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1.
때는 저녁 식사 이후.
적어도 제머나이 백작과 갈리나의 감시가 존재하는 이상 쌍둥이의 움직임은 제한된다.
잠이 들기 전까지 깨끗한 목욕, 스승님께 문안 인사라는 일정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제머나이 백작이 쌍둥이의 피아노 이중주를 듣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쌍둥이는 꼼짝없이 백작에게 잡혀 연주회실로 향해야만 했다.
미련 넘치는 아련한 눈길로 시우를 바라보며 말이다.
반대로 샤론은 명목상 완연한 손님.
들키지만 않는다면 언제 어딜 나다니던 자유이다.
설령 그곳이 시우의 숙소라 할지라도 말이다.
살금살금 별채로 들어선 샤론.
방금 목욕용품을 챙겨 든 시우가 공동 욕탕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아마 쫓아간다면 또 흐뭇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하아… 이걸 가? 말아?”
하지만 샤론도 일말의 염치라는 것이 있다.
‘이제 다 쌩까고 나 하고 싶은 것도 할 거야!’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계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 백작가의 손님이란 명목으로 근사한 식사를 대접받았는데 마냥 뻔뻔하게 행동하기엔 양심 삼각형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다.
“적당히 거리를 두겠다고는 했는데….”
어제 홈런을 친 건 오랜만에 재회였기 때문이라는 변명거리라도 있지 이틀 연속은 섹스는 좀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같이 있고 싶다구….”
굳이 섹스가 아니라도 좋다.
그냥 시우랑 같이 영화를 보거나 함께 알콩달콩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래, 같이 이야기만 하자, 이야기만.”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린 샤론은 미리 시우의 방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2.
시우와 엘로아가 머무는 제머나이 저택의 별채에는 각방마다 샤워실이 하나씩 딸려있지만 건축상의 한계인지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인지 몸을 담글 수 있는 욕장은 별채 일 층에 단 하나만 있다.
동네 목욕탕보다도 작은 사이즈이지만 예전에 가봤던 레바나 대욕장에 꿀리지 않는 시설.
찻잎이 풀어져 향긋한 냄새가 올라오는 욕조에서 시우는 뜨끈하게 땀을 빼고 있었다.
“끄어어, 좋다아~”
뭉실뭉실 기분 좋은 수증기로 가득한 욕장에 울리는 메아리.
새벽부터 뽈뽈 거리며 돌아다니느라 쌓였던 피로가 개운하게 씻겨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스승님 식사도 안 하셨네.”
내일 바다로 피크닉이 결정된 저녁 식사 시간.
시우는 엘로아를 에스코트하려 찾아갔지만 방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들려오는 대답은 ‘나는 괜찮네. 그대 먼저 가보게나’였고 말이다.
확실히 오늘 아침 시우의 발언으로 어색해지긴 한 모양이다.
근엄하고 잘 벼려진 무인의 분위기를 뿜뿜 뿌리고 다니는 티페레트지만 시우는 잘 알고 있었다.
실은 그녀가 굉장한 부끄럼쟁이라는 것을 말이다.
수줍기 그지없는 스승님 앞에서 ‘스승님과 섹스 정말 최고였습니다.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게요!’라고 말해버렸으니 그 반응이야 알만했다.
역시 그냥 가만히 중간만 갈 걸 그랬나.
어쭙잖게 타카쇼를 따라 하다가 더 망해버린 기분도 없잖아 있다.
“시간이 잘 해결해 주겠지.”
어차피 언젠가는 풀어야 했던 문제라고 생각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내일 해수욕도 함께 모셔가고 차분하게 대화를 하다 보면 원래의 관계로 돌아올 수 있을 거고.
몸도 마음도 편해서인지 이런 낙관적인 생각이 든다.
슬슬 어지러움이 느껴질 때쯤 욕조에서 나와 뽀송한 수건으로 몸을 닦고 방으로 향했다.
역시나 바로 옆인 엘로아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다.
뭐가 되었건 내일은 제대로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시우.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거실 소파에 걸터앉아있는 한 사람이 시우를 반겨 주었다.
“어? 샤론.”
“헤헤, 시우야! 놀러 왔어!”
오늘 식사 자리에서도 은근히 차가운 거리감을 유지하던 샤론이었다.
그때의 모습이 어디 갔는지 오도도 달려와 해맑게 웃는 샤론의 얼굴에는 조금의 그늘도 찾아볼 수 없다.
만약 샤론에게 꼬리가 있었더라면 좌우로 열심히 붕붕 흔들렸을 것이다.
“보고 싶었어!”
“방금 봐 놓고 뭘.”
별안간 팔을 벌린 샤론이 덥석 시우를 끌어안았다.
위험할 정도로 비강을 채우는 좋은 향기.
어제 섹스를 하면서 느낀 것인데 샤론의 위계가 일취월장했기 때문인지 그녀의 체취를 맡는 것만으로 자제가 힘들었다.
“야야, 간지럽잖아.”
품에 포옥 안긴 채 옷에 코를 파묻고 킁킁거리는 샤론.
“하아, 흐음, 하아… 시우 냄새 너무 좋아….”
“처음엔 봤을 때는 길고양이 같던 아가씨가 왜 이렇게 됐나.”
첫인상의 샤론은 굉장히 염세적이고 시니컬해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편의점에서 담배를 살 때마다 괜히 쫄렸다.
아마 저 어둑어둑한 녹발과 살짝 올라간 눈꼬리 탓이겠지.
“지금은 어떤데?”
지금 와서야 뭐…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지.”
샤론은 끌어안던 팔을 떼어 놓고 눈을 똑바로 마주해오며 배시시 웃었다.
예쁜 반달 모양으로 휜 그녀의 눈 사이에서 빛나는 시안 색의 눈동자.
항상 느끼지만 눈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까지 청량해지는 느낌이다.
“시우가 날 강아지로 만들어 준 거네?”
“침대에서 굉장히 강아지 같긴 하지.”
“어쭈? 이젠 아무 때나 섹드립이야?”
“너가 먼저 시작한 거 아니었나?”
“맞아! 킁킁.”
강아지 흉내를 내면서 시우의 이곳저곳에 코를 가져다 대며 킁킁거리는 샤론.
자연스러운 샤론의 애교에 시우도 결국 크게 웃고 말았다.
잠깐의 환영식 이후 거실에 간단한 술상을 차렸다.
게헨나에서 놀거리라고 해봐야 술 마시면서 잡담하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놀러 온 거야?”
“응, 그냥 어제 오랜만에 만난 거에 비해 너무 조금밖에 대화 못한 것 같아서.”
“시간이 없었잖아. 곧장 만찬이기도 했고.”
“맞아,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
게헨나에 온 뒤로 샤론은 근사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다녔다.
제머나이 백작이 품위 유지 차원에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샤론의 드레스 차림을 처음 보았을 때 시우는 굉장히 놀랐다.
샤론이 예쁘긴 해도 현세 옷차림을 입고 어슬렁거릴 때는 그나마 친근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드레스를 입자 샤론의 도도한 외모와 시너지가 생기면서 무슨 여왕님 같은 포스를 풍기는 것이다.
“아무튼 제대로 된 재회를 축하하면서… 건배!”
술잔을 내밀며 다리를 꼬는 샤론.
치맛자락이 올라가며 그녀의 매끈한 허벅지가 드러났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진짜 새하얗긴 하다.
실제로 만져보면 굉장히 쫀득말랑하게 손에 감기기도 하고 말이다.
“…….”
돌핀 팬츠에 나시티 조합과는 달리 가릴 부위는 확실히 가리는 정숙한 옷차림이다.
하지만 샤론의 뇌쇄적인 몸매는 그런 옷가지마저 뚫고 시우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크기와 모양 둘 다 잡을 수 있는 마지노선에 놓인 가슴, 그에 비해 옷자락이 잘록하게 휘감은 허리, 건강미 넘치는 사슴 같은 다리….
미묘한 정적과 시선에 샤론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 무릎을 꼭 붙여 앉았다.
“그, 시우야. 오늘은 나 좀 그런데…. 바로 옆방에 티페레트 공작님도 계시잖아.”
샤론은 난처하다는 듯 말꼬리를 늘이며 말했지만 이미 목소리부터 눈빛까지 촉촉하다.
어서어서 잡아먹어달라는 듯한 유혹이 맴돌고 있었다.
“괜찮아, 오르골도 있으니까.”
못 참겠다.
벌써 빨라진 심장 박동을 느끼며 웃통을 벗고 샤론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이참… 이러면 안 되는데….”
못이기는 척하면서도 매달리는 모습은 여전했다.
샤론을 침대에 눕히고 천천히 옷을 벗겼다.
날 잡아듭쇼 하는 자세로 시우의 손길을 얌전히 기다리는 샤론.
두 사람은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3.
한편 그 시각 엘로아.
엘로아는 방에 틀어박혀 끙끙거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 시우의 쇼킹 발언을 듣고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관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단언한 변태적인 발언.
그 말을 한 의도부터 본심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짐작할 수 없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엘로아를 배려하기 위해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상황.
그의 얼굴을 차마 볼 수조차 없어 오늘 저녁 식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2시간에 걸친 냉수마찰과 평소 시우의 성품을 떠올린 엘로아는 한가지 방향으로 마음을 굳혔다.
시우가 그럴 리가 없다.
물론 섹스에 돌입한 그는 아주 다른 사람 같긴 하지만 그런 변태적인 성벽을 가지고 있진 않을 것이다.
기특한 시우는 엘로아가 민망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해준 것이다!
그렇다면 ‘엿보기를 눈치챈 시점에서 왜 행위를 그만두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점은 남았지만, 시우를 향한 엘로아의 신뢰는 제법 맹목적이었다.
구태여 파고들지 않고 시우를 믿기로 했다.
이제 목욕을 끝내고 돌아올 시우를 만나 오붓한 시간을 보내볼까 궁리하던 엘로아의 귓가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구두 굽 소리.
복도와 엘로아 사이에는 침실 문 하나와 방문 하나, 총 두 개의 벽이 있었지만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발소리라는 것은 마치 지문처럼 체중, 신장, 보폭, 습관 등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니 말이다.
잠시 앞에서 서성이는 듯했던 발소리는 시우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엘로아의 머리 위로 무수한 갈고리 핑이 찍혔다.
에버그린 양이? 시우 방에?
왜???
“아닐 것이야….”
아무래도 일이 겹친지라 무수한 의혹이 떠오른다.
그러나 아닐 것이다.
원래 시우와 샤론은 굉장히 가까운 관계였고 서로 방에 놀러 가는 것은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일이겠지.
-뚜벅 뚜벅
곧이어 목욕을 끝낸 시우의 발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의 말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온다.
‘시우가 날 강아지로 만들어 준 거네?’
‘침대에서 굉장히 강아지 같긴 하지.’
‘어쭈? 이젠 아무 때나 섹드립이야?’
‘너가 먼저 시작한 거 아니었나?’
엘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침실을 나서 거실로 나왔다.
더 소리가 잘 들리는 곳으로 향하기로 한 것이다.
솔직하게 고하자면 어제 엘로아를 고뇌에 빠뜨린 것은 비단 시우와 샤론의 성교 장면을 보고 젖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았다.
그가 페리윙클과 밀회를 나눴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처럼.
샤론과의 성교를 훔쳐보고 난 뒤에는 은근한 불편함도 공존하고 있었다.
문득 떠올라 버린 것이다.
시우와 관계를 가진 사람이 페리윙클만이 아님을.
애초에 그의 옆에는 한없이 연인에 가까운 샤론 에버그림이 있음을.
이마저도 제자에 대한 독점욕이 강하기 때문이라 합리화하던 엘로아지만 그 이상으로 호기심도 한껏 부풀어있었다.
두 사람이 단둘이 남았을 때.
어떤 대화를 주고받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귀를 기울이던 엘로아.
내용 자체는 평이했다.
일상의 이야기였다.
제머나이 저택에 머물면 왕족이 된 기분이다.
쌍둥이들 수업은 잘돼 가냐.
친구가 레노먼드 타운에 가게를 차렸다더라.
이런 자질구레한 말들이 오가는 걸 엿들은 엘로아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내심 안심했다.
갑자기 야리꾸리하게 변한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