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1.
포탈을 이동하는 감각을 비유하자면 난기류에 덜컹이는 비행기에서 멀미가 일어났을 때와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추락하는 비행기에서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남을 수 있는 시우지만 문을 넘자마자 느껴지는 어지럼증에는 버틸 수 없어 철퍼덕 엎어졌다.
“으아….”
절로 곡소리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엘로아가 시우의 등을 조심스레 두드려주었다.
“시우, 괜찮은가?”
“이건… 진짜 적응이 안 되네요.”
“마력 감응력이 뛰어날수록 어지러움을 느낀다 하더군.”
“스승님은 완전 멀쩡하신데요?”
“후후, 제자 앞에서 몹쓸 꼴을 보일 정도로 느슨하진 않다네.”
엘로아가 건넨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녀가 보유한 무력이 비하면 굉장히 보들보들한 손.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피자 전에도 한번 봤던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출입국 관리소의 라운지.
문 연결되어 현세와 게헨나를 오가게 해주는 플랫폼이다.
이렇게 오는 게 두 번째 인가?
다시는 보게 될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새삼스러운 감회에 숨을 들이쉬자 5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맡아왔던 게헨나 특유의 냄새가 났다.
매연이나 미세먼지 따위는 없는, 그리고 이슬비가 내리는지 살짝 습기를 머금은 선선한 공기.
조금 더 정신을 차리자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마녀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엄청 부담스러운데.
그냥 바라보고 있는 정도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다들 부채나 손등 따위로 입가를 가리고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있다.
하긴 출입국 관리소에 유명 인사인 티페레트 공작이 웬 남자와 함께 나타났다면 저렇게 반응할 만도 할 것이다.
“…빨리 자리를 옮길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군.”
쓴웃음을 머금은 엘로아는 시우와 함께 출입국 관리소의 출구로 향했다.
그리하여 펼쳐지는 별로 그립지 않은 풍경들.
해안선 너머로 뻗은 거대한 문을 통과하면 항구에서 드나드는 화물선.
예상대로 흩어지는 안개비 사이로는 우의를 입은 남자들이 분주히 화물을 옮기고 있다.
누가 봐도 현대에서 건조된 화물선에서 컨테이너를 마법으로 내리고, 그 안의 물품을 다시 마차로 옮기는 모습은 꽤나 진풍경이었다.
“빨리 빨리해! 이 굼벵이 새끼들아!”
한편 거의 팬티차림으로 짐을 옮기고 있는 노예들 뒤로 관리자의 날카로운 채찍이 휘둘러졌다.
저걸 보니 새삼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아멜리아가 노예를 죽이려던 것을 끼어들어서 말렸었는데.
정작 저 사노예들이 모두 각국의 협약으로 게헨나에 보내진 사형수라니…
대부분의 국가는 어지간한 일로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만큼 깔끔한 징벌 시스템인지도 모른다.
선진국들은 막상 사형을 선고하고도 집행하지 않은 채 세금만 축내게 하는 경우도 많았으니 말이다.
“잠깐 출입국장을 만나고 와야 하는데. 주위를 둘러보고 있겠나?”
“알겠습니다. 편히 일 보고 오세요.”
“모르는 마녀가 말을 걸거든 함부로 따라가지 말게. 그리고 너무 많이 군것질하지 말게나. 게헨나에 돌아온 기념으로 요리를 할 예정이니 말일세.”
여느 때처럼 엘로아와 새끼손가락을 끼고 약속한 시우는 선착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생각외로 출입국에서 받았던 만큼의 관심은 오지 않았다.
다만 시우가 등에 짊어진 커다란 물건 -검은 리본으로 돌돌 만 붉은가지-만을 힐끗거리며 바라보았을 뿐이다.
하긴 시우를 뒤통수쳤던 라리사도 그랬고, 고등어가 된 표도르도 그랬고 ‘밀수꾼’들은 편하고 실용적인 현세의 복장을 선호하니 말이다.
지금 시우의 복장도 이 보더 타운에서는 딱히 위화감이 없을 뿐더러 안대까지 끼고 있으니 더욱 그쪽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여기도 여전하네….”
밀수꾼들끼리 모여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그렇고.
저 멀리 지붕에 판넬이 얹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도 그렇고.
접선소에서 흥정하다 싸움 붙은 상인끼리 멱살을 잡는 것도 그렇고.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고 제 갈 길 가는 마녀의 모습도 그렇다.
“어? 저거.”
저 멀리 샤론이 도토리를 일제히 성장시켜 파괴해버린 구름버섯 빌리지도 얼핏 보였다.
저기 소피아의 별장에서 아멜리아랑 하룻밤을 묵을 뻔했었지.
라리사 일당이 아멜리아를 납치하려 들었던 누운뱀 쉼터도 저 멀리서 성업중이고…
우당탕탕 좌충우돌 게헨나 탈출기가 떠오르자 괜스레 심경이 복잡해졌다.
태생이 현재에만 집중하는 타입이라 현세에 있는 동안은 게헨나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돌이켜보자면 꽤 힘든 나날이었다.
의식주 모두 편치 않았던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자칫 심기를 거스르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가장 컸다.
5년이다.
청춘 중 가장 빛나야할 시기를 직접 선택한 게헨나 행도 아닌데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했으니까.
그뿐이랴?
5년간 시우를 시달리게 했던 것은 아멜리아의 괴롭힘.
말년에 아멜리아가 변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눈에 보이기만 하면 갈궈대는 상사 그 자체였다.
그래서 아주 나쁜 감정만 고스란히 남아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그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아멜리아의 변덕스러움이, 감정표현이 미숙한 그녀의 서툶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닭꼬치 집 아주머니는 잘 계시려나?”
2+1 행사를 해줬던 아주머니.
군것질하지 말라고 했으니 잘 계시는지 얼굴이라도 볼까 싶어 좁디좁은 골목을 누비던 시우.
-퍽!
잠깐 부주의했던 탓인지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하긴 두 명이나 편히 지나가기에 온갖 박스가 쌓여있는 이 골목은 너무 좁았다.
“눈깔은 어디에 두고 다녀 씹새야.”
교통법상 정면 추돌은 쌍방과실일 텐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튀어나오는 상대방의 욕설.
시우는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마약 중독자의 것처럼 희게 번들거리는 사백안.
얼굴 정중앙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흉터와 빡빡 민 스킨헤드.
그리고 영체 도핑러 시우 못지않게 울퉁불퉁한 근육을 지닌 딱 보기에도 사노예였다.
“아, 미안합니다.”
예전이라면 눈만 마주쳤어도 벌벌 떨 것 같은 뒷골목 양아치였지만 인제 와서는 우스운 상대였다.
마력 같은 거 안 써도 별로 어렵지 않게 때려눕힐 수 있다.
“이 새끼 봐라?”
하지만 태연한 시우의 반응이 도발로 비쳤던 것인지 양아치 노예는 입술을 비틀며 시우의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굳이 드잡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물컹물컹한 진흙탕 위라면 내리꽂아도 죽지는 않겠다 싶어 맞대응하려는 때.
“어이! 잭! 농땡이 피우지 말고 빨리 와!”
아마도 노예 관리자의 것으로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잭이라고 불린 남자는 시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니 얼굴 기억했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골목을 빠져나간다.
“뭐야 저 병신.”
꽤 가소로운 협박이다.
다시 만나게 될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고.
행여 다시 만나서 덤벼든다 한들 하품하면서 웃어넘길 수 있는 적의 협박이라.
“마음이 편안하네.”
다른 공적이나 호문쿨루스도 이랬으면 좋겠다.
시우는 적당히 타운 내부를 둘러보다가 볼일을 끝낸 엘로아와 합류했다.
양아치와의 시비는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2.
시우가 리본으로 왜곡장을 차폐하기 전까지 미뤄진 게헨나 입국.
언제까지 걸릴지 확신할 수 없어서 제머나이 가문에도 샤론에게도 딱히 알리지는 않았다.
공연히 기다리거나 헛걸음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그리하여 차폐식이 완성되자마자 불쑥 방문이었는데 이게 웬걸.
타이밍이 그리 좋지 않았다.
“스승님, 포탈이 점검 중이랍니다.”
“점검?”
기껏 지그재그로 난 절벽 길과 계단을 올라 보더타운의 플랫폼까지 향했는데.
애석하게도 정기점검이 내일 오후 중에나 끝난다고 한다.
접수원은 ‘요새 들어 점검이 잦아요’ 같은 한탄까지 하며 괜찮은 숙소 몇 곳을 일러주었다.
자기 이름으로 왔다고 하면 싸게 해줄 거라 말하며 말이다.
아마도 숙박업소에서 리베이트를 받아먹지 않을까?
“네, 마차를 수배해 볼까요?”
“그럴 것까지 있겠나? 근처 숙소를 예약해 봄세. 아, 혹시 급한 사정이 있다면 곧장 가긴 하겠네만…. 나는 조금 더 둘러보고 싶어서 말이네.”
“음, 그건 괜찮을 것 같네요.”
정 급한 일이라면 마차를 수배할 것도 없이 열심히 달려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조금 둘러보고 싶다는 스승님의 요청까지 무시하면서까지 급한 일은 없었다.
그다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엘로아는 아직도 그날 벌였던 무리한 싸움의 후유증을 달래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인근에서 가장 큰 여관 ‘누운 뱀 쉼터’로 향했다.
인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숙소이긴 해도 별로 좋은 기억이 남은 곳은 아니라 피하고 싶었지만…
접수원의 영업이 무색하게 다른 여관은 자리가 없었다.
여전히 성황리에 운영 중인 보더타운 숙박촌이었다.
“포탈이 맛이 가서 그런지 많이들 남았나 보네요.”
“출입국장에게 몇 가지를 전해 들었다네. 근래 현세의 소란을 피해 게헨나로 되돌아온 마녀도 많다더군.”
“어쩐지 묘하게 마녀도 많더라니….”
오랜만에 본 여관이지만 외관은 여전하다.
골조는 벽돌로, 실내는 목조로 지어진 3층 건물.
1층은 술과 음식을 판매하는 주점으로, 2층부터는 숙소로 제공된다.
“여기 밖에 없네요…. 제 기억상 그렇게 근사한 곳은 아니었는데.”
“걱정 마시게. 한참 사냥 다니던 때는 노숙하는 때도 흔했다네. 침대가 있다는 게 어딘가?”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는 장소였던 만큼 꾸물거리다 삐걱이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영화를 보던 중 스피커 볼륨을 확 키워버린 것처럼 시끌벅적한 소음이 흘러넘쳤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자욱한 담배 연기와 술 냄새는 덤이다.
“밤새 죽기만 할거요?”
“남이사 죽든 말든. 언제 나 죽었다고 부조금 내셨소?”
술판에 당연지사 껴있는 도박꾼들이 은근한 신경전을 하는 것도 보이고.
“허허, 말세네 말세야.”
“이러면 또 주류 반입이 힘들어질 것 같은데.”
“요즘 누가 돔페리뇽 같은 어중간한 술을 들여오는 거야?”
“레노먼드 타운에 새로운 술집이 생겼다는데?”
보더 타운에서 신문 역할을 대신하는 ‘카나르(canards)’를 보며 심각하게 머리를 맞댄 상인들도 보이고.
“이것 좀 드셔보세요! 아주 달고 맛있는 열대 과일이에요!”
허리에 주렁주렁 파인애플을 달고 손님들에게 한 조각씩 권하는 소년도 보인다.
…마지막 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무튼 전에 왔을 때와 비슷했다.
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주점의 구석진 곳에 대여섯 명의 마녀가 한 자리씩 꿰차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 소음이면 눈치를 주거나 역정을 낼 법도 한데 하나같이 주변에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고 제 할 일을 하는 중이다.
확실히 게헨나에 마녀가 많아지긴 한 모양이다.
이런 허름한(마녀 기준) 여관까지 사람이 들어찰 정도면 말이다.
“…오우.”
하지만 시우와 티페레트가 들어서는 순간 상황이 일변했다.
별 다른 관심이 없이 엘로아를 힐끗거리기나 하는 일반 시민들과 달리, 자리에 앉아 있던 마녀의 시선이 일제히 시우와 티페레트에게 꽂힌 것이다.
거기에는 더는 권태감이나 귀찮음 따위가 엿보이지 않았다.
대신 경악, 호기심, 탐구심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마치 사생팬이 사석에서 덕질하는 아이돌을 발견한 그런 눈빛이었다.
“신경 쓰지 말게나. 옆에 내가 있지 않은가?”
“네, 뭐. 크게 신경은 안 씁니다.”
그런 시우의 등을 엘로아가 슬쩍 어루만져주었다.
여관 주인에게 돈을 건넨 엘로아는 조식을 포함한 하루 숙박비를 지불하고 시우와 함께 2층 객실로 올라섰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눈으로 좇던 마녀들.
제각기 앉아 있던 마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한다.
도저히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논의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던 것이다.
“내, 내가 방금 뭘 본거지?”
“마녀는 티페레트 공작이었고 옆에는 그 유명한 남자 마녀인가?”
“둘이 여관에 왔네?”
“방도 하나만 예약한 것 같던데.”
“어머머머, 설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은 광경을 해석하기 위해 마녀들은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