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1.
날이 밝았다.
기지개를 쭉 펴며 푹신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근사한 식사를 대접받고 별채에 따로 묵게 되었다.
별장보다는 저택 본관에 가까운 대신 조금 규모가 작은 2층짜리 석조 건물이었다.
물론 시설이나 관리 상태는 최고였으니 수면의 질은 말할 것도 없다.
창밖을 보니 이제 막 동이 트고 있어 어둑했다.
이른 새벽녘에 단정하게 정돈된 정원의 잔디 위로 밤이슬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6시네.”
요새 꽤 자주 늦잠을 자곤 했는데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아마도 게헨나에서 5년 동안 새벽같이 일어나는 노예 생활을 했기 때문이 아닌지, 그래서 생체시계가 자동으로 눈을 뜨게 해준 것은 아닌지.
반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후우….”
테라스로 나와 모닝 담배.
선선한 늦가을의 바람과 상쾌한 공기가 멍해졌던 머리를 일깨워 준다.
자연스럽게 배치되어있는 재떨이에 재를 털며 오늘 일과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게헨나에서 할 일은 다음과 같았다.
‘붉은가지’를 완벽하게 통제하는데 응용할 연구자료를 찾는 것.
현재 시우가 할 수 있는 통제는 왜곡장이 무분별하게 방사되지 않게 방지하는 것까지다.
그마저도 완벽하진 않아서 리본으로 돌돌 포장한 가지를 들고 공간이동식을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럭저럭 ‘문’을 통과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게헨나의 정식출입을 담당하는 ‘문’은 케테르 공작이 직접 만들었기에 시우의 조잡한 공간이동식보다 훨씬 안정성이 높았으니 말이다.
또 타카쇼 보기.
별건 없고 그리운 옛 친구 만나기다.
다음은 샤론의 상태 확인하기.
이건 어제 끝냈고.
다음은 아멜리아 만나서 대화하기인데….
“흐음….”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다.
시우에게 아멜리아는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 곳이 아릿해지는 전 여친 같은 상대였다.
그것도 별로 좋지 못하게 헤어진, 마냥 미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좋은 기억만 떠올릴 수도 없는 상대.
기억을 되찾고 아멜리아와의 관계가 완전히 결렬된 이후 시우는 현세로 나오기 전 쪽지를 남겼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로 썼던 쪽지이기도 하고 시간도 제법 지났기에 뚜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너무 심하게 말해서 미안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 잘못이 있으니 누구 하나의 잘못으로 치기엔 어려울 것 같다.
나중에 감정이 정리되면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로부터의 소식은 그때 이후로 뚝 끊겼다.
부교수직도 그만뒀다고 하고 마땅히 연락이 오거나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심 완전히 관계가 끝났겠구나 씁쓸해하고 있던 터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부채감을 느끼거나 죄책감을 느끼냐 하면 아니다.
말년에 아멜리아의 태도가 바뀌기 전까지 시우에게 아멜리아는 극악의 상사 그 자체였으니까.
그래도 자꾸만 떠오른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시우에게 정말 잘해주었던 그녀의 모습과.
마지막 시우의 분노 어린 원망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모습이.
대화 정도는 다시 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자존심 강한, 서툴고 어설픈 아멜리아가 솔직하게 만나러 오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흠, 타카쇼부터 볼까?”
무거운 이벤트는 조금 뒤로 미루자.
당장 후딱후딱 처리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시우가 게헨나에 방문했다고 해도 쌍둥이의 빡빡한 스케줄에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앞으로 하루 남은 휴일까지 대치동 수험생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제머나이 백작도 엄한 학부모 같은 느낌이 있어서 말이지.
그렇다면 오늘 하루 비는 일정을 타카쇼를 만나는 데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
가볍게 씻고 나설 채비를 한 뒤.
스승님이 머무는 방문을 두들겼다.
엘로아가 따로 제머나이 백작에게 언질을 준 것인지 공교롭게도 같은 별채 바로 옆방에서 머물게 되었다.
과보호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는 입장에선 이해가 간다.
“주무시나?”
별 용건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습관이 된 문안 인사니까.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등을 돌리려던 때.
“…들어오게나.”
굉장히 피곤해하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에서 막 몸을 일으킨 엘로아가 보였다.
목소리에서 느꼈다시피 눈가가 피로에 찌든 듯하다.
그렇다 해도 마녀는 마녀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거무죽죽한 눈가에도 가려지지 않는 특유의 피폐한 듯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시우는 엘로아가 파자마를 정돈하는 동안 물을 한 컵 따라주었다.
“괜찮으세요?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괜찮다네.”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목소리다.
평소보다 힘이 없는 것도 그렇고.
“외출할 채비로군. 어디 가는가?”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친구 만나러요. 제가 여기 있을 때 잘 도와줬던 친구가 있거든요. 말씀드렸죠?”
“타카쇼?”
“네, 그 친구.”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 중인데 시선이 마주치자 엘로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이 정도까지 반응이 겹치자 대충 짐작이 왔다.
엊그제 여관방에서 들렸던 소리 + 어제 식사 중 백작의 질문이 스승님께 몹쓸 기억을 떠올리게 한 모양이다.
역시 엄청 신경 쓰고 계셨구나 싶어 시우도 괜히 머쓱해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모양이 이상해질 것 같고…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적당히 도망가려던 때.
“…시우 잠시만 기다리게.”
방을 나서려던 시우를 붙잡는 엘로아의 목소리.
막상 뒤를 돌아보자 또 시선을 회피한 엘로아는 한참의 정적 이후에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네?”
“그대에게, 사과하고… 싶은 게 있다네.”
그제야 시우는 깨달을 수 있었다.
엘로아는 그냥 그때의 기억을 민망해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마력 보충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제 섹스를 했던 당일.
엘로아는 시우에게 ‘훗날 반드시 사과하겠다’라는 어조로 말을 하며 관계를 종용했다.
대뜸 정수리를 코앞에 들이밀어 체취를 맡게 하며 말이다.
고지식한 엘로아의 입장에선 필요에 의해서라 한들 억지로 시우를 유혹한 셈이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었다.
또 엘로아 같은 미인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 좋았으면 좋았지 힘겨운 일이라고는 추호도 생각 않았다.
그러나 원리원칙주의자인 스승님이 보기엔 그때 그 일을 강제추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 이 일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던 엘로아가 별안간 사과해왔다.
지금까지 너무 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었지만 비로소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아무튼 뒤늦게라도 사과가 들어온다면 당연히 받아주는 것이 맞겠지.
솔직히 별로 사과받을 입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괜찮습니다.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뭐?”
“제가 몰랐을까요?”
시우의 말에 엘로아는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예쁜 눈동자가 이 방에 들어서 처음으로 시우를 똑바로 바라본다.
바람이 불면 살랑살랑 부풀어 오를 것 같은 결이 가는 분홍머리.
그 가운데서 예쁜 마젠타 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
엘로아는 말문이 막힌 듯이 한참을 고민하며 침묵했다.
거의 1분 정도 지나서 슬슬 어색해지려던 때.
엘로아는 마지막으로 진위를 확인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어제 일… 말인가?”
어제 일?
무슨 말이지 싶어 고민하던 시우는 퍼득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식사 중 시우의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떠난 엘로아.
시우의 활약상을 데네브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않고 중간에 나와버렸다.
그 덕에 식사자리는 상당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사실 시우는 엘로아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서 어제 일을 꺼내는 것 역시 빗물터널에서의 사제 섹스 때문일테니, 맥락상 사과하고 싶다는 얘기의 연장일 것이다.
시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까지요.”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는겐가?”
“그럼요. 당연하죠.”
갑자기 엘로아의 하얀 얼굴이 빨갛게 변하기 시작한다.
복숭아색을 넘어서 잘 읶은 딸기색까지 갔다.
면목이 없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는 엘로아.
“미안하네. 그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정말 면목이 없네….”
그렇게 사과하는 엘로아의 목소리는 보통이 아니었다.
거의 대역죄인이 된 것처럼.
시우가 당장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어줄 것처럼 송구하다는 모습이다.
좀 얼떨떨했다.
“왜… 알고 있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겐가?”
고작 제때 사과 못 하고, 식사 중에 자리를 박차고 분위기를 망친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문제로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있었구나 싶어 가엾기도 하고, 어쩐지 귀엽기도 하다.
참 스승님 답다.
“음,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도 즐거웠으니까요. 좋은 경험이었고요.”
“즐거…워…?”
별생각 없었는데 말하고 나니 모양새가 좀 이상하다.
번역하자면 ‘아아, 스승님과의 마력 충전 섹스. 최고였습니다’가 되지 않는가?
하지만 엘로아의 부담감을 덜어줄 수 있다면 좀 부끄러운 게 대수랴.
이쪽이 좀 망가지더라도 엘로아가 저렇게 미안해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기에 솔직한 심정을 입에 담았다.
“네,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제가 좀 바빠서요.”
하지만 이대로 계속 얼굴을 보고 있는 건 아무래도 남사스럽다.
시우는 마지막 인사를 끝내고 방을 나섰다.
“별것도 아닌데. 참….”
분위기를 타서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겠다는 말까지 하고 말았지만 퍽 민망하다.
어차피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결국 시간이 약이라는 거다.
아무튼 슬슬 타카쇼를 만나러 가야겠다.
5년의 노예 생활 동안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타카쇼다.
이런저런 편의를 대신 봐주었을 뿐 아니라 유일한 친구였으니 은혜 제대로 갚은 까치가 되기 위해 두둑한 준비를 해왔다.
성인 여성이 들어갈만한 커다란 여행백 두 개에 현세의 물품을 한가득 채워 온 것이다.
참고로 게헨나에서 현세의 물품은 굉장히 값비싸게 거래된다.
보더 타운의 ‘문’은 공짜로 왕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박에 물품을 실어오고 반입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자원이 요구되기에 자연스럽게 게헨나로 들어오는 물품은 마녀를 위한 사치품이 대부분이다.
같은 선적 공간에 페르시아 실크카펫을 들여오는 것이 감자 칩 100상자를 들여오는 것보다 훨씬 남는 장사인 건 두 말할 것 없다.
따라서 콜라라던가 컵라면 같은 ‘코스트에 비해 너무 싼 값에 팔리는 물품’은 들어오지도 않는 품귀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시우가 준비한 것은 그런 자질구레한 물품이고.
“좋아, 잘 챙겨 왔고.”
마지막으로 물품을 정리한 시우는 트리니티 아카데미로 공간이동식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2.
굳게 닫힌 방문.
엘로아는 조금 전 시우가 나간 문을 보며 조용히 침묵했다.
아무말도 내뱉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은 이미 폭풍과도 같은 혼란으로 그윽하다.
엘로아는 어제 밤늦게까지 죄책감과 자기혐오 속에서 뒤척였다.
샤론과 그의 성교 장면을 몰래 엿봤던 일과 그러면서 속옷을 적시던 일이 종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뒤의 일이라면 혼자만의 죄악으로 간직해도 좋다.
그러나 적어도 앞엣것은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
엘로아의 의사가 확실히 관여한 관음 행위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히고 사죄해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여느 때처럼 문안인사를 들어 온 시우.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고 고민하던 엘로아는 방을 나서려던 시우를 붙잡고 사과했다.
어려운 고민 끝에 들려온 답은 엘로아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괜찮습니다.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시우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제 일… 말인가?’
혹시 다른 것과 착각한 것은 아닌지, 헷갈린 것은 아닌지를 묻기 위해 어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맞는지 콕 짚어 확인했다.
이에 시우는 답했다.
‘네, 그것까지요.’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는겐가?’
‘그럼요. 당연하죠.’
그렇다고, 이미 눈치채고 있었노라고.
모든 것을 알아채고 있었음에도 엘로아를 질책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 마냥 감사함을 느끼기에는 그 뒤로 이어진 시우의 말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왜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냐고 묻는 엘로아에게 시우는 답했다.
조금 머쓱하면서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
‘음,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도 즐거웠으니까요. 좋은 경험이었고요.’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즐거웠다?
좋은 경험이었다?
다시 말해 엘로아가 엿보는 상태에서 샤론과 성행위를 나누는 것이?
심지어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겠다고?
여기부터는 엘로아의 상식 레일을 아득히 이탈한 내용이었다.
남녀 관계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도 그런 약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우의 대답이 엘로아의 궁핍한 지식에 비쳐봐도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혹시 그런 성벽을 지닌 걸까?
아니면 엘로아가 지나치게 민망해하지 않도록 스스로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일까?
상냥한 시우라면 후자일 쪽이 훨씬 확률이 높겠지만….
이것도 저것도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시우의 말과 행동에 엘로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찬물 샤워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