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98화 (298/917)

#298

1.

제머나이 저택 본관의 식당.

당구대 8개를 이어붙여야 비슷한 크기가 될 것 같은 테이블 위에는 정원에서 방금 꺾어 올린 만든 꽃꽂이가 놓여있다.

우선 입구에서 가장 먼 상석에 앉은 알비레오와 데네브, 이후 호스트와 가장 가까운 다음 상석에 시우와 엘로아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고, 엘로아의 옆에는 쌍둥이가.

시우의 옆에는 샤론이 앉아 있다.

만찬에 참가한 인원은 이렇게 7명이 전부였는데도 사용인들은 각종 요리를 쉴 새 없이 서빙하며 그 넓던 테이블을 기어이 음식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

눈 앞에 펼쳐진 산해진미.

새 요리, 새끼 돼지를 통째로 구운 요리, 게헨나에서 구하기 힘든 고급 해산물 요리가 한가득하다.

거기에 무슨 식기가 이렇게 많은지 앞접시 좌우로 놓인 포크와 나이프만 10개.

예쁜 굴곡을 자랑하는 유리잔도 5개나 놓여있다.

접시 앞에 따로 놓인 스푼과 나이프는 무슨 용도인지도 잘 모르겠다.

뭔가 별세계라고 해야 하나?

해리포터에서나 봤던 장면이 버전 업된 채로 눈앞에 있으니 괜히 긴장되었다.

음식을 서빙한 사용인은 돌아가지 않고 경호원처럼 각 손님의 뒤에 서서 대기했다.

아마 테이블이 더럽게 넓으니 구석진 곳의 요리를 가져와 주거나 하는 것 같다.

시우의 등 뒤에 있던 메이드(로 보이는 여자)가 어리버리 까는 시우의 잔에 포도주를 채워주며 슬며시 속삭였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어안이 벙벙해 하는 샤론과 시우와는 다르게 다들 태연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꽤 소시민적이라 생각했던 엘로아마저 말이다.

게헨나에서도 상류사회에 위치한 이들에게는 당연한 식탁이라는 거겠지.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티페레트 공작님.”

“저택에 방문한 걸 환영해요. 신시우 군.”

알비레오와 데네브는 방긋 웃으면서 시우와 엘로아에게 환대를 표했다.

“…나야말로 고맙네.”

“아, 저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근사한 식탁은 처음이네요.”

“두 분 다 저희 가문의 중요한 손님이니까요.”

“후식도 따로 준비되어 있으니 편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호스트인 두 백작이 고상한 손길로 냅킨을 무릎에 펼치면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근데 무엇부터 먹어야 하는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감이 안 온다.

시우는 백작이 가장 가장자리의 포크와 나이프를 먼저 사용하는 것을 보며 따라 집었다.

들새 요리가 눈에 딱 들어와 먹으려고 팔을 뻗자 뒤에 서 있던 메이드가 자연스럽게 그 요리를 시우의 앞접시에 덜어 주었다.

뭔가 편하면서도 불편한 이 기분.

굉장히 부담스럽다.

“시우 군, 서울에서 활약상은 들었어요. 다친 곳은 없나요? 요즘 게헨나가 시우 군 이야기로 시끌벅적해요. 어찌나 소문이 빠른지 저택의 담벼락 너머까지 들려온답니다.”

먼저 조금이나마 더 접점이 많은 데네브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주었다.

품위 넘치는 미소와 말투는 기본이다.

“큰일이긴 했는데. 옆에 공작님이 계셨는걸요. 제가 뭐 한 게 있겠습니까.”

“어머, 듣기로는 그래도 맹활약을 떨치셨다고 하던데.”

“아닙니다. 정말 한술 거드는 정도였어요.”

“시우 군이야 평소에도 겸손하니까. 이건 공작님 말씀도 들어봐야겠는걸요?”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엘로아에게로 옮겨지는 시선들.

“…….”

하지만 엘로아는 식사가 시작된 이후로 한마디도 없이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보지도 않고 썰고는 있는데 입으로 옮겨가지를 않는다.

고기를 잘게 썬 뒤에는 가니쉬인 아스파라거스를 조각내고 있었다.

“저기… 공작님…?”

대화의 흐름이 뚝 끊긴 데네브는 의아한 표정으로 엘로아를 불렀다.

하지만 엘로아는 여전히 아스파라거스를 산산조각 내고 있을 뿐이다.

“스승님.”

“헛…!”

시우가 엘로아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최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초점이 돌아오는 엘로아.

의아하다는 듯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보고 어리둥절하더니 시우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자마자 시선을 피하며 뻣뻣한 말투로 데네브를 바라보는 엘로아.

“뭐, 뭐라 하였나?”

“시우 군이 현세에서 활약했던 내용에 관하여 묻고 있었답니다.”

엘로아는 엘로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샤론과 시우의 섹스를 엿봤던 일.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볼썽사납게 몸이 달아올랐던 일로 반쯤 패닉에 놓여있던 엘로아.

그녀의 머리는 데네브의 말을 듣자마자 묘한 루트로 사고를 전개해 나갔다.

시우=> 현세=> 활약.

빗물 터널=> 마력 보충=> 사제 섹스.

절로 이어진 마인드 맵핑에 해롱해롱하던 머리가 더욱 어지러워진 엘로아.

그 잡념을 끊어내기라도 하려는 양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네!”

“네? 아…아, 그러시군요.”

“데네브 실례야. 공작께선 시우 군의 활약상을 홀로 알고 싶어 하시는 모양이네요.”

“이런 제가 그런 것도 모르고….”

격렬한 엘로아의 반응에 당황하는 일동.

알비레오가 자연스럽게 웃음으로 상황을 넘기려 했으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엘로아는 아직도 경악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속옷을 축축이 적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에서 후다닥 별장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그 후유는 아직까지 엘로아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시우의 눈을 빌어 봤을 때보다 충격이 컸다.

페리윙클과의 성교 장면을 엿보던 것은 자의가 아닌 사고였다.

민망하고 남사스러워도, 불의의 사고였단 한마디로 합리화가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

시우와 샤론이 몸을 섞는 모습을 한참이나 관음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로아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합리화했지만 얄팍한 변명을 깨뜨린 물적 증거가 나와버렸다.

속옷을 일부 적실 정도로 묻어나온 애액 말이다.

비록 임시라지만 스승을 자처한 주제에 시우를 남성으로 인식했다.

필요에 의해 그에게 안겼다며 합리화하는 주제에 말도 없이 성교 장면을 엿본 것도 모자라 샤론의 위치에 자신을 대응하며 성적 흥분을 느꼈다.

그렇게 깨달은 진실은 엘로아를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다.

부끄럽고 죄스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몸이 불편해 먼저 일어나겠네. 미안하네 모처럼 초대해 주었거늘….”

이렇게 정성껏 초대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은 결례임을 알면서도 벌떡 일어난 엘로아.

놀란 백작의 시선을 뒤로하고는 식당에서 퇴장했다.

“시우 군, 혹시 제가 공작님께 실수한 것 있나요?”

티페레트 공작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껌뻑이는 데네브.

모녀는 닮는다더니 그 표정이 쌍둥이랑 아주 판박이었다.

시우는 어렴풋이 엘로아가 급발진한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기에 스승님을 대신해 설명해주었다.

“그 당시 공작님이 무리를 많이 하셔서요. 요새 몸이 통 편찮으십니다. 식사도 자주 거르시고요.”

“아하,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괜찮은 치유사를 소개시켜드려야겠어요.”

아무튼 가벼운 해프닝 이후에 계속되는 식사.

데네브와 알비레오는 중간마다 짤막한 질문을 던질 뿐이라 맘 편하게 음식들을 즐길 수 있었다.

웬일로 쌍둥이도 잠잠하고.

“샤론, 이것도 먹어 봐. 이거 진짜 맛있네.”

“너 많이 먹어. 난 이걸로 충분해.”

“그러지 말고.”

“어휴, 됐다니까.”

이번엔 샤론이 상당히 쌀쌀맞은 말투로 답한다.

막 차갑거나 냉기가 느껴지는 정도는 아니어도 조금 전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던 때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샤론도 샤론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

샤론은 알비레오 백작과의 계약을 어겼다.

세이프냐 아웃이냐 비디오 판독을 요청할 것도 없이 만난 지 3분 만에 그대로 홈런을 쳐 버린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샤론의 고용주는 백작.

앞으로 ‘적당히 거리를 둬야 한다’라는 지침도 지켜나갈 생각이다.

명확한 기준은 없는 만큼 ‘매일매일 섹스만 안 하면 되잖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샤론은 조금 뻔뻔하게 나가기로 결심을 끝낸 상태다.

나중에 한소리하면 그때 가서 제대로 규정을 정하지 뭐.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시우와 꽁냥거리는 모습을 보이기에는 살짝 불편한 것이다.

한편 그런 뒷사정을 모르는 시우로선 엘로아의 기행 이상으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머쓱하게 쌍둥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딜 님, 오데트 님. 이거 먹어 보세요. 맛있어요.”

“괜찮아요. 조수님.”

“저희는 많이 먹으니까 조수님이 더 많이 드셔요.”

하지만 믿었던 쌍둥이마저 묘하게 이상하다.

평소라면 아니, 오늘 첫 만남 때 반겨주었던 모습만 생각해도.

‘이 요리는 제머나이의 전속 셰프 ㅇㅇ님이 만들어주신 ㅇㅇ요리랍니다!’

‘물론 현세의 음식도 맛있었지만! 조수님이 홀딱 반하실만하죠! 무려 ㅇㅇ재료를 ㅇㅇ해서 ㅇㅇ한 요리니까요!’

같은 반응이 나와야 정상인데.

점잖게 사양하고는 저들끼리 속닥속닥한다.

하지만 쌍둥이도 쌍둥이대로 사정이 있었다.

“언니 세어봤어?”

“응, 우리랑 눈 4번 마주칠 동안 샤론 언니랑은 10번이나 마주쳤어. 그것도 우린 바로 앞자린데…!”

“샤론 언니가 조수님이랑 안 친한 척하는 거 봐. 저게 다 기만전술이라는 거 아니야.”

“화나네.”

오늘 샤론과 시우의 질펀한 섹스를 엿보게 된 이후.

작전 타임을 가진 쌍둥이.

회의에서 논의될 중점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샤론은 할 수 없지만 쌍둥이만 할 수 있는 필살기가 무엇인가?

이미 연인 상태에 가까운 둘의 틈에 끼어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저녁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충분한 논의를 할 수 없었고 급하게 만찬에 초대되었다.

결국 졸속으로 만찬 자리에서 샤론이 시우를 어떻게 대하는지, 시우는 샤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관찰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스승님이 엿들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피상적인 대화에만 그쳤지만 나름대로 머리를 맞대고 궁리 중인 쌍둥이였다.

그리하여 대화 상대가 백작밖에 남지 않은 시우.

“그나저나 시우 군. 게헨나에서는 얼마나 머무를 예정인가요?”

“글쎄요? 한 일주일 정도는 있을 것 같습니다.”

“흠, 생각보다 오래 머무시지 않으시네요? 원하신다면 별장을 따로 내어드릴 수도 있는데….”

“저희 가문에서 손님으로 머물 생각은 없으시나요? 예우를 갖춰 귀빈으로 모실게요.”

제머나이 백작들로선 시우를 게헨나에 남겨두는 편이 유리하다.

백작은 시우가 쌍둥이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백작가에서 머물게 된다면 쌍둥이와의 접점이 많아지고, 제머나이라는 이름에서 떨어지는 달콤한 과실을 맛본다면 아마 다른 마녀가 눈에 차지 않게 될 것이라는 꿍꿍이였다.

“그렇기에는 너무 누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음, 그런가요? 아 맞아, 깜빡한게 있네요.”

의미심장한 콧소리를 낸 알비레오 백작이 손짓하자 옆에 서 있던 시종이 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 시우에게 걸어왔다.

작고 고급스러운 목함이었는데 안을 열어보자 백금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카드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가문의 상징인 쌍조가 새겨져 있고, 사이드에는 뭔가 구멍 같은 것도 나 있다.

“이건… 뭔가요?”

“게헨나에 머무는 동안 시우 군이 사용할 수 있는 신용증서에요. 그 카드를 보여준다면 게헨나 어디서든 저희 가문 앞으로 외상을 달아 놓을 수 있어요.”

“한도는 무제한이니 마음 편하게 사용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사실 무제한이라고 해도 알비레오는 시우의 씀씀이를 알고 있었다.

먹거리를 잔뜩 사긴 해도 말도 안 되는 사치를 부리는 성격은 또 아니다.

그러니 샤론과 시우에게 동시에 부를 과시할 겸 겉치레를 하는 것이다.

백금카드를 소중하게 품에 품은 시우는 감사하고 잡다한 이야기를 백작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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