거야.”
묘약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를 일일이 마시거나 먹여가며 확인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묘약 제조서에는 반응 실험을 통해 성공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험약이 있었다.
오데트가 쥐고 있는 스포이트에 담긴 투명한 액체처럼 말이다.
“좋아, 해보는 거야.”
“벌써 세 번이나 실패했으니까…. 이게 진짜 마지막이겠네.”
“오데트! 부정 타잖아!”
“미, 미안해 언니….”
쌍둥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 플라스크 안으로 시험약 몇 방울을 똑똑 흘려 넣었다.
그와 동시에 플라스크 안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눈꽃.
“우아아아…!”
“됐다아…!”
오딜과 오데트의 노력을 축하하듯 플라스크 안에는 아름다운 결정이 피어났다 사그라들었다.
“언니! 이것 조수님께 먹이면!”
“그래, 샤론 언니 앞에서 한 방 먹여 줄 수 있는 거지.”
쌍둥이는 아무 생각 없이 샤론에게 1박 2일 여행을 함께하기로 한 것이 아니었다.
샤론 언니 본인은 자각이 없겠지만 그런 질투 나는 장면을 보여주었으면 갚아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쌍둥이가 만들어 낸 것은 ‘에로스의 묘약’의 남성 버전.
묘약을 마신 이후 바라본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버리게 만드는 ‘스윗 묘약’이다.
성욕과 호감을 동시에 증대시키는 에로스의 묘약과는 효과가 조금 다르지만 맥락은 같다.
기세 등등할 샤론 언니 앞에서 쌍둥이에게 푹 빠진 조수님을 보여준다면?
이것만큼 좋은 리벤지가 없는 것이다.
“오데트, 반격의 성화를 들자!”
“응 언니! 본때를 보여줘야지!”
“후후….”
“우후후후….”
거의 날밤을 꼬박 새운 쌍둥이의 얼굴에는 피로도 잊은 음흉한 미소가 피어났다.
2.
늦가을에 바다는 무슨 바다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게헨나 유일의 휴양 해변 푸른 협해(狹海)는 대표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고온 건조 겨울에도 그리 추워지지 않고 습하다.
지구에서 비슷한 기후를 가진 곳을 뽑으라면 캘리포니아 해안 지역을 들 수 있겠지.
아무튼 바닷물이 여름보다 차긴 해도 얼마든지 놀 수 있다고 오딜 오데트는 열변을 토했다.
이른 새벽부터 시우, 쌍둥이, 샤론을 태운 마차는 플로라 양장점 앞에 도착했다.
참고로 아침에 스승님을 찾아가 꼬셔가려고 했지만 엘로아는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다.
다만 문 너머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알아서 찾아가겠네. 먼저 가 있겠나’라고 답했을 뿐.
애초에 쌍둥이가 주최하는 피크닉이기도 하고 더 기다리게 하기도 뭐해서 일단은 마차에 올랐다.
곧장 협해로 가지 않고 양장점을 들른 이유.
바다에서 재밌게 노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수영복이다.
“수영복 맞추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을까요?”
시우는 조금 아연해졌다.
기껏해야 보더타운에서 공수해 온 것으로 입을 줄 알았는데….
수영선수도 아니고 맞춤형 수영복이라니.
“당연하지! 조수님. 수영복도 엄연히 패션의 일환이고 레이디가 갖춰야 할 소양이라구!”
“저희 매년 수영복 여기서 맞춰 입어요! 아주 예쁘고 빠르게 해주시거든요.”
쌍둥이는 벌써 텐션이 높다.
양옆에서 시우의 손을 밀거니 당기거니 하며 교회당 같은 양장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일전에 아멜리아와 여기에 와서 양복을 맞췄던 기억이 있다.
노예 시절에 한 번, 기억이 없을 때 한 번.
교회당처럼 웅장한 외관도, 도저히 옷가게라고 생각되지 않는 중후함도 여전했다.
“안녕하세요! 아라베스크 마녀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야, 시끄러운 제머나이 쌍둥이들.”
“오늘은 수영복 맞추러 왔어요!”
“슬슬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긴 했어.”
씩씩하게 손을 들며 인사하는 쌍둥이.
여전히 나른한 표정으로 곰방대를 쥔 플로라는 연기를 뻐끔뻐끔 뿜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생각보다 자주 얼굴을 본 사이처럼 친근하다.
하긴 쌍둥이 정도되면 모든 드레스를 여기서 맞춰 입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주위를 서서히 둘러보던 플로라의 시선이 시우를 향한다.
“어머? 네가 그 아이였구나? 최근에 유명한.”
“네, 기억하시네요.”
“난 옷을 지어준 사람은 절대로 까먹지 않거든.”
플로라는 제 머리를 톡톡 두들기며 시우에게 아는 체를 했다.
조금 예상 밖이었던 것은 플로라가 다른 마녀처럼 그다지 뜨거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긴 옷을 만드는 것이 좋아서 위계를 높이는 것마저 포기한 그녀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게헨나로 돌아오자마자 희귀 포켓몬이 된 심정을 만끽해야 했던 시우로선 그 반응이 썩 달가웠다.
“그럼, 여기에 있는 모두에게 한 벌씩 맞춰 주면 되는 거지?”
“네!”
“나, 나도?”
“저희가 먼저 같이 가자고 했는데. 당연히 언니 것두 맞춰야죠!”
“고, 고마워.”
그냥 들러리겠다, 라고 생각하던 샤론은 쌍둥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당연히 제 돈으로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말이다.
정작 샤론은 알비레오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던 만큼 괜히 양심통을 느꼈다.
“그럼 쌍둥이부터 시작해 볼까?”
3.
쌍둥이, 샤론을 거쳐 마지막 차례가 된 시우.
확실히 플로라는 옷짜기에 도가 튼 달인이었다.
세 명이나 옷을 지어주는데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면적이 적은(아마도) 수영복을 만들기에 손이 덜 간다고 해도 여전히 공장장 같은 속도였다.
휘장을 걷고 재단실로 들어선 시우를 보며 플로라는 싱긋 웃었다.
“아주 능력이 좋네? 남작에, 백작가 견습마녀에, 유명 원소 계통 마녀까지 옆구리에 끼고 피크닉이라니.”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세 사람 다 너한테 예뻐 보이게 해달라고 부탁하던데. 특히 쌍둥이는 어찌나 야단인지. 원래도 까불거리지만 저 정도로 심한 건 처음 봤어.”
“두 분이 엄청 활기차긴 하죠.”
조금 뜨끔한 주제였지만 어디까지나 잡담의 일환이었다는 듯 플로라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치수도 따로 재지 않고 공중에서 이리저리 수영복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다시 봐도 신묘한, 거의 외과 수술에 가까울 정도로 정교한 염동이었다.
“치수는 따로 잴 필요가 없겠네. 조금 넉넉하게 해줄까? 아니면 스판처럼 찰싹 달라붙게 해줄까?”
“반바지처럼 가능한가요?”
“좋아, 내가 지어준 옷을 세 벌이나 입는 남자는 네가 처음일 테니까 자랑스러워해.”
“넵,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검은 옷감에 알록달록 새겨지기 시작한 하와이안틱한 문양.
문득 궁금해진 시우가 물었다.
전에 들었던 기억대로라면 그녀는 옷을 만드는 것이 좋아 마법을 발전시키는 것조차 내려놓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래 그녀가 사용하던 마법은 무엇일까?
“혹시 한 가지 여쭈어도 될까요?”
“좋아, 심심하니까.”
“원래 마녀님의 자성 마법이 옷을 짜는 건가요?”
힐끗 시우를 바라보는 플로라.
“왜? 궁금해?”
“아무래도 자성 마법은 저마다 독특한 특색이 있으니까요. 한번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못 가르쳐 줄 것도 없지. 원래부터 실을 짜는 마녀였어. 마력으로 자아낸 실로 의복을 만들었거든.”
“아하….”
“내가 마음먹고 짠 옷은 어지간한 마법은 전부 방어해 낼 수 있어. 그런데 기껏 만든 옷을 걸치고 싸우다가 너덜너덜해지는 것보다는 예쁜 옷을 예쁜 마녀들이 입어주는 게 더 좋더라고. 자, 입어 봐.”
“벌써 끝났어요?”
아주 짧은 대화였던 것 같은데 벌써 근사한 휴양지 수영복이 완성되어 있었다.
살짝 경박한 느낌이 날 줄 알았는데 저런 꽃무늬와 야자수 무늬가 잔뜩 있는데도 굉장히 수수하고 단정해 보인다.
“남자 옷은 별거 없지. 두 마녀들 수영복은 기대할 만할 거야.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거든.”
탈의실에서 입어 보니 딱 좋은 착용감이 고추를 따스하게 감싸준다.
단언컨대 어지간한 속옷보다도 착용감이 좋았다.
“몸 좋네.”
그렇게 수영복 맞추기까지 끝난 시우는 옷을 잘 챙겨 들고 마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