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89화 (289/917)

#288

1.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쌍둥이는 새로이 등장한 연적 샤론 에버그린을 견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을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1) 샤론 언니 앞에서 원숙한 견습마녀의 모범을 보이며 기죽게 만들기.

2) 바꿔치기를 통해 골탕 먹이기.

3) 수업 중에 빤히 바라봐서 부담스럽게 만들기.

제법 까다로운 견제구라며 자화자찬하던 쌍둥이였지만…

하지만 어젯밤 자기 전 대화를 나누며 문득 알아차려 버리고 말았다.

대화의 발단이 된 것은 오데트의 발언이었다.

“언니, 근데 이렇게 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응? 뭐가 달라지냐니?”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샤론 언니를 견제해도 잘 생각해보면 별로 의미가 없지 않아?

바꿔치기는 눈치 못 채면 어차피 거기서 끝이고… 우리가 모범적인 견습마녀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샤론 언니가 조수님을 안 만날 리도 없고… 수업에서 빤히 바라보는 건 그냥 집중해서 수업 듣는다고 생각하고 끝인 게 아닐까?”

“어라?”

지금까지는 ‘뭔가 하고 있다!’라는 사실 자체에 들떠 자기 객관화가 부족했던 쌍둥이들.

오데트의 정확한 지적은 두 쌍둥이가 밤새 잠자리를 뒤척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렇게 밤새 향후 방책과 지침을 논하며 반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오딜과 오데트.

“오딜 님, 오데트 님. 기상하실 시간입니다.”

여느 때처럼 기상 시간이 되자 갈리나 시녀장이 칼 같은 걸음걸이로 척척 들어왔다.

뒤따라온 4명의 시녀가 창을 열어 환기해주고, 밤새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고, 슬리퍼를 신겨주는 것까지 평소대로의 일상이다.

“하아암…!”

“흐아아아암…!”

“그럼, 오늘 일정에 대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늦은 시각까지 계속된 토론 탓에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하품을 하며 머리가 빗겨지는 채로 오늘 일정을 보고 받는 쌍둥이.

몸을 씻은 뒤 꽃단장을 하고 아침부터 켈빈 선생에게 피아노 강의를 받는다.

이후에는 점심시간 전까지 독서회.

이후에는 무시무시한 샤론의 다섯 시간짜리 강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오늘 벽난로와 굴뚝 수리 건으로 타로 타운에 가게 될 예정이라 나머지 일정은 레나의 지시를 따라 움직여주시길.”

“하암… 알았어, 갈리나 잘 다녀와!”

“흐아암… 안녕히 다녀오세요.”

시녀장이 저택을 비운다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방을 정리하던 페챠, 레나, 베라, 마샤의 눈이 일제히 빛났다.

거의 유일하게 시녀들을 관리감독하는 갈리나가 자리를 비운다는 건 견습마녀 쌍둥이를 마음껏 귀여워하며 수다를 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레나! 꼭 일정대로 움직이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벌써 웃음꽃이 피려는 레나를 보고 한숨을 푹 쉰 갈리나였다.

2.

그리하여 매일 아침 고정 일과인 목욕시간.

원래 목욕 시간은 1시간으로 정해져 있지만 레나는 과감히 아침 식사를 생략하고 그 시간을 2시간까지 늘렸다.

이유라 하면 당연히 쌍둥이들과 장난을 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갈리나가 없다 하더라도 저택에서 시시덕거리다가는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많으니 말이다.

마침 전속 시녀들과 상담이 필요했던 쌍둥이로서도 썩 기꺼운 상황이었다.

“레나, 질문이 있어.”

“네네, 뭐든지 물어보세요. 멋지고 늠름하신 오딜 님!”

“페챠, 저도 있어요.”

“네네, 뭔가요? 상냥하고 귀여운 오데트 님!”

목욕 의자에 앉은 쌍둥이 뒤에서 열심히 샴푸를 해주던 레나와 페챠.

능숙하게 두피를 마사지하는 손길에 얼굴이 발갛게 익어가던 쌍둥이는 어젯밤 둘을 끙끙 앓게 했던 희대의 난제를 시녀들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갑자기 등장한 사랑의 라이벌 샤론 언니와 그런 샤론을 견제하기 위해 사용했던 작전에 대해서 말이다.

네 명의 시녀는 부지런히 오딜과 오데트의 몸을 씻기며 쌍둥이의 말을 경청했다.

“그게 전부인가요?”

“응, 아무튼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견제를 해왔는데.”

“생각해보니까 별것 안 한 게 아닐까 싶어서요.”

“너희는 그래도 연애에 일가견이 있으니까 좀 물어보고 싶어.”

“우선 다음 계획은, 샤론 언니한테 적정량보다 물을 조금 더 넣은 맛없는 홍차를 드리려구요.”

한창 연애에 관심 있을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이다.

저택 내 사용인 간의 연애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여느 직장이 그렇듯이 실제로는 꽤 많은 러브라인이 존재하고 연애 서적도 꼼꼼히 읽은 만큼 나름의 관련 지식이 빠삭한 것이다.

“…….”

오딜과 오데트의 말이 끝나자 동시에 침묵하는 시녀들.

“뭐, 뭐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저희 뭔가 실수한 건가요?”

갑작스러운 정적에 어리둥절하는 오딜과 오데트 심지어 머리에 잔뜩 거품이 일어있어서 눈을 뜨고 상황을 확인할 수도 없던 때…

“꺄아아아! 오딜 님 너무 귀여워요.”

“역시 오딜 님이야! 엄청 허당 같아서 귀여워!”

“오데트 님! 역시 오데트 님은 게헨나의 문화재로 지정해야 해요! 이런 귀여움을 저희만 보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오데트 님! 이거 다른 메이드들에게 말해도 되나요? 괜찮죠???”

치정 싸움이랍시고 하는 게 그런 귀여운 작전이라니!

게다가 그걸 은근히 자랑하는 것처럼 말하다니!

밤새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표정으로 작전회의를 했을 쌍둥이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녹아버릴 것 같아서 시녀들은 마구마구 쌍둥이를 껴안았다.

“끄아악! 숨 막혀! 숨 막혀! 이거 누구 손이야!”

“샤… 샴푸가 눈에 들어갔어요… 샴푸가!”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손길에 숨 막혀 하는 오딜과 눈에 들어간 샴푸 때문에 울먹이는 오데트.

한바탕 소란이 가신 이후에 시녀들은 오딜과 오데트를 앉혀두고 진지하게 사랑을 쟁취하는 법에 대해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런 건 견제라고 할 수 없어요!”

“맞아요! 사랑에 관련된 건 사랑으로 풀어야죠!”

“음… 우선은요. 정확히 마녀님이 조수님과 어떤 관계인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가장 먼저 운을 뗀 것은 베라.

사실 쌍둥이의 말이나 주변 상황들을 종합해보면 샤론이라는 마녀와 쌍둥이가 흠뻑 빠진 조수님이 긴밀한 관계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연애는커녕 남자랑 대화도 몇 번 해본 적 없는 쌍둥이인 만큼 오판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마 단순한 친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베라 네가 오데트에게 말했다면서. 남녀 친구 간에 동거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세상에 그게 이 얘기였어요?”

갑자기 동거 운운하며 묻던 오데트가 실은 이런 뒷사정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흠흠,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죠. 저희가 특별히 코칭을 해드릴게요.”

“맞아요! 오딜 오데트 님의 귀여움과 저희 참모진의 전략이 더해진다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쥔 마샤.

“좋아, 경청할게.”

오딜과 오데트는 세상 진지한 눈빛으로 조언을 귀담아들으며 오늘의 목욕이 끝났다.

3.

일순 몹쓸 생각에 휩싸였던 아멜리아를 몸을 던져 구해낸 마녀.

짙은 푸른 눈과 적갈색의 장발을 지닌 마녀는 자신을 ‘용의 마녀, 클라라 스코르피아’라고 소개했다.

아멜리아도 얼핏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당연한 일을 한 거야.”

그녀는 현세의 전쟁에 멋대로 끼어들었다가 케테르에게 혼쭐이 나고 다시 공방으로 돌아갔다던 마녀로 유명하니 말이다.

사실 케테르 공작에게 저지당한 마녀는 많다.

그중에서 ‘용의 마녀’가 유독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케테르와 대적하고도 유일하게 목숨을 보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클라라가 공적은커녕 추방자도 아니었고, 또 전쟁에 개입한 것 역시 사사로운 욕심 탓이 아니라는 점이 정상참작 되었겠지만.

그녀가 ‘둥지’라고 표현한 공방은 사막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사암 절벽을 파내어 만든 동굴이었다.

규모 자체는 커다랬지만 실내 장식은 농담으로도 근사하다고 볼 수 없었다.

실내에는 각종 마법 서류를 포함한 잡동사니가 나뒹굴었고, 인위적인 인테리어 자체를 거의 하지 않은 만큼 벽면에도 바닥에도 고운 모래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다.

다만 아멜리아가 조금 놀란 점이 있다면 동굴 한구석에 톤 단위로 헤아려야 할 것 같은 금괴가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워낙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길래 황동이나 연금술 재료겠거니 했는데.

아멜리아의 눈길이 힐끗 금괴를 향하는 것을 보자마자 클라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랑스럽다는 눈치다.

“엄청 많지? 열심히 모았어.”

“…….”

하지만 상대는 아멜리아.

그것도 짙은 피로감과 환멸로 마음의 문을 닫아가는 아멜리아다.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슬쩍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조금 앉아서 쉬고 있어.”

“…고마워요.”

“감사는 넣어둬. 나도 오랜만에 마녀를 만나서 기분이 좋거든.”

분위기라도 누그러뜨릴 겸 농담을 던졌던 클라라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아멜리아를 테이블에 앉혀두고 차를 준비하러 갔다.

반쯤 억지로 그녀의 공방에 끌려와 차를 대접받게 된 아멜리아는 조금은 머리를 식힐 수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없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짙은 그림자가 체취처럼 달라붙어 암울한 빛을 보이고 있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티포트와 찻잔, 그리고 간단히 곁들일 마들렌을 챙겨온 클라라.

식기는 제대로 보관하고 있는지 아주 깨끗하다.

그녀는 격의 없는 태도를 보이며 아멜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셔.”

“고마워요.”

아멜리아는 머리가 멍했다.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끝난 뒤 찾아온 번 아웃은 뇌 기능을 일부 마비시켜 버린 것 같았다.

여기에 들어와서 한 대사도 지극히 형식적인 세 번의 고마워요. 뿐이니.

“너 정말 예쁘다.”

아멜리아가 몇 개월 만에 찻잔을 들어 올려 입술을 축이는 동안 기다리던 클라라가 말을 걸어왔다.

뭔가 다른 뜻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금을 녹여 가늘게 뽑은 듯한 아름다운 금발, 마주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고아한 하늘색 눈동자.

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마녀들 사이에서도 아멜리아의 외모는 독보적이었다.

고된 떠돌이 생활과 노숙으로 인해 말끔하지 못한 아멜리아였지만 그런데도 미모를 감출 수 없었다.

“너 처럼 예쁘게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면 내 황금도 다 낼 수 있을 거야.”

“…….”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지금은 그저 쉬고 싶을 뿐이라 대답을 하지 못한 아멜리아.

클라라는 그런 아멜리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리곤 대화를 할 여력이 없다는 것도 재빨리 캐치해냈다.

하긴 조금 전까지 스스로 사멸하려던 사람이 갑자기 활발하게 수다를 떤다면 그게 더 위험한 징후이다.

말없이 차를 홀짝거리는 아멜리아를 바라보다 헛기침을 하더니 조심스레 제안한다.

“저쪽으로 들어가면 오아시스 물을 끌어와서 만든 욕실이 있어. 거기에서 몸을 씻어도 좋아. 안쪽에 컨테이너에 침대도 있는데 거기도 네가 써. 지금은 이야기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차차 이야기해 주는 걸로.”

“…네.”

“대신 약속! 절대로 나쁜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무슨 일인지 말해줄 마음이 생기면 말해주기로. 그때까지는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쉬어도 좋아.”

아멜리아는 조금 놀란 듯이 클라라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따뜻한 호의를 느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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