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
1.
“어휴….”
엘로아가 늦잠을 잤기 때문에 제머나이 저택에 방문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지체되었다.
쌍둥이가 잘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방문하는 것은 처음인 만큼 시우는 그 압도적인 위용에 감탄했다.
만약 빅토리아 시대에 할리우드 스타나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있었더라면 이런 저택에서 살았겠구나 싶은 규모이자 풍경이랄까?
마중 나온 집사의 안내를 따라 저택의 정문에서 본관까지 들어서는데만 마차를 타고 10분 이상 정원을 가로질러야 했다.
“상상 이상이네요.”
하지만 시우와 엘로아의 혼이 쏙 빠져있는 이유는 저택의 규모에 압도당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저택 자체도 틀림없이 놀랍기는 하지만 오늘 아침에 있던 일이 보다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늦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1층으로 나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어제 봤던 것의 10배는 되는 수의 마녀들이 1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저깄다!’
‘쟤가 걔야? 그 남자 주제에 낙인을 가지고 있다는?’
‘진짜, 진짜잖아?’
그 모든 인원은 시우와 엘로아의 모습을 식별하자마자 포크와 나이프를 내던지고 달려들었다.
모양새가 꼭 방송국 앞에서 기다리다 달려드는 광팬이었기에 시우도 엘로아도 쩔쩔매면서 그 자리를 빠져나와야 했다.
그렇다고 모든 소란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시우가 보더 타운에 있다는 소문이 하루아침에 쫙 퍼져버린 것인지 포탈로 가는 내내 몰려들던 마녀들.
이쯤되면 오르골도 의미가 없다.
선물을 주겠다 따라와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같은 은근한 추파는 물론이오.
마법 연구를 도와달라.
한 번만 연구하게 해달라는 등골 섬찟한 제안도 다수였다.
‘그만들 하게!’
참다못한 엘로아의 일갈에 거미 새끼처럼 흩어졌다가도 금세 구름처럼 몰려드는 추격극은 제머나이 저택에 당도하고 나서야 끝났다.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겠는데요….”
“동의하네…. 자네는 좀 숨어 다녀야겠군.”
엘로아는 마차의 등받이에 몸을 푹 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지친 모양새였다.
그때.
-다그닥! 다그닥!
저 멀리서 말발굽 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새처럼 꺅꺅거리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조수우니이임!”
“조수님이이임!!!”
누구의 목소리냐고 생각할 것도 없다.
금세 다가오더니 멈춰 선 마차 주위를 사냥감을 포획한 원주민처럼 빙빙 도는 쌍둥이.
“마중 나온 모양이네요.”
“먼저 내리게. 인사는 내가 대신 전해주겠네.”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
시우는 엘로아에게 인사를 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한쪽으로 다리를 모으고 비스듬하게 말을 탈 수 있게 해주는 여성용 안장, 사이드 새들에 걸터앉은 쌍둥이가 환희에 빠진 눈빛으로 시우를 보고 있다.
참고로 오딜은 흑마, 오데트는 백마에 타고 있었다.
두 마리 모두 어찌나 털에 윤기가 나는지 시우보다 좋은 샴푸를 쓰는 것 같다.
““조수님!!!””
“어이쿠! 다치십니다.”
시우를 발견한 오딜과 오데트는 망설임 없이 안장에서 뛰어내려 시우의 품에 안겼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시우의 얼굴을 핥을 기세로 반가워한다.
“조수니임! 보고 싶었어! 현세에서 큰일날 뻔했다면서?”
“위험할 뻔했으면 당장 저희 저택으로 오셨어야죠! 저 그 날 이후로 사격 연습도 엄청 열심히 했단 말이에요!”
“맞아! 앞으로는 꼭! 무슨 일 있기 전에 우리랑 상의하고 해!”
“언제 온다고 말도 안 해주고! 너무해요!”
시우의 팔을 주거니 받거니, 뺨에 뽀뽀를 잔뜩 퍼부으면서 어화둥둥 해주는 쌍둥이식 서라운드 환영에 시우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일단 목에 매달리지 말고 내려오시겠어요?”
“뭐야! 그 반응! 별로 안 반가워 보여!”
“설마 저희보다 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죠?”
사실대로 말하자면 쌍둥이가 무척 반가운 것도 사실이지만 시우는 샤론을 가장 먼저 만날 예정이었다.
호감도라던가 우호도라던게 다른 게 문제가 아니다.
샤론은 아무것도 못 하는 시우를 감싸려다 호문쿨루스에게 깊은 상처를 입었다.
시우가 확인했던 그녀의 모습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으니 당장 건강 상태가 염려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때 오딜은 시우의 어깨 너머로 무엇인가 포착했다.
저 멀리에서 달려오는 샤론 언니의 모습을 본 것이다.
시우는 샤론을 등지고 있어 아직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상황.
이제 슬슬 쌍둥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샤론을 만나러 가던 그때.
향긋하고 풋풋한 체취가 제머나이 가문 특유의 향유 향기와 함께 코끝에 감돌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입에 덮듯이 겹쳐졌다.
립글로스나 립밤을 잔뜩 바른 것처럼 쫀쫀하고 부드러운 감각.
아직 아연함을 느끼기도 전에 작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더욱 조그맣고 앙증맞은 혀가 입안으로 쏙 들어왔다.
“웁?”
“후웁…우움….”
“어, 언니! 나도! 나도 할래!”
오딜은 저 멀리 샤론을 발견하자마자 시우에게 매달린 채로 키스한 것이다.
지금 바로 안 하면 오랜만에 하는 재회의 키스는 샤론 언니가 뺏어갈 것이 뻔하니까.
그리고 조수님이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은 나다! 라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시우는 뒤늦게 이곳이 제머나이 저택의 한가운데, 그것도 가림막도 없는 정원이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오딜을 떼어냈다.
저기 서 있는 저택의 창문에서 행여나 백작이 이곳을 내려보고 있던 것은 아닐지.
시우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딜 님, 밖에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시우의 정당한 주장에도 오딜은 귀밑머리를 쓱 쓸어넘기며 허리에 손을 얹고 선포했다.
뺨에는 제철 복숭아가 그렇듯 싱그러운 홍조가 맺혀있다.
“난 이제부터 주위 시선 신경 안 쓸 거야! 그리고 뭐 어때? 어차피 우리 전속 시녀들은 다 안다구!”
“저도! 저도 할래요!”
그 와중에도 오데트는 주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시우에게 키스를 졸랐다.
이거 안 해주면 끝이 없겠다 싶어 오데트와도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헤…헤헤…. 뭔가, 오랜만이라 떨려요….”
오데트는 곧장 흐물흐물 녹은 표정이 되어서 쑥스러워한다.
오딜이 뭔가 전투 키스였다면 오데트 쪽은 완전 첫사랑에 빠진 공주님 키스에 가까웠던지라 시우마저 상황을 잊고 머쓱함을 느꼈다.
“실컷 다 해놓고 무슨.”
“언니는 로맨스가 부족해!”
“아닌데? 나도 분당 심박수 300까지 순간적으로 치고 올라갔어!”
“자자, 그만들 하세요.”
또 별것도 아닌 일로 투닥거리기 시작하려는 쌍둥이를 말리는 시우.
오딜과 오데트는 임전 태세에 들어가려다 시우를 보고 마지막으로 와락 안겼다.
사실 투닥거릴 때마다 이렇게 말려주는 조수님이 너무너무 그리웠다.
“조수님 보고 싶었어….”
“저두요 조수님….”
“저도 오딜 님 오데트 님 모두 보고 싶었어요.”
따뜻한 환대에 기분이 좋아진 시우는 쌍둥이의 말고삐를 잡은 채 본관으로 향했다.
“…….”
능숙하게 말에 걸터앉아 시우의 에스코트를 받던 오딜은 힐끗 뒤로 시선을 던졌다. 얼핏 보이던 샤론 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겁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거야.”
“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오딜과 제대로 듣지 못한 시우.
오딜은 자연스럽게 시우를 재촉했다.
“아무것도 아냐. 빨리 가자 조수님. 조수님이랑 피크닉 가려구 준비했어.”
2.
샤론은 문을 쾅 닫았다.
수업이 끝나고 시우가 도착했다는 전언을 받은 뒤 곧장 그를 만나기 위해 달려 나갔다.
알비레오의 ‘시우와 거리를 둬달라’라는 당부 따위는 머릿속에서 깡그리 잊은 뒤였다.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갔을 때 목격한 것은 말을 타고 샤론보다 일찍 도착한 쌍둥이가 시우와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돌발적인 오딜의 키스 그리고 이어진 오데트의 키스는 샤론에게 경악과 동시에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했다.
하나.
시우와 쌍둥이가 그 정도로 사이가 가까웠다는 것과.
둘.
먼저 시우가 돌아왔다는 기쁨에 잊었던 알비레오와의 계약.
아직도 정확한 선을 알지 못한, 그 두루뭉술한 당부를 말이다.
“후….”
샤론은 한숨을 쉬었다.
시우 없이 쌍둥이와 티격태격할 때는 사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기한을 줘도 시우는 뺏기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이 일을 바탕으로 더는 그에게 기댈 것 없이 대등한 관계로 옆에 서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시우와 키스하는 쌍둥이의 모습을 보자 그 확신이 흐물흐물 사라졌다.
확신이 사라지고 알비레오와의 계약 문제까지 떠오르자 발이 족쇄를 찬 것처럼 무거워졌다.
도저히 시우를 반기기 위해 달려갈 수 없었다.
“왜… 나한테는 이야기 안 했을까?”
분명 시우는 쌍둥이와 친한 오빠 동생 정도의 사이라고 말했다.
근데 저렇게 만나서 반갑다고 뽀뽀뽀도 아니고 혀 넣고 키스하는 게 친한 오빠동생 사이라고?
“온 세상 오빠 동생 다 정분나겠네…!”
샤론은 주먹을 꾹 쥔 채 시우에 대한 섭섭함과 서러움을 토해냈다.
하지만 원망은 머지않아 자신을 향한 자책이 되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샤론의 조건이 쌍둥이에 비해 크게 밀린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돈?
숙소로 받은 별장만 봐도 샤론이 사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아니 로비의 샹들리에 하나 사는데도 1년이 넘게 걸릴지도 모른다.
위계?
몇 년 안으로 샤론이 두 단계를 나아가지 않는 이상 뒤처지게 된다.
머릿수?
혈혈단신인 샤론에 비해 쌍둥이는 상시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이다.
사회적 지위?
에버그린 가문은 정통 원소 학계로 명망 높지만 제머나이 가문은 게헨나에서도 유세를 떨치는 백작가다.
매력?
오늘 쌍둥이의 앞에서 몸매 자랑을 했지만 쌍둥이의 외모가 못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샤론이 흉내낼 수 없는 깜찍한 매력이 있다.
마지막 하나를 무승부라고 쳐도 샤론의 완패인 것이다.
가슴 좀 큰 게 유세라고 쌍둥이를 놀려댔던 자신의 한심함에 한숨이 나왔다.
‘훗날 쌍둥이가 낙인을 계승하게 되고, 그때까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에게도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라고 말했던 알비레오의 대사처럼.
길가는 마녀 아무나 붙잡고 ‘누가 더 이 남자에게 도움이 되나요?’를 투표한다면 백이면 백 쌍둥이를 고르리라.
안 되겠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다.
샤론은 공방 찬장에서 술병 하나를 따 병나발을 불렀다.
“이대로… 널 보낼 수는 없다고… 밤을 새워… 간절히 기도했지만…. 더는… 널 사랑할 수 없다면….”
시우와 코인노래방 가서 불렀던 노래를 부르며 술을 홀짝이는 샤론.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샤론! 다녀왔어!”
갑자기 들린 시우의 목소리에 총소리를 들은 여우처럼 헐레벌떡 숨으려 드는 샤론.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려던 샤론의 노력이 무색하게 시우는 곧장 공방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
툴툴거리는 쌍둥이를 대기시켜 놓고 곧장 샤론을 만나러 온 시우.
그런 시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장롱문을 반쯤 열어 넣고 막 들어가려는 포즈를 취한 샤론이었다.
뭔가 예상했던 재회 모습과는 다르다.
“거기서 뭐 해?”
“…자, 장롱에 뭐 찾을 게 있어서.”
“…뭐 찾는데? 들어가서 찾아야 해?”
“그, 그러게, 뭐였더라? 하아, 덥다… 엄청 덥다.”
샤론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부채질하며 슬며시 장롱을 빠져나왔다.
그제야 오랜만에 보는 샤론의 모습이 눈에 쏙 들어온다.
진짜 이렇게 반가울 수도 있구나.
연두색과 짙은 녹색을 적절하게 배합한 것 같은 찰랑이는 장발.
쌀쌀맞아 보이는 차가운 생김새와 다르게 촉촉하게 젖어있는 민트빛의 눈동자.
요즘도 꿈에 나와 시우를 괴롭게 하는 것은 그를 구하려고 작살에 꿰뚫렸던 샤론의 모습이었다.
무사한 그녀의 모습을 직접 보자 감정이 격해진 것인지 눈물이 왈칵 날 것 같다.
“시, 시우…우웁…!”
시우는 성큼성큼 다가가 샤론을 꽉 끌어안으면서 단숨에 키스했다.
말하자면 현관 3초 키스!
이상하리만치 뻣뻣하게 굳어 파르르 떨던 샤론이 포획당한 새처럼 힘이 빠지고 시우의 넓은 가슴팍에 기대듯 체중을 실어 왔다.
“후움…움…웁…!”
처음에는 뭔가 거부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낌새는 키스 시작 3초만에 말끔하게 사라졌다.
모든 걸 주고 싶다고 말하는 듯한 몸짓으로 시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키스를 계속하는 샤론.
흥분과 호흡이 너무 가빠져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어졌을 때 샤론과 시우는 가까스로 떨어졌다.
키스만 하고 떨어졌는데 샤론의 얼굴이 벌써 눈물로 엉망이다.
“흑…흐흑… 시우야…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아픈 곳은 없고? 몸은 좀 괜찮아?”
“우…우….흐아아앙… 나, 나 이제 괜찮아…. 위, 위계도 다… 회복했… 으아아아앙….”
“어이구, 얼굴 엉망되는 거 봐라.”
“놀리…지이… 마아아…. 하아아앙….”
숨은 언제 쉴까 걱정이 될 정도로 목놓아 울며 시우의 가슴에 마구마구 파고드는 샤론.
시우에게 느꼈던 섭섭함도, 그와 멀어지게 될지 모른다는 모종의 불안함도.
그의 옆자리에 과연 누가 어울리냐는 사사로운 문제도.
지금만큼은 중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