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1.
그러고 보니 당연하다는 듯이 같은 방에서 묵게 되었다.
최근 같은 오피스텔에서 생활하면서 습관처럼 된 것이겠지.
아무래도 1층은 너무 붐비는 것 같아 식사를 객실로 올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아까 그 마녀들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받으며 밥을 먹다간 체할 것 같았기에 말이다.
방은 싱글 사이즈 침대 2개가 놓인 2인 특실이었다.
사실 특실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에는 좀 애매한 방이었다.
보더 타운의 건물은 전체적으로 타로 타운의 것보다 허름했다.
당장 이 객실만 봐도 뭔가 오래된 펜션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나름 벽난로도 있고 마법을 이용해 구석에 만들어진 간이 샤워실 겸 화장실도 있지만 어딘가 허름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군.”
하지만 우리 엘로아 스승님은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듯하다.
“그대는 어떤가?”
“저야 뭐 이 정도면 감지덕지죠.”
5년 동안 햄스터 집에서도 잘 살아왔는데 벌레 없는 멀끔한 침대만 있으면 얼마든지 잘 수 있다.
테이블을 끌어온 시우와 엘로아는 마주 놓인 침대를 의자 삼아 간단한 저녁 식사를 끝냈다.
저녁과 함께 올라온 술을 가운데에 두고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시간이 생겼다.
“가끔은 이런 곳에서 지내보는 것도 추억 아니겠는가?”
“암요, 스승님 말씀이 옳습니다. 이색 펜션 같아서 좋네요.”
안 그래도 싸늘한 날씨에 이슬비까지 내리고 있어서인지 꽤 서늘하다.
벽난로 앞에 편히 앉은 엘로아는 노곤한 표정으로 시우가 건네는 술잔을 받았다.
한동안 붉은가지를 통제하는 연구에만 매진하느라 제대로 묻지 못했던 것을 물었다.
“스승님께선…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예정인가요?”
“흐음, 아직은 대가를 전부 이행한 것이 아니니 회복까지는 푹 쉬어야겠지.”
엘로아는 저번의 격전으로 너무 많은 계약을 동시에 소모했다.
한 두 달 정도는 푹 쉬어야 할 것이다.
“그 이후에는… 하던 일을 계속해야지.”
라피의 유언 아닌 유언.
약속 아닌 약속.
그것을 지키려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불순물을 닦아내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며 호문쿨루스와 공적 사냥을 이어나갈 것이다.
다만 예전과는 다르다.
죄악감을 끌어안은 채 가라앉아 무의미한 속죄를 거듭하던 때와는 명백히 다르다.
그것만으로 엘로아는 시우에게 큰 감사를 느꼈다.
“너무 무리하시진 마세요.”
엘로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시우로선 말릴 자격도 없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엘로아가 강하다고 해도 시우는 그녀가 위기에 처하는 광경을 바로 옆에서 보았다.
만약 그때 시우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위험한 순간을 말이다.
엘로아는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을 바라보는 시우는 보고 살포시 웃었다.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가 벽난로의 불길을 따라 일렁인다.
스승을 걱정하는 제자와 그런 제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스승의 눈길.
“그대는 참 걱정도….”
그 애틋한 순간을 싹뚝 잘라버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바로 옆방에서.
‘하앙~ 거기는 민감하다니까아~’
‘흐흐, 이렇게 듬뿍 적셔놓고 무슨 소리야 이 앙칼진 암고양이 년!’
딱히 엘로아와 시우의 감각이 특출나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운뱀 쉼터는 말했다시피 옛 건축 양식을 따라 지어진 목조건물.
방음이라고 해봐야 방과 방 사이에 통나무 벽을 세워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대는 참 걱정도 많….”
애써 무시하고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엘로아의 노력이 무색하게 다시 한번 적절한 타이밍의 지방방송이 들려온다.
‘흐응~ 그래! 거기… 하아… 거기….’
‘여기가 좋아? 더 벌려 봐.’
‘이 이상 어떻게 벌려…. 하앙…”
상황을 무마하고자 가까스로 벌어졌던 엘로아도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시우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린 엘로아의 동공이 굉장히 높은 진동수를 선보인다.
당황한 것은 엘로아 뿐만이 아니다.
시우도 이 뻘쭘한 해프닝에 바짝 굳어 있었다.
식사 때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오길래 사이좋은 커플이겠거니 하고는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자극적인 대화가 들려올 줄이야.
하지만 시우는 예전의 모솔아다가 아니다.
이대로 옆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어봤자 상황이 악화되기 밖에 더하겠는가?
시우는 최대한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넘어가고자 했다.
타카쇼식으로다가.
“하하, 사이좋아 보이네요.”
“…….”
다만 이런 류의 농담은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정작 엘로아는 무릎을 바짝 끌어안은 채 침묵을 지키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쿠, 쿨럭!”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집어 마시더니 곧장 사레에 들리기까지 한다.
-철썩! 철썩!
‘항! 항! 앙! 앙! 더 쎄게!’
‘이 쒸불련…!’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방의 커플은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거칠게 하는지 살 부딪치는, 소위 말하는 떡 치는 소리까지 전달된다.
커플이 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여사친이랑 이런 상황에 부닥쳐도 민망할 텐데 무려 상대가 엘로아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들 몸을 섞은 적도 있는 사이다.
그리고 스승님이 그것을 무척 신경 쓰고 의식하고 있다는 것도 시우는 알고 있었다.
절대로 그때의 일을 입에 담지 않는 것도 그렇고...
“…요, 요새 계약의 대가 때문인지…. 귀가 잘 안 들리는구나. 나, 나는 좀 씻겠네.”
“네, 알겠습니다.”
무릎의 모포를 개고 일어난 엘로아.
그리고 제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고도 여긴 것인지 재빠르게 변명한다.
“그, 그냥 씻는 걸세! 아무 의미도 없다네….”
당연하지만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아니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 대잔치를 해버렸을 뿐이다.
당혹스러움과 상관없이 제 발 저린 사람의 표본을 보이는 엘로아의 모습에 웃음을 꾹 삼킨 시우.
“…….”
하지만 객실 구석에 있는 샤워 설비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상하수도가 설치되어있긴 하지만 별도의 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천막으로 얼추 가리는 정도이다.
이대로라면 물소리고 뭐고 다 들릴 것이 뻔하다.
시우도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도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그, 아… 알겠네.”
홍시처럼 빨갛게 변한 엘로아를 두고 시우는 객실 밖으로 나섰다.
“하아….”
시우가 나가고 나서야 엘로아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옆방에서는 여전히 달뜬 교성과 짐승 같은 남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저런 소리를 어떻게 시우와 같이 듣고 있던 것인지 엘로아는 새삼 아찔함을 느꼈다.
“우우….”
붕붕 고개를 젓고 옷을 벗어 갠 뒤 떨어지는 물을 몸으로 받는 엘로아.
잡념을 털어낼 때는 샤워만큼 좋은 것이 없다만…
‘가, 간다아앗…!’
심심하다 싶으면 들려오는 벽간 소음은 엘로아의 숨이 턱턱 막히게 했다.
“이미 아무것도 안 들린다고 해버렸는데….”
다행히 시우는 그 말을 믿은 것 같지만 이미 어설픈 변명을 주워섬긴 상황에서 갑자기 나가자고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또 엘로아는 계약상 수면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나마 위안 삼을 점이라면 저러다 말 것이라는 거?
시우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니라 일반적인 성교는 하루종일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으니 말이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은 이 시점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지도 몰랐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샤론과 뜨거운 밤을 보내는 모습을 엿보게 되질 않나.
수호자의 계약으로 페리윙클과 시우의 성교를 보게 되질 않나.
갑자기 파자마가 헝클어져 가슴을 내보이게 되질 않나.
갑자기 온 세상이 부조리하게 느껴진 엘로아였다.
2.
“후, 개뻘쭘할 뻔했네.”
시우는 담배를 피울 겸 잠시 바람도 쐴 겸 여관 앞으로 나왔다.
아까 1층에서 봤을 땐 남자밖에 없던 것 같은데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복도에서부터 뒤엉킨 남녀가 물고 빨고 난리들이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시우는 무려 세 커플을 멋지게 방해하고 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누운뱀 쉼터는 제법 고지대를 선점하고 있는 만큼 보더 타운의 야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게헨나 물자 유통의 허브인지라 저 멀리 선착장은 아직도 작업등으로 환했다.
“쓰읍… 하아….”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마시고 번뇌와 함께 내뱉는다.
엘로아가 너무 당황하는 것 같아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우가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질어질하네.”
인싸 친구들은 남사친 여사친끼리도 술김에 모텔 가고도 없던 일처럼 잘 지낸다는데.
시우가 그게 될 리가 없다.
애초에 그때 빗물터널에서의 기억이 워낙에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엘로아의 몸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옷을 입고 있어도 그 밑의 알몸을 전부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가능한 의식하지 않으면서, 엘로아가 당황스럽지 않게 거리를 조절하던 시우.
하지만 이런 해프닝이 벌어지자 다시 한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엘로아가 시우와 좀 더 가볍게 몸을 섞는 관계였더라면…
아까 그 상황에서 장난스럽게 키스를 시작하며 다시금 헐떡이는 엘로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볼륨 넘치는 가슴을 뒤에서 와락 쥔 채 몸속 깊은 곳에 사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같은 잡스러운 생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에라이 시발! 드디어 미쳤나?”
끈적한 번뇌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괴감에 빠지려던 때.
“자기, 혼자 뭐해?”
“으악!”
갑자기 뒤에서 걸려 온 목소리에 식겁한 시우.
뒤를 돌아보자 뾰족한 꼬깔모자를 쓴 여자가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고 있었다.
“어머머,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네. 너 맞지? 아까 티페레트 공작이랑 같이 온… 음… 남자 마녀? 안대 멋있다. 패션이야?”
마녀답게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모가 아니라 그런지 금방 어디서 봤었는지 기억이 난다.
아까 1층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던 마녀였다.
“무슨 용무신가요?”
시우는 단박에 경계심을 내비쳤다.
현세에서 생활하는 동안 몸에 밴 습관이었다.
좋은 마녀도 많지만 시우의 특이성에 집착을 보일 마녀도 분명 존재할 테니까.
“꼭 무슨 용무가 있어야 말을 걸어야 하나? 그냥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온 거지.”
“죄송합니다. 금방 들어가 봐야 해서.”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에서 불길함을 감지했다.
예쁜 여자가 주는 관심이 싫을 리 없다.
근데 그 원인이 마녀 특유의 호기심일 수 있다는 시점에서 아웃이다.
“얘얘얘! 잠깐만 왜 이렇게 서둘러?”
시우의 손목을 탁 잡은 마녀는 싱긋싱긋 살가운 웃음을 지었다.
예쁜 반달처럼 휘어진 눈동자에 광기에 준하는 탐구심이 숨어 있는 것을 본 시우.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랑 술 한잔하지 않을래?”
“아뇨, 이미 충분히 마셔서요.”
“너무 까칠한데?”
빼려했지만 꾸욱 힘이 들어간 마녀의 손은 수갑처럼 팔목을 붙들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단 말이야. 티페레트 공작이랑은 무슨 사이야? 이렇고 저런 사이?”
“저기요.”
“아무 사이도 아니면 나랑 놀아서 나쁠 것 없잖아. 응?”
엄청 질척거리네.
클럽 화장실 앞에서 헌팅 당하는 여대생이 된 기분이다.
좀 가라 좀.
“죄송하지만 금방 돌아가 봐야 해서요. 스승님이 기다리십니다.”
“스승님?”
“엘로아 공작님이요.”
“이름으로 막 부르네? 역시 가까운 사이 맞구나?”
마녀는 대부분 특유의 마이페이스를 지니고 있다.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해도 좋다.
드라마를 보면 금지옥엽으로 잘한 금수저 딸내미들이 까탈스러운 것처럼, 태어나서부터 마녀가 된 이후까지 떠받들어지며 살다 보면 특권의식 정도는 지갑처럼 가지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아닙니다.”
시우가 낮게 깐 목소리로 말하며 팔을 빼자 마녀는 딱 봐도 기분 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로 안 해도 ‘남자 따위가 튕겨?’라는 표정이었다.
“졸속으로 만들어진 돌연변이 따위가 싸가지 없긴!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대충 예상되는 루트로 사건이 흘러간다.
싸우면 이기려나?
본능적으로 승산을 점치던 시우.
그때.
“뭐라도 되지.”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비겁의 마녀를 죽인 남자니까.”
슈퍼모델처럼 훤칠한 키와 완벽한 비율.
찰랑이는 군청색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드레스.
여유가 넘치는 분위기를 숄처럼 휘감고 야경을 등진 키벨레 페리윙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