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93화 (293/917)

#293

1.

갑작스러운 제삼자의 등장.

시우도 놀랐고.

이름 모를 마녀도 놀랐다.

“어, 설… 설…설마? 행운의 마녀? 키벨레… 페리윙클?”

“나 대신 소개 해줘서 고맙고. 왜 그렇게 보니? 사인이라도 해줘?”

“해주시면 감사하죠! 그나저나… 비겁의 마녀를 죽였다는 건 무슨 의미…?”

여전히 노출도가 높은 고혹적인 드레스.

‘이 구역에서 내가 제일 잘나가!’라고 외치는 듯이 거만한 발걸음으로 힐을 또각또각 울리며 걸어온 페리윙클은 자연스럽게 시우의 옆에 섰다.

“네가 추파 던지는 저 남자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지?”

“그….”

“여전히 게헨나 안에서만 노는 마녀들은 소식이 늦네. 비겁의 마녀가 부리던 적기사. 그 적기사를 죽인 게 이 남자라는 것도 모르는 걸 보니.”

“그럴 리가! 비겁의 마녀를 죽인 건 티페레트 공작이라고….”

페리윙클은 자신 보다 머리하나 작은 마녀를 내려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한 번 붙어봐. 내가 입회해 줄게. 공평하게 말이야.”

마녀는 힐끗 시우의 얼굴을 보았다.

페리윙클의 말이 그저 공갈 허풍인지 아닌지를 감별하려는 듯 말이다.

“왜? 좋잖아?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을 맘대로. 결투 중에는 크게 다쳐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동의하에. 어때?”

“저기, 그….”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던 마녀는 처음의 그 안하무인의 태도가 어디로 갔는지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무리 자의식 넘치는 마녀고, 상대가 남자라고 해도.

그 남자가 비겁의 마녀를 죽였다고 한다면?

심지어 그 말을 전하는 게 대마녀 페리윙클이다.

가벼이 넘길 수는 없었다.

“제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하, 하하….”

“그래, 사인은 받아가.”

페리윙클은 명함에 대충 펜을 휘갈긴 뒤 그 마녀의 가슴골에 그것을 끼워주었다.

스트립퍼에게 팁을 주는 손님처럼 말이다.

“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멸감에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명함을 받고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저 멀리 사라지는 마녀.

그 뒷모습을 우습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페리윙클이 빙글 몸을 돌려 시우와 마주 섰다.

“웃기지? 내가 무슨 복돼지인 줄 안다니까? 내가 이래서 게헨나를 싫어하는데. 죄~다 손 좀 잡아 달라~ 사인해달라~ 키스해달라~”

“오랜만입니다. 페리윙클 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적기사는….”

“알아, 내가 그걸 모를까? 뻥카 친 거야.”

페리윙클은 손을 뻗어서 시우의 옷매무새를 정돈해주었다.

“잘 살아남았네. 야생마 신시우.”

가지런한 치아가 보이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이다.

2.

누운 뱀 쉼터 1층.

나무로 된 맥주잔을 하나씩 손에 쥔 페리윙클과 시우는 오랜만에 재회의 건배를 나눴다.

“게헨나에 들어오자마자 포탈이 맛이 갔다길래 이럴 리 없다 싶었는데. 널 만나려고 그런 거구나?”

엄청 작업 멘트같은 대사를 날리는 키벨레 페리윙클.

그녀는 시우와 샤론의 목숨을 한번 살려주고 이후에 네잎클로버로 한 번 더 시우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말하자면 두 번의 생명을 빚진 은인이라는 의미다.

기이하고 희귀한 물건을 보는 것 같은 시선만 접하다 아는 얼굴을 보니 반갑다.

처음엔 페리윙클도 비슷했지만 뜨밤을 보내고 난 뒤에는 제법 대등한 관계로 봐주는 듯했으니 말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나야 뭐, 괌에서 유유자적 놀다가 볼일 생겨서 잠깐 들렀지. 너는?”

“저도 볼일 때문에 잠깐 왔습니다.”

페리윙클은 정말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녀였다.

군청색 머리카락과 군청색 눈동자 그리고 검은 드레스.

황금을 연상시킬만한 요소는 하나도 없는데도 그녀가 앉아있는 허름한 술집이 마치 금은보화가 잔뜩 쌓인 보물창고처럼 보이게 만든다.

공간 하나만 똑 떼어낸 것처럼 말이다.

턱을 괴고 다리를 꼰 채 하이힐을 까딱거리던 페리윙클.

“여전히 대화를 리드하는 건 약하구나? 섹스는 정말 리드 잘하는데 말이야.”

대뜸 섹스라는 말을 입에 올린 페리윙클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아슬아슬하게 발끝에 걸쳐있던 힐을 툭 떨어뜨리더니 매끈한 발을 시우의 다리 사이로 올린다.

따로 해석할 필요가 없는 추파였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지라 슬쩍 제지했다.

발에 닿은 시우의 손이 간지럽다는 듯 웃는 페리윙클.

“그건 그렇고, 전에 주신 네잎클로버 덕분에 한번 목숨을 구했어요.”

“효과 좋지? 나도 너 죽지 말라고 기를 모아서 만들었어. 정화수도 떠 놓고.”

시우는 페리윙클의 호들갑에 피식 웃었다.

뻔히 꺼내서 주는 거 봤는데.

태연하게 거짓말을 읊은 페리윙클은 아예 자리를 옮겨 시우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갑자기 코 밑에 정수리를 가져다 댈까 봐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나저나 그 분홍클로버는 어땠어?”

“아! 그거!”

어느 날부턴가 사라져서 잊고 있었던 것이 퍼득 떠오른다.

요사한 빛깔의 클로버.

그 용도가 뭔지 꼭 물어보려 했다.

그런데 페리윙클의 말투나 장난기 어린 태도를 보면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재밌었지? 야릇한 이벤트만 잔뜩 펼쳐지게 해주는 거였는데.”

“하아, 그것 때문에 고생 좀 했습니다.”

“남자라면 좋은 아이템이잖아? 하나 더 만들어줄까?”

“마음만 받을게요.”

깔깔거리는 페리윙클과 쓴웃음을 짓는 시우.

지금은 지난 일이니까 쓴웃음으로 넘기지만 살 떨리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누구랑 어디까지 어떻게 됐니? 그 정도 이야기는 해줄 수 있잖아.”

그 시점에 시우와 꼭 붙어있던 사람은 엘로아였기에 모든 사건의 타겟은 아무것도 모르는 스승님이었다.

근데 그걸 까발릴 정도로 입이 가벼운 건 아니다.

뭔가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어허, 노코멘틉니다, 노코멘트.”

“어떻게 하면 말해줄 건데?”

기다렸다는 듯이 시우에게 찰싹 달라붙어 코밑에 머리를 가져다 대려는 페리윙클의 정수리의 손이 턱 올려진다.

이럴 줄 알았다.

페리윙클은 쳇쳇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이렇게 하기야? 나쁜 남자네. 여자 마음에 불 질러 놓고 모른 척이나 하고.”

“제가 언제 불을 질렀어요. 암만 봐도 자연발화인데.”

그래도 예전에 인연이 좀 있다고 대하는 게 불편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

“아, 그러고 보니 너 내가 준 붕붕이도 며칠 만에 박살 냈더라. 혹시 나도 네게 되면 그렇게 험악하게 굴릴 거니? 우리 시우, 나쁜 남자야?”

“어, 그거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아셨네요.”

“비밀은 무슨… 수리센터에서 연락 왔어. 물어내. 빨리 물어내라고~”

“주셨으면 땡인 겁니다. 좋은 일에 잘 썼어요.”

“어머, 대답 칼 같은 거 봐.”

한 번 시우의 불방망이 맛을 봤기 때문인지 페리윙클은 이전보다 훨씬 사근사근했다.

그래도 전엔 좀 고압적인 태도가 있었는데 이제는 뭐랄까.

과에서 친하게 지내는 선배같다.

첫 만남은 별로였더래도 일단 생명의 은인인 이상 시우도 조금은 편하게 대할 수 있었고 말이다.

특히 시우를 ‘꼭 소유해야 하는 희귀템!’으로 보지 않는 시선이 참 편했다.

“아무튼, 말 나온 김에 말이지. 오늘도 나한테 선물 받아 가지 않을래?”

페리윙클은 제 드레스 위쪽을 살며시 잡더니 옆으로 젖힌다.

시우만 보이게끔 살짝 제 맨 가슴을 보이는 것이다.

이틀간 침대 위에서 숱하게 물고 꼬집고 깨물었던 가슴이지만 이렇게 야외에서 한쪽 젖가슴만 내놓은 것을 보게 되니 꼴림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순간 훅할 뻔했다.

“너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그때 정말 즐거웠거든.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똥구멍으로 말인가요?”

“야! 너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페리윙클은 기겁하며 주위를 휙휙 돌아본다.

가슴을 보일 수 있는 건 신경 안 쓰면서 정작 저런 말을 부끄러워하다니 그 갭이 상당히 귀여워 보였다.

“…그래도, 뭐… 너가 원한다면 나도 좋아.”

슬며시 가슴을 여미며 쑥스러워하는 모습은 더 귀여웠고.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엘로아를 너무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잠깐 바람 쐬고 온다고 했다가 돌아오지 않는 제자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선했다.

이제 30분이나 지났으니 슬슬 돌아가야겠지.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시간내기 힘들 것 같아요.”

“방치 플레이는 침대 위에서 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왜?”

페리윙클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다가도 제법 시원시원하게 포기했다.

“위에서 스승님이 기다리시거든요.”

“…스승님? 누구?”

“티페레트 공작님이요.”

페리윙클의 시선이 살짝 위를 향한다.

그리고 로딩 중인 것처럼 아무 말 없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언가를 알아챈 듯 입을 쩍 벌렸다.

“너, 설마, 티페레트 공작이랑, 했니?”

자신의 핑크 클로버가 불러온 스노우볼링에 어찌나 경악했는지 더듬더듬 말을 꺼내는 페리윙클.

시우도 자신의 말과 반응이 충분히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것임을 인지하고 정정하려 들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진짜 했다.

대답이 지연되는 시우를 보고 지레 짐작한 모양인지 페리윙클은 혀를 내둘렀다.

“와… 이거 아닌 척하고는 선수였네?”

“그…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닙니다.”

“그래서 안 했어?”

하여간 눈치는 겁나게 빠르다.

하지만 여기선 엘로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해야겠지.

“안 했습니다.”

“했구나. 너 거짓말 정말 못 하거든.”

그리고 순식간에 간파당했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지 초점 맞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훑는 페리윙클.

섹스하자는 생각 따위는 멀찌감치 날아갔는지 부산스럽게 혼자 무엇인가를 중얼거린다.

“그 완고한 공작님이? 아니, 아무리 클로버라지만…. 도대체 어떻게…?”

“오랜만에 뵙게 돼서 좋았어요. 다음에도 또 뵙겠습니다.”

“자, 잠깐잠깐!”

일어서려는 시우의 소매를 쭉 끌어당겨 다시 의자에 앉히는 페리윙클.

“아니, 진짜? 진짜 했어?”

“안 했다니까요.”

“아닌데…. 분명 한 건데…. 근데 어떻게 했지?”

부정하는 시우의 답변은 분명 거짓말인데…

정작 진실은 곧이곧대로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혼란에 빠진 페리윙클.

입이 가벼워 보이지는 않지만 괜히 오해나 헛소문의 여지를 남기는 것보다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큼큼,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했어요.”

“거짓말 하지 마!”

“아니! 저보고 어쩌라고요!”

따라서 시우는 차근차근 페리윙클에게 그 경위를 일러주었다.

패닉에 빠졌던 페리윙클도 차분하게 지속된 시우의 설명에 어느 정도 납득이 간 모양이다.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는다.

“아하… 그런 거구나…”

“그러니까 꼭 비밀 엄수 부탁드립니다.”

“그럼~ 내가 그렇게 입 싼 여자로 보여? 나는 시우가 침대에서 잡아먹을 때나 솔직해지는 여자라고.”

근데 딱 거기까지면 좋았을 것 같은데.

“여심을 주머니에서 빼내는 신시우 씨 부탁을 한낱 아녀자인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세상에 세상에… 진짜 충격이 크네.”

이렇게 시우를 놀릴 정신까지 회복해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페리윙클은 남아있던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 모양이다.

“나도 오랜만에 보게 돼서 좋았어. 무사한 것 같아서 다행이고.”

“별말씀을요. 저도 페리윙클 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공작님이랑 한 침대에서 해보고 싶다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건 부탁 못하겠지?”

“당연하죠.”

머리가 아찔해지는 발언을 한 페리윙클은 제 파우치를 챙기고 무엇인가를 툭 건넸다.

명함인데 밖에서 받았던 것과는 다르다.

이상한 일련번호가 적힌 명함이었다.

“게헨나에는 전파가 안 터지잖아? 전화도 안 되거든.”

“저도 알죠.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원격대화용 수정구의 연락처를 받아든 페리윙클은 시우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는 씩 웃었다.

“이것까지는 안 막네?”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살펴 가세요.”

그렇게 폭풍처럼 등장했던 페리윙클은 폭풍 같은 인상을 남기고 여관 밖으로 사라졌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