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1.
“하아…. 진짜 숨 막히네.”
첫 수업을 끝낸 샤론은 새로이 배정받은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푹 쉬었다.
가을도 끝자락에 걸쳐, 밤이 되면 제법 추워지는 날씨인데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것 같다.
정말이지 기 빨리는 시간이었다.
가르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는 것은 아니다.
시우에게 강의하던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결 수월하게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쌍둥이들은 오히려 명문 귀족가의 후계에 걸맞게 탄탄한 기본기를 자랑하는 데다가 지극히 정석적인 방식만 가르쳐도 충분했기 때문에 강의 자체는 수월했다.
근데 이제 그건 업무상의 문제이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수업하는 내내 뒤통수로 날아드는 따끔따끔한 시선이 얼마나 얼얼한지 머리에 볼록한 혹이 생긴 같았다.
대화는 단답으로,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고 선생과 제자라는 확고한 선을 그은 쌍둥이.
그 보이지 않는 압박은 은근히 샤론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결국 대화도 하고 조금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쫓기듯이 강의만 하다 나오고 말았다.
사실 샤론이 섭렵한 K-막장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것들보다는 훨씬 유한 전개였다.
침으로 뭉친 종이 뭉치가 뒤통수로 날아든 것도 아니고, 알비레오 백작이 김치로 싸대기를 날린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어쩐지 섭섭한 건 별수 없다.
샤론 언니! 샤론 언니! 하면서 살갑게 굴던 쌍둥이는 참 귀여웠는데.
사랑싸움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인지 처음 느꼈다.
울적해지자 시우의 얼굴이 떠오른다.
“시우 보고 싶다.”
익사한 마녀는 잘 처리했을지.
서울에서 큰일이 일어났었다는데 몸은 괜찮을지.
시우도 자신처럼 보고 싶어 할 지.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다.
그토록 염원하던 귀향을 이뤘는데 정작 시우가 없으니까 허전하기 짝이 없다.
샤론은 백작가 부지 내 별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공방과 숙소를 겸하는 으리으리한 3층 건물이다.
발을 들여놓자마자 자동으로 타오르는 촛대와 휘황찬란한 로비와 본관에 뒤지지 않는 사치스러운 실내장식.
서울 집값이 비싸다 비싸다 하지만 샤론의 숙소에 비하면 헐값일 것이다.
조만간 시우가 게헨나로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좋다.
행복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아… 그것만이면 참 좋은데….”
애석하게도 샤론은 알비레오 백작과 약속한 바가 있다.
쌍둥이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주기 위해 거리를 벌려줄 것.
지금 쌍둥이에게 마법을 가르치며 빚을 갚아갈 수 있는 것도 모두 저 전제 조건을 끼고 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라는 거야 진짜….”
그러나 10여 년 전 샤론이 서명했던 빚 문서와는 다르게 알비레오와의 구두 계약은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율 판단에 맡기겠다는 태도였으나 아무래도 불안해진 샤론은 직접 백작을 찾아가 두 번째 면담을 청했다.
‘정확하게 거리를 두라는 건… 어떤 관계를 의미하시는 건가요? 아예 남으로 있어야 하는 건가요?’
‘글쎄요? 제가 정확하게 설명해 드리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많네요. 저는 에버그린 양과 시우 군의 관계에 대해 정확하게 모르니까요. 그 부분은 에버그린 양의 재량에 맡기도록 할게요.’
하지만 백작은 정확한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주 모호하게,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것 같은 일선만을 그어두었을 뿐이다.
차라리 ‘이건 되고 섹스는 안된다.’ 이런 식으로 확실한 계약조건을 명시해주었더라면 샤론도 그에 맞춰 행동하면 됐을 것이다.
“손 잡는 건 되나? 대화 정도는 괜찮겠지…?”
벌써 고민이 산더미인 샤론.
이는 소극적인 개입을 바탕으로 만약 이 일이 시우에게 알려졌을 시 그 반감이 쌍둥이에게까지 미치지 않도록 하는 방책임과 동시에, 성실한 샤론을 더욱 갈팡질팡하게 만들려는 농간이기도 했다.
물론 샤론은 그런 자세한 밑작업이 깔려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눈에 빤히 보이는 쌍둥이의 경계.
알쏭달쏭한 알비레오의 계약조건.
이것만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기 충분한데 샤론에게는 한가지 고민이 더 있다.
사실 고민이라기에는 다른 마녀들은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은 내용이다.
바로 샤론이 저번 혼수상태를 계기로 20 위계로 각성했다는 것이다.
불완전계승을 극복했다는 건 미숙아라는 꼬리표를 떼고 스승님의 유지를 잇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는 경사이다.
그리고 샤론 역시 새로이 습득한 막대한 정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법 연구에 힘을 쏟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시우가 도와줬네….”
가만히 두었더라면 불완전계승이 이렇게 쉽게 치료되었을 리 없다.
아마 시우와의 지속적인 성교를 통해 불능상태였던 낙인 구석구석까지 순결한 마력을 전달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인에서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지금껏 낙인을 회복하자는 것을 빌미로 시우에게 추파를 던지던 샤론.
그 추파를 어색하지 않게 해주던 핑곗거리가 사라져버린 것도 나름의 고민이라면 고민이었다.
“하긴 벌써 고민할 일은 아니겠네….”
샤론은 고개를 붕붕 저으며 머리를 정리했다.
어차피 샤론은 시우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게 될 몸이다.
괜스레 울적해진 샤론은 마법 연구를 위해 별장 내 마련된 공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
쉬는 시간도 없이 이어진 5시간 연강 종료.
샤론은 쌍둥이에게 숙제를 내주고는 먼저 퇴실했다.
“푸하아아아….”
“후아아아아….”
인형처럼 반듯하게 앉아있던 쌍둥이의 몸이 그로부터 약 1분 후.
샤론이 완전히 떠나갔을 때쯤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척추에 무척 좋지 못한 자세로 의자 끝까지 걸터앉은 오딜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메리골드 교수님보다 빡세네….”
“언니, 이 과제량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건 견습마녀권 유린이야!”
그간 아멜리아의 갑작스러운 퇴임으로 원소 마법의 진도가 다른 과목에 비해 많이 밀려있다지만 첫날부터 쉴 틈 없이 진행된 진도 러쉬.
요점을 콕콕 짚어주고 설명 자체도 상세했던 탓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크게 없었다.
하지만 그 메리골드 부교수님조차 적당한 쉬는 시간을 배치해 주었는데.
그 유해 보이던 샤론이 이렇게 견습마녀 혐오적인 강의를 이어나갈 줄이야.
“아멜리아 부교수님도 좀 쉬게 해줬는데….”
“내 말이 맞지 언니? 이건 신종 정신공격이 분명해! 우리가 과제와 수업에 치여서 허덕이는 동안 샤론 언니 혼자 조수님을 독차지할 계획인 거라구!”
“흐음…. 그런가?”
오데트는 적의 매복을 알아차린 공명의 마음이 되어 샤론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저께 있었던 ‘신시우 조수 특별보호 대책본부(본부장 오딜 제머나이)’에서의 논의를 바탕으로 쌍둥이의 주적이 되어버린 샤론 에버그린.
하지만 여느 때나 그렇듯이 쌍둥이는 뜻이 하나라 할지언정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오데트! 아무리 샤론 언니가 조수님을 뺏어가려 한다고 해도 너무 적대할 필요는 없어! 동료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말도 있잖아!’
현세에서 조수님을 알뜰살뜰 보살펴 주었던 만큼 지나치게 공격적인 견제를 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
이것이 주화파인 오딜 논리였다.
‘언니! 그런 물렁한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어! 샤론 언니가 잠재적 위험인 이상 항상 경계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홀라당! 조수님을 빼앗길 거라구!’
한편 그런 유유부단한 태도를 지탄하며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주전파인 오데트의 논리였다.
거의 밤을 새워가며 티격태격 향후의 행보를 논의하던 쌍둥이였지만 오늘 샤론의 끔찍한 만행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지침이 정해진 것 같다.
“내말이 맞았지?”
자기 말대로 상황이 진행된 것 같으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변을 토하는 오데트.
열띤 어조와 불끈 쥔 주먹은 자유 투사를 연상케 했다.
“내가 그랬잖아! 가슴 큰 사람은 다 여우라니까? 다들 아닌 척하면서 질투도 독점욕도 강하다고 베라가 말해줬어!”
평소라면 자신의 의견이 옳았다면서 깐족대야 할 오데트.
그런 오데트에게 반감을 느껴서라도 어떻게든 박박 우겼을 오딜이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자신의 사상이 틀렸음을 깨달은 오딜이 침울하게 말했다.
“이번만큼은 네가 옳았다고 인정해줄 게 오데트. 아주 그럴듯해. 미안해 내가 너무 세상을 아름다운 곳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나 봐.”
그런 오딜의 어깨에 척 오데트의 고운 손이 얹혔다.
그 손은 조롱이나 비아냥이 담겨있지 않았다.
정치적 대립에서 벗어나 함께 지향해야 할 사상을 찾아낸.
라이벌을 위로하는 듬직한 손길이었다.
“언니, 너무 낙심하지 마. 내가 틀릴 때가 있는 것처럼 언니도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가 있는 거야.”
“오데트….”
오딜은 감동한 눈빛으로 어느새 의젓하게 변한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쌍둥이는 와락 뜨거운 포옹을 했다.
“게다가… 오늘 수업에서 당하기만 한 것도 아니야.”
“그래, 네가 멋지게 한 방 먹여 줬지.”
“ ‘네가’라니 ‘우리’가 한 거지.”
오늘은 첫 수업.
샤론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쌍둥이는 함정을 파놓았다.
물론 이것은 주전파였던 오데트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안건이다.
하지만 오데트는 그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았다.
기꺼이 자신의 맞수였던 오딜에게도 공훈을 나누는 것이다.
오딜은 눈물이 글썽이려는 것을 참아냈다.
언제나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따라쟁이 오데트가 언제 이렇게 성장한 걸까?
“훗, 맞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눈치던 걸?”
그래서 그 함정이 무엇이냐 하면.
“메리골드 남작님도 몇 년 동안 눈치 못 챘던 걸 샤론 언니가 알아차릴 수 있겠어?”
“맞아 맞아.”
바로 오딜과 오데트의 바꿔치기다.
샤론은 쌍둥이를 각각 호명해 칠판 앞에 세웠지만, 쌍둥이는 순순히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오데트를 부를 때는 오딜이.
오딜을 부를 때는 오데트가 나서면서 샤론을 기만하고 골탕 먹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몇 번을 성공해도 짜릿한 작전을 떠올리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후후후… 샤론 언니도 별거 없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가자구 언니.”
“물론이지 오데트.”
물론 샤론으로서는 쌍둥이가 골탕을 먹인 것인지도 알 수 없었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골탕을 먹여봐야 어떤 효용이 있는지 정작 본인들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쌍둥이 자매의 뜨거운 악수를 끝으로 첫 번째 교전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