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1.
시우가 게헨나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타운은 말할 것도 없이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위치한 ‘레노먼드 타운’이다.
귀족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거나 그만큼 많은 돈을 지닌 마녀들이 모여 사는 게헨나의 두 번째 부촌.
아르스 마그나 타운이 강남 서초라면 레노먼드 타운은 용산 강동 쯤 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로타운까지 일반 시민과 마녀가 적절히 섞여 살아간다면 레노먼드 타운부터는 마녀의 비율이 2배 이상으로 치솟는다.
시우가 공간이동을 전개해 도착한 곳은 십자(十字)형태로 뻗어있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북쪽 교사였다.
베르사유 궁전, 그중에서도 거울의 방을 연상시키는 장엄함.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촛대 위에 일렁이는 불길에 맞춰 황금이 녹아내린 듯한 화려함을 자랑한다.
이런 아름다움이라면 1000년이 지나도 불변할 것 같은 맹목적인 발상에 확신을 더하는 장소였다.
“여긴 여전하네….”
회랑에 발길을 들이는 순간 파노라마처럼 고군분투했던 세월이 떠오른다.
반쯤은 PTSD에 가까울 줄 알았는데.
어쩐지 그립고 가슴이 간질간질한, 살짝 애매한 좆같음으로 그쳤다.
“뭐 그럼….”
타카쇼도 찾을 겸 주변이나 슬렁슬렁 둘러볼까?
지금 시간이면 복도 청소를 하거나 느지막이 다른 교수의 침실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시우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옛 직장을 기웃거렸다.
이 정도의 휘황찬란함이라면 마땅히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와야 할 것 같은데.
새벽의 적막이 내려앉은 교사는 기묘한 부조화가 느껴질 정도로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위화감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느긋이 걸어다니는 거고, 그때는 열심히 촛대의 먼지를 닦으며 느꼈어야 했다는 것.
작업 이후 찬물로 몸을 씻던 우물 터.
비가 오는 날이면 허구한 날 열심히 파 내려갔던 배수로.
시우의 본래 근무지이자 몰래 마법 연구를 했던 도서관까지 슬슬 훑어보았지만 타카쇼는 보이지 않았다.
1시간은 충분히 둘러본 것 같은데.
“얜 또 어디 갔어?”
이렇게 일일이 찾다가는 계속 엇갈릴 수도 있겠다 싶었던 시우는 새로운 목적지로 향했다.
교사 남동쪽에 위치한 행정실이다.
그 이름답게 자질구레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똑똑
시우가 일하던 도서관보다 낡은 외관의 행정실.
노크하고 들어서자 이른 아침부터 서류를 들쑤시는 여자가 보였다.
안면이 있는 여자였다.
딱히 개인적인 인연은 없고 업무 지시를 직접 하달받은 적이 있을 뿐인 관계지만.
“안녕하세요.”
“어?”
안경을 쓴 채 흐리멍덩한 눈으로 펜을 놀리던 여자는 시우를 보고 잠이 싹 달아난 표정을 지었다.
“저, 그, 그… 그? 신시우 관리인?”
“네, 지금은 관리인은 아니지만요.”
“안녕하십니까!”
군기 바싹 든 신병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행정실 여직원.
행정실에서 일하는 직원은 마녀가 아닌 일반 게헨나 시민이다.
시우는 공식적인 ‘마녀’가 되었으니 당연히 신분상 여직원보다 높은 위치이다.
하지만.
“…우, 우….”
시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직원을 보았다.
옛 직장이었던 만큼 신시우 관리인이 마녀가 되었다는 소식은 어느 곳보다 빠르게 퍼졌으리라.
근데 그렇다고 저렇게 무서워할 이유가 되나?
“죄, 죄송합니다… 그, 그때 숙소 건은 정말 죄송합니다….”
아.
그런 이유.
시우를 멀쩡한 숙소에서 내쫓고 축사에서 살게 된 것은 어쨌거나 행정실의 간섭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신분 상승한 노예 출신 관리인이 앙심을 품고 복수라도 하려고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괜찮으니 몇 가지 좀 여쭐게요.”
“네…넷!”
“저 일단…. 좀 편히 앉으실래요?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하려고 온 건 아니거든요.”
“죄송합니다!”
일단 구구절절한 설득을 통해 여직원을 달랬다.
시민들에게 마녀 이미지가 얼마나 씹창이 나 있으면 이렇게까지 무서워하겠나 싶어 괜히 입맛이 썼다.
한 10분간의 다독임 끝에 간신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된 두 사람.
몇 번이나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직원이 정성껏 차린 찻상 앞에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하게 됐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전혀 신경 안 쓰고 있어요. 그나저나 혹시 저랑 여기서 일했던 미마야 타카쇼 아시죠?”
“타, 타카쇼 씨요?”
타카쇼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여직원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생긴다.
얼씨구.
여기까지 마수를 뻗쳤구먼.
친구지만 참 대단한 놈이다.
“네, 그 친구를 좀 만나러 왔는데. 어디 짱박혀 있는지 보이지 않네요.”
“타카쇼 씨는 몇 달 전에 6년을 꽉 채우셔서….”
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시우처럼 타카쇼는 게헨나 시청소속의 공노예.
6년을 채웠으면 다른 배속지로 옮겨지는 것이다.
“혹시 어디로 배속되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배속되지 않으셨어요.”
“네?”
시우의 얼굴이 딱딱히 굳는다.
배속되지 않았다?
그렇게 방탕하게 살더니 드디어 선을 넘어버렸나?
견습마녀라도 건드려서 죽었나?
오만가지 생각이 불길하게 떠오른다.
여긴 다름 아닌 마녀의 도시.
타카쇼가 아무리 요령이 좋다고 해도 노예에 불과하니 말이다.
“아도나이 백작께서 전속 노예로 사 가셨던 걸로 알아요.”
“네?”
2.
이렇게 저렇게 더 캐물은 결과.
타카쇼가 현재 일하고 있는 곳의 주소까지 받아낼 수 있었다.
“깜짝 놀랐네.”
별안간 배속 못 받았다고 해서 덜컥 죽어버리거나 험한 꼴 당한 줄 알았다.
그런데 타카쇼는 사막에 내놔도 선인장들 꼬시면서 잘 살 인물이니 생각해보면 괜한 걱정이다.
아무튼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같은 레노먼드 타운이었으니까.
보더 타운에 ‘접선소’, 타로 타운에 ‘광장 시장’이 게헨나의 물류 유통을 담당한다면 레노먼드 타운에는 아케이드 상점가 ‘말쿠트 갤러리’가 있다.
보더 타운은 소매 고객을 거의 취급하지 않고, 레노먼드 타운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아르스 마그나 타운에는 대규모 상점가가 달리 없기에 이 말쿠트 갤러리에서 가장 율동적인 물류 이동이 일어난다.
마차 4대가 경주를 할 수 있을 법한 널따란 길을 가운데 두고 주르륵 늘어선 상가 사이를 아치형 유리천장으로 덮어 실내 공간처럼 연출한 곳이다.
여담이지만 최근에도 찾아볼 수 있는 이런 아케이드 형태의 상점은 19세기 초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게헨나의 말쿠트 갤러리는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니 꽤 유행을 선도한 셈이다.
단순히 직선거리로만 400M가 넘어가는 규모에 걸맞게 아주 다양한 품목의 물품을 판매했다.
각종 마도구, 아티펙트, 연금 재료 및 시약처럼 마법과 관련된 물품.
보석과 세공품, 모피, 주류, 물담배, 허브, 양탄자, 예술품 각종 가구나 집기 등의 사치품.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용실, 극장, 부티크, 서점, 바 등의 다양한 서비스도 제공한다.
물론 시우가 노예 시절엔 여기선 손수건 하나만 사도 전 재산을 탕진했어야 했기에 막상 안까지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어제 새로 깐 것처럼 반들거리는 바닥을 밟아선 채 망연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일한다고?”
아직 7시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주변의 가게들은 문을 열지 않고 있다.
몇몇 점포에서 막 개점을 준비하는 일반 시민들만 보일 뿐 마녀도 없었고 말이다.
걸어 다니기만 해도 유아등처럼 마녀를 끌고 다니는 시우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흐음….”
시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타카쇼가 고용되었다는 가게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여기 맞아?”
시우가 도착한 곳은 갤러리의 맨 끝.
일부러 찾아오기도 힘들 것처럼 구석진 곳에 박혀있는 간판 없는 건물이었다.
물론 외관이야 계단부터 깔린 레드카펫도 깔끔하다.
근데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고 해도 이런 건물에서 노예가 할 일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우선 걸어가서 문고리를 잡고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쿵쿵!
“…….”
제법 크게 울리는 소리.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다시 쿵쿵 두드리자 그제야 문이 열린다.
“누구십… 뉘쇼?”
시우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금발벽안의 남자였다.
덥수룩한 머리와 정반대로 대충 걸쳐 입은 듯한 옷가지.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들라면 꽤 키가 크고 잘생겼다는 것이다.
사근사근한 억지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었던 남자는 상대가 남자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단숨에 귀찮아 진 듯한 표정이 되었다.
“사람을 좀 만나러 왔는데요.”
“사람?”
“네, 미마야 타카쇼라고, 안에 있나요?”
시우의 입에서 타카쇼라는 말이 나오자 남자의 표정이 또 한 번 일변했다.
귀찮음은 싹 사라지고 똘망똘망해진 눈빛.
어딘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묻는다.
“타카쇼 형님 친우분 되십니까?”
“네.”
그 순간 재빨리 시우를 훑어보는 남자.
일견 고급스러워 보이는 안대와 현세의 옷차림 게다가 손에 낀 반지까지.
일반적인 노예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복장이다.
“아, 일단 들어오셔서 기다리십쇼. 야! 리암! 손님 오셨다. 혹시, 성함이…?”
“신시우요.”
“타카쇼 형님한테 신시우 님이 찾아 오셨다고 전해라!”
씩씩한 호출을 곁들이며 안으로 들어선 시우.
정문을 거쳐 두터운 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자 근사한 살롱이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 살롱인지는 모르겠고 그 구조가 굉장히 흡사했다.
이곳저곳에 흩어진 의자와 테이블,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채 쌓여있는 나무 상자들이 흠이긴 했지만, 내부 자체는 굉장히 세련된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다.
주변에 걸린 벽화나 조각상 포켓볼용 당구대가 한두 푼 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말이다.
굉장히 클래식 바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가운데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아침인데도 실내가 굉장히 어두침침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쇼. 곧 형님이 오실 겁니다.”
“술집인가요?”
“네, 비슷하죠.”
시우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무렵 터벅터벅 발소리와 함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시우!”
예전보다 훨씬 낮게 가라앉힌 목소리긴 했지만 시우는 금방 그 주인을 알아냈다.
하지만 뒤를 돌아봤을 때 있는 건 타카쇼가 아니었다.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반갑다!”
이탈리안 수트를 멋지게 빼입고 하드 포마드로 머리를 넘긴, 그에 걸맞게 깔끔하게 턱수염을 정돈한, 삐까번쩍한 필릭 파텍까지 차고 있는 일본인이었다.
스스럼없이 악수를 건네는 타카쇼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건치는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도 환히 빛났다.
“너, 너 진짜 타카쇼 맞냐?”
“그럼!”
시우는 얼떨떨하게 악수를 하고도 어정쩡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시우의 반응을 예상했기라도 하듯 타카쇼는 대담한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건넸다.
“이번에 새롭게 오픈한 게헨나 유일의 호스트바, ‘로즈 글래스’의 사장 겸 마담. 미마야 타카쇼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