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1.
루시 예소드 백작은 게헨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갑부이다.
다소 놀거리가 부족한 심심한 게헨나에서 온갖 유흥시설, 편의시설 및 숙박시설의 집합체인 호화욕장을 운영하며 부유한 마녀들을 대상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그렇게 쌓은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현세까지 사업을 확장하며 각종 테마파크를 기획 및 건설하는 사업을 세계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현세 사업에 관심이 많은 제머나이 백작과 종종 만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적당한 절충안 같네요.”
“같은 마녀끼리는 이야기가 잘 통한다니까요? 현세에서 숫자놀음 하는 양반들은 무슨 그리 의심이 많은지.”
“그럼요, 방향은 다르다 해도 같은 길을 추구하잖아요? 저희 마녀들은.”
알비레오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계약서 사본을 탁탁 정리해 봉투에 넣었다.
내년 말부터 홍콩에 새롭게 세워질 대규모 테마파크에 관련해 두 백작가 간 협업조약이 적힌 서류였다.
물론 두 마녀가 사업의 상세한 부분까지 직접 협의하지는 않는다.
사업에 관련된 지침을 전달하면 두 기업이 협약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조율을 하고 진행할 것이다.
그러니 두 마녀가 상의한 내용은 엄밀히 말하면 현세가 아닌, 게헨나와 관련된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들려오는 소문이 있다.
케테르 공작이 더는 현세의 일에 관여하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출처 미상의 정보다.
사실 이 자체는 한 50년 주기로 뜸해질 때마다 들려오는 헛소리였다.
케테르는 그때마다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던 마녀를 단죄함으로써 구설수를 잠재웠다.
하지만 근래에 벌어진 사건은 경우가 다르다.
비겁의 마녀가 소란을 일으켰음에도 공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안일하게 묵인하기에는 벌써 몇몇 공적의 무차별적인 사업확장과 추방자들이 소란이 포착되었다.
이에 맞춰 혼란스러운 마녀 사회의 정세를 바로 잡고자 미뤄두었던 사업을 추진하려 했다.
위치포인트의 설립을 반대하는 중국공산당의 입김을 피해 상대적으로 공산당의 개입이 덜한 홍콩 란터우섬에 테마파크를 겸한 위치포인트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귀족’이라는 명예를 짊어지는 자들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인 까닭이다.
현세에 혼란이 도래하면 그 소란은 머지않아 게헨나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으니 말이다.
“제머나이의 번영과 영화를 위하여.”
“예소드의 초월과 승화를 위하여.”
서로의 가문과 성에 대해 예우를 표하며 논의를 끝낸 두 백작은 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했다.
각자 챙겨갈 것들을 만족스럽게 챙겼기 때문인지 두 백작의 입가에는 미소가 서렸다.
사업 얘기가 끝난 알비레오는 물끄러미 테라스 아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여전하네요. 디아나 양은.”
“보면 알잖아요.”
회담이 이루어진 장소는 레바나 대욕장의 프라이빗 별장.
그 중에서도 드넓은 야외 욕장이 내려 보이는 테라스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커다란 초승달 모양을 그리는 풀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한 견습마녀가 보였다.
스승인 예소드 백작처럼 잿빛 머리카락을 위로 묶고 비키니를 입고 있다.
튜브가 부착된 선베드를 물 위에 띄워놓고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옆에는 술병을 둔 채 한껏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다.
“하아….”
고아하던 예소드 백작의 이마에 주름살이 생겼다.
아름다운 외모에 백작이라는 높은 작위.
학회에서 인정받을 정도로 높은 연구 성과를 보인 22 위계의 백작.
마녀로서 이룰 수 있는 영화를 모두 이루고 계승을 앞둔 ‘루시 예소드’ 백작의 최고의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그녀의 견습마녀 ‘디아나 예소드’였다.
“가끔은 당신이 부러워 죽겠어요.”
예소드 백작은 가감 없이 한숨을 쉬며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쌍둥이들은 스승님 말도 참 잘 듣는다는데… 디아나는 왜 저렇게 속을 썩이는지….”
“쌍둥이와 하루만 피크닉에 다녀오시면 나름의 고충이 있다는 걸 아실 텐데요. 저는 오딜과 오데트가 디아나 양처럼 얌전했으면 좋겠다고 종종 생각한답니다.”
알비레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투덜거림에 응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한 지금도 쌍둥이들과 함께 있으면 기가 쭉 빨리는 느낌인데…
과연 점잖은 예소드 백작이 대응할 수 있을지.
“차라리 까불거리면서 시끄러운 게 낫죠. 그래도 스승님 말이라면 껌뻑 죽잖아요. 저 녀석은 누굴 닮았는지 원…”
디아나는 견습마녀 중에서도 빼어난 수재였다.
마녀의 피를 잇고 태어나 머리 회전이 비상한 견습마녀 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보였다.
계승까지 예정되었던 기한을 단축해 모든 준비를 3년 전에 끝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지금 쌍둥이들은 뭘 하고 있나요?”
“이 시간쯤이면 에버그린 마녀의 원소 특강을 듣고 있겠네요.”
“거봐요, 그래도 시키는 건 다 하잖아요. 저 녀석 보시겠어요? 오늘 아침부터 저러고 있어요.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제 속이 터지겠어요? 안 터지겠어요.”
그러나 똑똑하고 총명하고 예쁘기까지 한 디아나에게 가장 큰 문제점이 있었으니.
예소드 백작도 두손 두발 든 희대의 게으름뱅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제가 옆에 있으니까 닦달하면 하는 척이라도 하는데 제가 없으면 어떻게 될 런지…”
루시는 엄지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안 되겠어요. 오늘은 단단히 혼쭐을 내줘야겠어요. 같이 가 주시겠어요?”
“제가요?”
“네, 제가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니 옆에서 좀 거들어주실 수 있나요?”
“그 정도라면야….”
루시는 벌떡 일어나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알비레오를 대동한 채 풀장으로 내려갔다.
디아나는 제 스승이 오건 말건 유유자적 물 위를 떠다니며 독서 중.
루시는 숨을 고르더니 엄하고 기품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딸!”
“…!”
갑자기 들려온 노호성에 화들짝 놀란 디아나가 툭 책을 풀장으로 떨어뜨렸다.
옆을 바라보자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스승과 제머나이 백작의 모습이 보인다.
디아나는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알비레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독서 삼매경 중이라 오신 줄 몰랐어요.”
“아니에요. 편히 있으세요.”
쌍둥이보다 한 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외양.
물에 젖지 않도록 위로 묶은 잿빛의 머리카락.
어두운 머리색과 다르게 토파즈처럼 빛나는 주홍색의 눈동자는 과연 마녀의 품위에 걸맞게 아름답다.
퇴폐와 청초라는 정반대의 느낌을 절묘하게 배합한 디아나는 가시가 돋친 것 같은 분위기와 정반대로 나른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오늘은 언제까지 빈둥거리나 지켜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서 왔단다!”
“그치만 오늘 공부는 이미 끝났는걸요?”
가시 돋친 루시의 질책에도 디아나는 태연하기 그지없다.
“누가 공부가지고 그러니? 엄마가 공부 끝나면 좀 나가서 친구도 만들고! 산책도 하고! 그러라고 했잖니!”
“친구는 귀찮은데….”
“너 여기 계신 분이 누구인지는 알지?”
“물론요, 알비레오 제머나이 백작님이시잖아요.”
“그래! 백작님 따님들은 승마도 하고! 악기도 배우고! 사냥도 하고! 독서회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는데 너는 왜 이러니 정말…!”
디아나는 단순히 말로만 끝낼 상황임이 아님을 직감하고 슬쩍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마력을 방출해 물 위를 참방참방 걸어오더니 정자세로 섰다.
“걱정 마세요. 저도 이제 제 앞가림은 할 수 있는걸요. 오늘 공부했던 내용인데 보실래요?”
“…내놔 봐!”
디아나는 풀장 근처의 가방에서 주섬주섬 문제집을 꺼내 들었다.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며 그 내용을 확인하는 루시.
디아나는 슬며시 눈치를 보더니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설명이라기보다는 언제나 통하는 필살기에 가까웠다.
“오늘은 엄마가 예전에 쓰셨던 논문을 제 나름대로 분석해봤어요. 물론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아름다운 법칙이었어요.”
“…….”
“아라베스크처럼 엮인 역장의 신묘한 균형, 오묘한 이치의 배합에서 마법적 효용성은 물론 뛰어난 미적 가치를 느꼈어요.”
“…….”
“그렇게 높은 수준의 글을 읽었더니 도저히 나머지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더라구요. 그래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면서 하루종일 사색했어요.”
“…….”
-팔락 팔락
마지막까지 디아나의 논문 분석을 확인한 루시.
디아나는 팔을 뻗어 어미 새의 품을 파고드는 새끼 새처럼 슬며시 안겼다.
“엄마 정말 존경해요. 저도 꼭 엄마를 닮아서 멋진 마녀가 되고 싶어요.”
“…….”
뒤에서 지켜보는 알비레오가 보기에도 뻔히 속이 보이는 아부였다.
대신 얼굴이 화끈할 지경으로 말이다.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있는 루시의 귓가에 작은 악마처럼 속삭이는 디아나.
“오늘 저녁 먹고 산책도 할게요. 30분 이상. 꼭이요.”
-구깃!
디아나가 제출한 종이를 쥔 루시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단단히 화났구나.
알비레오는 지레짐작했다.
만약 쌍둥이가 사고를 쳐놓고 저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다면 알비레오는 기꺼이 10장의 반성문을 작성하게 할 의향이 있었다.
“…우리딸…!”
“어라?”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똑한지는 모르겠네! 하긴 그때 발표했던 논문이 진리진명 학술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긴 했지! 이 부분은 어땠니? 현실의 개념을 왜곡하는 역장의 영향력과 통제! 이 부분!”
“어… 그 부분은 잘 이해는 못 했지만 내일 꼭 다시 한번 살펴볼게요.”
“그래그래, 그러렴. 어휴! 코도 예쁘고 눈도 예쁘고 입술까지 이렇게이렇게 귀엽고! 엄마는 우리 디아나가 자랑스러워요!”
“네, 저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러워요.”
루시는 팔을 활짝 벌리고 디아나를 꼭 껴안았다.
자매로밖에 보이지 않는 두 모녀의 뜨거운 재결합을 알비레오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바라보았다.
체통 없는 모습임을 알면서도,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리 오렴. 괜히 혼내서 미안했단다…. 엄마가 너무 마음이 조급했나 봐.”
“아니에요, 엄마. 다 절 사랑해서 하신 건데요.”
“엄마는 우리딸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지….”
“저도 엄마 사랑해요.”
알비레오는 여전히 루시의 품에 폭 안겨있던 디아나의 한쪽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디아나가 금세 지워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못 본 셈 치자.
그렇다.
루시 예소드가 디아나의 나쁜 습관을 전혀 고치지 못한 이유.
그녀는 게헨나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자임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딸바보였던 것이다.
“기특한 우리 딸. 오늘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엄마가 사 올게.”
“전에 보더 타운에서 사 오셨던 과자 먹고 싶어요.”
“도리토스?”
“네, 그거요.”
“우리 딸이 먹고 싶다는데 엄마가 다녀와야지. 보더 타운까지 금방 다녀올게! 잘 쉬고 있으렴!”
“네, 나쵸 치즈 맛으로.”
“그래! 알았다!”
태연자약하게 맛까지 정해주는 디아나와 좋다고 가벼운 발걸음이 되어 포탈 쪽으로 향하는 루시.
제대로 된 인사도 잊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저 정도면 딸바보가 아니라 딸등신이 더 적합한 표현같다….
라고 알비레오는 남몰래 생각했다.
1.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렷다.
적을 상대하기 전에 적을 알고 자신을 알면 승리한다는 유명한 공식은 비단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쟁터의 얘기만이 아니다.
사랑싸움 역시 보이지 않는 창과 치정의 혈흔이 난무하는 비정한 전쟁터라는 것을 쌍둥이는 시녀들에게 주입받았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어요.”
말라비틀어진 올리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처럼 빡빡한 스케쥴의 살인적인 수업.
샤론은 여느 때처럼 과제를 내주고는 살 떨리는 강의실을 나서려 했다.
이제는 쌍둥이의 프레셔도 적응이 된 지라 매번 이 정도로 도망치듯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샤론의 촉은 비 냄새를 맡은 짐승처럼 폭풍전야를 느꼈다.
따라서 황급하게 자리를 뜨려는 것이다.
“에버그린 선생님.”
그런 샤론의 뒷덜미를 콱 움켜잡는 오데트의 부름.
샤론은 떨리는 눈동자의 영점을 재조준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질문이 있나요?”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그 목소리는 서릿발이 돋친 것처럼 차갑고 싸늘하다.
하지만 쌍둥이는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수업만 나가느라고 하나도 쉬지 못했잖아요.”
“맞아요, OT도 휘리릭 지나가 버려서 샤론 언니랑 제대로 대화도 못 해봤어요.”
샤론 언니?
듣던 중 반가운 호칭이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용건 위주의 대화가 아닌, 제법 친밀함을 도모하고자 하는 쌍둥이의 말투에 샤론은 반색이 되었다.
심약한 샤론은 어떻게 이 살얼음판 같은 강의를 5년 동안이나 하지? 라고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것이다.
“그, 그래요?”
“네! 저희 이 수업 이후에 아무런 일정도 없거든요.”
“샤론 언니만 괜찮으시면 술을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좋은 와인을 준비해 왔거든요!”
샤론은 잠깐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것만 내려놓고 금방 갈게요. 어디로 갈 건가요?”
“멀리 가실 필요 없어요.”
“바로 이 앞이거든요.”
다소 어리둥절했던 샤론은 쌍둥이의 안내를 받고 나서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멀리 가지 않았다.
강의실 앞에 떡하니 주차되어 있던 마차가 술판을 위해 준비된 자리였으니 말이다.
“어서 들어오세요.”
처음에는 ‘술을 마차에서 마신다고?’라고 생각하며 의아해했던 샤론.
하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그 의문은 쏙 들어갔다.
문짝에 두 마리의 새가 음각된 마차는 겉보기에도 호화스러웠지만 내부는 샤론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지면에 고정된 건축물도 아닌 움직이는 마차에 걸려있는 공간 왜곡 마법.
더군다나 어지간한 살롱 하나를 욱여넣은 내부 공간을 지탱하기 위해선 필시 경량화 마법도 걸려있으리라.
제머나이가의 능력을 과시하는 듯한 마도구 공학의 집합체였다.
“어서요!”
살갑게 샤론을 재촉하는 쌍둥이의 반응에 샤론도 마차에 발을 들였다.
-탁!
닫히는 문.
쌍둥이는 오도도 각기 좌우로 달려가더니 오딜은 와인 병, 오데트는 치즈 따위의 간단한 안주와 잔을 준비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파 가운데 테이블에 약소한 술자리가 펼쳐졌다.
“역시 제머나이 가문은 대단하네요.”
“샤론 언니! 여기는 완전히 사석이니까 말씀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맞아요, 좋자고 만든 자리인걸요!”
“그래? 그럼 그럴까?”
““네!””
전처럼 살갑게 다가오는 쌍둥이의 모습에 샤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가벼운 와인 개봉식.
공장식이 아닌 와인 장인이 모든 주조과정에 관여해 수작업하는 게헨나이지만 그 퀄리티는 굉장히 우수하다.
따라서 침전물을 걸러주는 별도의 디캔팅 없이 어여쁜 보석 색 와인이 잔 안에 졸졸 담겼다.
“이게 그거에요 그거. 멘델 구릉에서 나온 포도로 만든 72년 산!”
“저희가 용돈 모아서 사 왔어요!”
“그것도 세 병이나!”
멘델 구릉의 포도주는 일반 시민들의 연봉을 호가한다.
그게 용돈 모아서 살 수 있는 레벨인가?
이 마차도 그렇고 새삼 쌍둥이와 자신의 재력 차이를 느낀 샤론.
너무 자존감이 낮은 탓일지는 몰라도 이런 거 하나하나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건배!”
“건배!”
그래도 모처럼 좋은 자리.
괜한 자격지심에 부끄러움을 느낀 샤론은 쌍둥이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누며 와인을 쑥쑥 비워나갔다.
처음 대화 내용은 주로 공부에 관련된 것이었다.
샤론은 혹시 쌍둥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 물었고, 쌍둥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간 차마 질문하지 못했던 내용들에 관해서 대화를 나눴다.
그래!
이런 걸 원했어!
추측 상 연적 관계라는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쌍둥이와 사이 나쁘게 지내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샤론이다.
“저기, 샤론 언니.”
“응? 아직 잔 다 안 비웠는데.”
“그게 아니라요.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아직도 물어볼 게 남았어? 그러게 수업 때 재깍재깍 좀 물어보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귀여운 쌍둥이의 질문을 들어주려던 샤론.
“샤론 언니는 조수님이랑 무슨 관계에요?”
그러나 이어진 오딜의 질문에 샤론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대화란 비단 그 내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발화의 타이밍, 어조, 상황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딜의 질문은 샤론에게 매우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질문이었다.
또한 불쾌한 질문이기도 했다.
샤론과 시우를 갈라놓으려고 했던 장본인이 누구인가?
스승에게 부탁까지 하면서 조건을 제시했던 쌍둥이다.
더군다나 요 며칠 새의 수업에서는 무언의 압박을 넣으며 샤론이 눈치 보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구태여 모르는 척 묻는 의도는 무엇인가?
결코 좋은 의도로 생각되지 않았다.
“…뭐?”
똑똑히 들었음에도 차게 되묻는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기 때문임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친해지려고 부른 줄 알았는데.
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부른 줄 알았는데.
너무 어리숙한 생각이었다.
이 자리는 가가소소 웃음을 나누며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니라.
심문과 경고를 위해서 마련된 자리인 것이다.
드라마에서 남주의 썸녀를 찾아온 전 여친이 단둘이 술자리를 주선한 것처럼 말이다.
“궁금해서요! 저번에 만났을 땐 마법을 가르쳐주고 숙식을 제공받는 친구라고 하셨는데.”
“그때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났으니까요! 아직도 여전히 친구인가요?”
쌍둥이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연이어 압박을 가해왔다.
진짜 너무하다.
굴욕적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서고 싶다.
하지만 꾸욱 화를 삼켰다.
어차피 5년만 참으면 된다.
길고 긴 마녀의 삶에서 5년이란 어찌 보면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다.
“후우…. 그건 개인적인 이야기니까 해줄 수 없을 것 같아.”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샤론.
“궁금한데….”
“그냥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해 시무룩해 하는 목소리였지만 한껏 불편함을 느끼고 있던 샤론에게는 도발과도 같은 발언이었다.
샤론은 다시금 숨을 들이쉬었다.
화를 삭이기 위해서 하는 심호흡이었다.
와인잔을 냉수처럼 들이켜며 원샷했다.
와인을 주조한 장인이 본다면 몹시 속상해할 광경이다.
“그냥 친구 아니야.”
그리고 술김에 홧김에.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섹스하는 친구 사이야.”
어떠냐!
샤론도 밟으면 꿈틀한다!
지속적인 국지도발을 참지 못하고 반격한 샤론.
쌍둥이가 원하는 바는 앞으로 시우와 거리를 둬 자신들이 들어갈 틈새를 찾는 것.
어차피 외압으로 애매모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면 차라리 압도적인 우위를 내세워 기를 죽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쌍둥이는 견습마녀이니 만큼 섹스는 못할 테니까.
사실 잘 모르겠고, 가슴이 그러라고 시키고 있었다.
“…….”
“…….”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쌍둥이의 반응과 표정은 완벽한 싱크로를 자랑했다.
동시에 눈이 땡그래지더니 입도 같이 쩍 벌린다.
경악으로 굳어있던 오데트가 덜덜 떨리는 턱으로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세…섹스…?”
“알려줬으니까 됐지?”
샤론은 그 모습을 보며 내심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샤론과 쌍둥이 간에는 다소 오해가 있었다.
미묘하게 적대적인 쌍둥이의 평소 태도.
단순히 ‘좋은 짝을 얻을 기회를 줘보고 싶다’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알비레오의 무지막지한 보상.
이를 바탕으로 알비레오 백작의 개입이 쌍둥이의 부탁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놀리듯이, 혹은 은근한 압박을 가하듯 시우와의 관계를 캐물으니 참으려 했던 샤론도 가만히 있을 수 없던 것이다.
반면 쌍둥이.
오딜과 오데트는 전속 시녀들을 참모장으로 고용해 이 복잡 난해한 세태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그 결과 나온 솔루션은 ‘우선 무슨 관계인지를 명확히 하자’, ‘현재까지는 물증이 부족하다’라는 신중론이었다.
사실 단순히 과제를 많이 내준다거나 수업을 빡빡하게 진행한다고 해서 그것을 ‘교전 의사’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니까.
따라서 오늘 술자리를 따로 마련한 것은 딱히 싸우자는 게 아니었다.
적당한 조율 및 탐색을 위한 한 걸음이었다.
그러니까 쌍둥이로선 샤론이 과제와 폭풍 진도러시로 은근한 견제를 해오길래,
견제 겸 탐색용 냥냥 펀치를 날렸더니,
뒷골까지 아찔해지는 전력 백스핀 엘보우가 턱을 돌려버린 셈이다.
혀끝이 저릴 정도의 충격에 스턴 상태이던 쌍둥이.
하지만 의식을 되찾는 것은 빨랐다.
서로 눈빛을 교환할 것도 없이 동시에 깨닫는다.
역시 샤론 언니는 조수님을 노리는 확실한 주적이라는 것을!
“아하, 그러시구나….”
오딜은 분노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태연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액화 상태인 니트로글리세린이 졸졸 흐르는 것만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샤론 언니도 솔직하게 말해주셨으니까… 저희도 특별히 정보를 공유해 드릴게요.”
“어, 언니…! 그건…!”
다소 이성이 남아있는 오데트가 황급하게 오딜을 말리려 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오딜은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샤론이 앉은 소파를 가리켰다.
“지금 샤론 언니가 앉아 계신 소파에서 조수님이 제 처음을 가져갔었는데…. 후후, 지금 생각해보면 다 추억이네요. 아주 뜨거운 추억.”
“뭐…뭣…?”
이어진 오딜의 반격.
전력을 다한 드롭킥 급의 충격이 샤론의 머리를 띵 울린다.
하지만 그 말에 어폐가 있음을 깨닫는다.
어차피 쌍둥이는 견습마녀.
성교를 했다면 그릇이 망가지게 되니 그런 일이 가능할 턱이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샤론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래?”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네요.”
“응, 너희는 견습마녀이고… 네 말은 거짓말일 테니까.”
“언니, 안 돼! 그건 아니야!”
조수님과의 불장난은 쌍둥이들만의 비밀이다.
스승님조차 모르는 위험한 비밀 말이다.
단순히 기 싸움에서 이기겠다고 사용하기엔 너무 위험한 단서이자 정보였던 것이다.
여차하면 샤론이 이런 사실을 스승님께 일러바칠 리스크가 있다.
“우욱….”
오딜도 퍼득 그것을 깨달았는지.
입술을 꾹 깨물고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밀어 넣었다.
이곳은 더는 넓고 호화로운 마차 내부가 아니었다.
세 마리의 맹수를 좁디좁은 케이지에 밀어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쉽네요. 샤론 언니랑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는데.”
“누가 할 소리.”
마지막까지 첨예한 눈빛으로 대립하던 샤론과 오딜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와인잔을 동시에 집어 들고 벌컥벌컥 마신 다음.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조수님은 절대 양보하지 않을 거예요!”
“그, 그건 저두요!”
냉엄하게 선언하는 오딜과 뜻을 모아 끼어드는 오데트.
“나도! 잠자코 당하지만은 않을 거야!”
샤론과 쌍둥이의 보이지 않던 냉전이 가시적인 전면전으로 번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