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1.
페리윙클과의 깜짝 재회.
더는 엘로아를 기다리게 하기도 마땅찮다.
-똑똑
“들어오게.”
시우는 노크를 하고 엘로아가 대답한 뒤에야 문을 열었다.
이제 핑크클로버는 없지만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타이밍에 문을 열면 반쯤 헐벗은 엘로아가 놀란 토끼 눈으로 시우를 반겨주곤 했으니 말이다.
“조금 늦었구나.”
이번엔 다행히 별일 없었다.
벽난로 앞, 침대에 걸터앉은 스승님이 기분 좋은 햇살에 조는 고양이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 뿐이다.
다만 아까의 해프닝을 의식해서인지 파자마가 아닌 정복 차림이다.
추가로 몹시 다행스럽게도 남사스러운 소음을 남발하던 커플도 잠자리에 든 모양인지 잠잠했다.
“네, 아는 마녀님을 잠시 만나서요.”
“마녀?”
“전에 도와주셨던 페리윙클 님이요.”
별 예쁜 짓도 안 했는데 언제나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시우를 반기던 엘로아.
그러나 시우의 입에서 ‘페리윙클’ 네 글자를 듣자마자 쩌저적 미소가 갈라졌다.
“일전에 신세를 졌어서 인사 좀 나누고 왔습니다.”
“시…신세, 그렇군.”
엘로아에게 강제 성교육을 참관하게 했던 페리윙클.
그 이름을 듣자마자 엘로아의 머릿속에 새싹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오만가지 생각들.
과거의 음란함과 천박함으로 점철되었던 성교 장면은 물론이오,
‘그럼 혹시 이렇게 늦은 이유가…?’까지 사고가 옮겨갔다.
엘로아는 저도 모르게 시우의 옷매무새를 쓱쓱 살폈다.
시우가 나갔다 들어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30~40분.
후다닥 거사를 치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닐런지….
그렇다면 혹시 밖에서 은근히 들려오던 쮸압쮸압 소리가?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혼란으로 가득해지는 엘로아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변한다.
육안으로 관측이 가능할 정도의 채도 변화였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르는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한 불쾌함.
“스승님?”
“…웃!”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점점 고개를 아래로 숙이는 엘로아.
기묘한 반응이 걱정되어 슬쩍 어깨에 손을 올리자 거의 스프링처럼 머리가 튕겨 오른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라네. 아무것도 아니네.”
아무리 둔감한 시우라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는 한편, 설마 그 문제가 엘로아가 페리윙클과의 성교 장면을 몰래 엿봤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아차릴 수 없었다.
“편찮으신가요?”
따라서 ‘스승님의 몸 상태가 여전히 좋지 않구나’라는 합리적인 추론으로 생각이 흘렀고, 그것이 걱정될 뿐이다.
“아니네, 시간도 늦었으니 그대도 자야 하지 않겠나?”
“그러려고요, 스승님이 벽난로 쪽에서 주무실 건가요?”
“그렇네.”
각기 침대에 편히 누운 두 사람.
시우의 경우 오늘 아침부터 연구에 라스트 스퍼트를 올린 결과 머리가 뜨끈뜨끈해질 정도로 고생을 했기에 지쳤고, 엘로아는 최근 그랬듯 계약의 대가 때문에 힘겨운 상태.
술도 적당히 들어갔겠다 사실상 둘 다 침대에 머리만 붙이면 곯아떨어질 피로도였다.
“편히 주무세요.”
“그대도 잘 자게나.”
장식불로 빛나는 등불까지 끈 뒤에 눈을 감자 잠시후 색색거리는 시우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거의 곧장 잠에 든 시우와는 달리 엘로아는 좀처럼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아까 전 페리윙클을 만났다던 시우의 말을 곱씹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남모를 부끄러움과 당황뿐이었다.
직관적이고, 원인을 찾기도 쉽다.
페리윙클과 시우의 은밀한 관계를 몰래엿봤고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니까.
하지만 엘로아는 그 안에서 손끝의 까시래기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다름이 아니라 시우가 페리윙클과 키스를 하는 장면을 떠올렸을 때.
그리고 성교를 하고 돌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잠시지만 어둡고 탁한 감정이 가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문제는 이게 왜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와는 달리 직관적이지도 않았고, 원인을 찾을 수도 없었다.
“…….”
엘로아는 슬며시 눈을 떴다.
객실은 특실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비좁고 침대의 간격은 작은 책상 하나를 둘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이쪽을 바라본 채 눈을 감고 있는 시우의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시우가 처음 샤론과 성교한다는 것을 보았을 때.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본의 아니게 비밀스러운 밀회에 난입해버려 당혹스러웠을 뿐이다.
시우가 페리윙클에게 목숨값을 갚기 위해 봉사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남사스럽고 민망했다.
생전 처음 은은한 열기 같은 것을 느껴버렸고 가당찮게도 시우를 ‘남자’로서 인식해버렸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딱히 불편함을 느꼈다거나 설명할 수 없는 거부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고작 페리윙클과 시우가 밖에서 애먼 짓을 하고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피어오르던 부정적인 감정.
엘로아는 시나브로 피어오른 부정적인 감정의 대상이 ‘페리윙클’임을 깨달았다.
여러 감정을 조합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정리했을 때.
그 불쾌함, 거부감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
엘로아는 한 걸음 물러서고 나서야 그 감정을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었다.
질투.
엘로아 티페레트는 제자 신시우가 여성과 밀회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마자 곧장 질투한 것이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여인이 애인을 뺐긴 것처럼.
“그럴 리 없어….”
엘로아는 부정했다.
당연히 부정해야 한다.
제자에게 질투를 느끼는 스승이라.
천륜을 벗어나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그러니까 이건….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이, 그 연인이 될 사람을 엄격한 잣대로 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아버지가 애지중지 키운 딸이 데려온 남자친구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가까스로 스스로와의 타협에 성공한 엘로아.
꽤 성공적인 타협이었기에 뻣뻣이 굳어있던 표정도 조금 풀렸다.
그 순간.
‘하앙…’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엘로아에게는 그것이 침대 밑에서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불길하게 느껴졌다.
‘좋아? 더 거칠게 해줄까?’
‘으응… 더 거칠게 해줘….’
조금 전 거사가 끝났던 방이 아닌 반대쪽 방에서 다시 신음이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입술을 물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찾아가서 한 소리 할까?’를 고민하는 엘로아.
하지만 여관 전체를 전세를 낸 것도 아닌데 불합리한 처사일뿐더러 지금은 너무 마음이 지쳤다.
엘로아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한참이나 끙끙거리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2.
오늘도 다가온 쌍둥이의 수업 시간.
휴일인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었기에 오후 강의에서 오전 강의로 시간을 옮겼다.
-덜컥!
샤론은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섰다.
그 발걸음에는 더는 망설임이나 부담감 따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투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검투사의 각오가 느껴질 뿐이다.
“과제 제출하렴.”
여느 때처럼 강의실에 앉아있던 쌍둥이는 문을 열고 들어온 샤론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흔들리는 두 쌍의 보라색 시선에 보란 듯이 어깨를 펴는 샤론.
게헨나의 정숙한 복장에 익숙해져 있는 쌍둥이에게 커다란 컬쳐쇼크였음이 분명하다.
제대로 본 것인지, 환각은 아닌지 눈까지 비비적 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샤론은 오늘 현세에서 입던 복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크롭티와 돌핀 팬츠.
사실 가을에 입고 다니기에 적합한 옷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강의 중에 입기엔 더더욱 아니었다.
“…어?”
“…응?”
드레스코드 따위는 개나 줘버린 코디로 강의실에 들어선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아니다.
쌍둥이와 전면전이 확정된 이상 여자가 지녀야 할 매력을 보여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재력이니 뭐니해도 사랑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력.
괜히 돈 많은 해외 셀럽들이 이혼 시 합의금 뜯길 걸 감수하면서 결혼하는 게 아니다.
돈이 많건 뭐가 됐건 결국에 남자를 홀리는 것은 얼굴과 몸매인 것이다!
물론 쌍둥이도 귀엽지만, 샤론에게는 귀여움만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흉악한 병기가 있다.
쌍둥이는 혼이 쏙 빠진 표정으로 샤론의 탐스러운 가슴을 보더니 서로의 가슴을 살폈다.
둘이 합쳐야 샤론과 비빌까 말까 할 것 같다.
쌍둥이의 반응을 확인한 샤론은 한쪽 눈썹을 떡상하는 주식차트 모양새로 올린 채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제출하지 않고 뭐하고 있니?”
쌍둥이는 입술을 뚱하게 내민 채 과제를 제출했다.
샤론이 내준 문제는 총 10문제.
손수 만든 문제로 모두 전날 배운 원소 마법을 활용해야 풀 수 있는 문제들이다.
샤론은 빨간 펜을 이용해 빠른 첨삭을 이어나갔다.
1번부터 9번까지 꽤 성실하게 작성된 답안.
샤론의 눈동자가 잔뜩 기대한 채로 10번 문항을 살폈다.
출제할 때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문제였기 때문이다.
[10번]
[그림1]
[다음 구조와 같은 마녀의 연구실에 소중한 연구자료가 있다. 그 아티펙트를 호시탐탐 노리는 두 마리의 쌍둥이 고양이가 있다고 가정하자. 다음과 같은 조건에 맞춰 효율적인 마력 사용으로 고양이를 쫓아낼 마방진을 제시하시오]
[조건 1]
검은 고양이는 쌍둥이며 정해진 시간 없이 불규칙하게 등장하며 겁을 먹고 도망치지 않는다.
[조건2]
마법진에 총 3가지 이상의 원소 배열식을 사용해야 하며 룬 문자를 사용할 수 없다.
[조건3]
마법진 내부에 흐르는 마력 저항은 1.5%, 원소 파형의 불확실성은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
샤론이 직접 만든 문제에 나오는 쌍둥이 고양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했다.
사심이 듬뿍 담긴 문제 밑 답안을 훑어보던 샤론이 쌍둥이를 바라보았다.
“이 10번 문항은 뭐니?”
쌍둥이 둘 다 10번 문항엔 꼴랑 한 줄의 답안을 적어 두었을 뿐이었다.
[그냥 고양이가 훔쳐 가게 둔다]
“이게 완전 우리 얘기잖아요! 이런 게 어딨어요!”
“완전 비겁해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샤론의 교권 남용을 규탄하는 쌍둥이.
하지만 샤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뻔뻔하기라도 하지 않으면 쌍둥이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수업이나 과제나 성실하게 임해야지!”
“샤론 언니야말로 과제에 사심 섞지 말아 주세요!”
“그, 그리고 복장이 너무 노출이 심해요! 앞으로 그런 옷차림은 자제해주세요! 음란해요!”
샤론은 교탁을 지나 뚜벅뚜벅 쌍둥이 앞으로 걸어왔다.
팔짱 낀 팔 위에 얹힌 가슴이 훌륭한 볼륨을 과시하며 출렁일 때마다 쌍둥이의 가녀린 마음에 도트딜이 박힌다.
교전 개시 만에 연달아 2회 득점에 성공한 샤론은 의기양양했다.
평소의 샤론이 아니라 광전사 샤론이다.
“난 가벼운 옷차림을 입고 왔을 뿐인걸? 게다가 현세에서는 다 이렇게 입고 다녀. 음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책상을 손으로 짚은 채 몸을 기울여 가슴골을 강조하는 데 성공한 샤론.
쌍둥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나란히 그 깊은 골짜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윽! 가, 가짜에요! 이런 거 다 가짜일 거예요!”
“맞아요! 마법으로 키운 거죠?”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쌍둥이.
아무리 쌍둥이라도 여성의 매력 중 한 가지가 풍만한 가슴이라는 상식 정도는 있다.
조수님이 저거에 빠져서 해롱거릴 생각을 하니 자신감이 팍팍 깎여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해트트릭을 달성하기 위한 샤론의 마지막 한 수.
“그래? 그럼 만져 봐.”
오히려 보란 듯이 쌍둥이 앞에 가슴을 내민다.
쌍둥이는 잠깐 눈빛으로 회의를 하더니 마지못해 손을 뻗었다.
“겨우 이런 거 가지고 조수님을 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오산이에요….”
-쭈물!
-쭈물!
몰캉하고 손바닥에 감기는 감촉.
쌍둥이의 작은 손으로 잡기에 너무나도 큰 가슴.
탱글거리는 와중에 확실하게 전달되는 탄력과 부피감, 그리고 부드러움은 쌍둥이가 할 말을 잃게 만들기 충분했다.
가짜나 눈속임 따위가 아니다.
같은 여성조차 끊임없이 만지게 싶게 하는 매혹적인 감촉은 천연의 모성 그 자체이다.
쌍둥이의 표정이 거무죽죽하게 변한다.
노력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참고로, 시우가 엄청 좋아한다?”
애들이랑 싸우면 애들처럼 변하게 되는 걸까?
쌍둥이가 할 법한 유치한 수법으로 전의를 죽인 샤론은 콧대가 높아져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샤론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는 오딜.
“…오데트 문 잠가.”
“응, 언니.”
-딸깍!
오데트가 염동으로 강의실 문을 잠갔다.
쌍둥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아해한 얼굴로 쌍둥이를 바라보던 샤론.
“응?”
쌍둥이는 콧김을 씩씩거리며 미사일처럼 튀어 올랐다.
“아무리 샤론 언니라도! 더는 못 참아!”
“계급장 떼고 붙어요!”
“너, 너희…! 뭐 하는 거야…!”
으르렁거리며 달려든 오딜이 샤론의 머리채를 휘감았다.
오데트는 샤론의 한쪽 팔에 매달려서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마법을 쓸 새도 없이 엉겨 붙은 세 사람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꺅! 아악! 이거 안 놔?”
“감히 우리한테 이런 모멸감을 주다니! 참을 수 없어!”
“이렇게 큰 건! 비효율적인 거! 몰라요? 틀림없이 심술주머니일 거예요!”
“너희 미쳤어? 너희가 먼저 시작했잖아!”
“언니가 먼저 저희를 도발했잖아요!”
“조수님은 절대로 안 뺏길 거에요!”
뭐.
그렇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