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1.
서울에서 벌어진 사건이 이모저모 끝난 이후.
시우는 엘로아를 통해 곧장 게헨나로 향하겠다는 전언을 보냈다.
익사한 마녀에게 당해 쓰러졌던 샤론이 회복되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으니 얼굴을 보고 싶었고.
오매불망 조수님만 기다리고 있을 쌍둥이를 봐야 했고.
친구도 없이 쓸쓸하게 혼자 남은 타카쇼랑 놀아줘야 하기도 했고.
또 최악의 이별을 맞은 아멜리아에게도 이것저것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만.
상정 외의 사태가 발생해 게헨나에 놀러 가는 것은 조금 지연돼 버리고 말았다.
“흠… 문제네, 문제.”
시우는 책상 위에 놓인 ‘붉은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주위로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마법식이 이리저리 수 놓인 전마지가 구르고 있다.
최근 시우는 붉은가지를 통제하는 것에 열심이었다.
영체가 되어 수명으로 죽지도 못하는 데다가 최초의 남자 마녀가 되어버린 몸.
긴긴 삶 동안 앞으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정의감 같은 것을 제외하더라도 노후 대비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할까?
“하아… 이게 말이 되나?”
일반적으로 아티펙트라 함은 내부에 마법이 담겨있는 물건을 칭한다.
예를 들면 고요함의 노래를 반영구적으로 재생해주는 오르골이라던가 쌍둥이가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예니체리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자체로 자성마법에 준하는 마법을 발휘하거나 촉매가 되는 아티펙트를 예장이라고 부르는데 샤론이 들고 다니는 완드나 붉은가지가 그렇다.
조금 더 설명을 보태자면 아티펙트는 비교적 양산이나 제작이 쉬운 레어 아이템이고, 예장은 유니크 또는 레전드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던가.
모처럼 좋은 아이템을 얻었지만 시우는 붉은가지를 제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어디부터 봐야 할 지 감이 안 잡히네.”
시우는 검은 리본에 돌돌 말려 거의 나무 기둥 두께로 변한 붉은가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게헨나로 넘어가는 것이 지연된 것도 모두 이 붉은가지 때문이다.
리본으로 철저하게 포장해 두었음에도 워낙에 강력한 왜곡장 탓에 통행증의 좌표가 멋대로 헝클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게헨나 진입을 시도했다가는 어떤 사달이 날지 몰라 일단 포기하고 집에 처박혀 분석 중이다.
“제대로 활용만 할 수 있으면 좋은데….”
핵연료봉처럼 위험한 왜곡장을 쉼 없이 품어대는 붉은가지.
일단 처녀의 베틀을 활용하고 방직 방식을 조작해 어떻게든 ‘들고 다닐 수준’까지는 만들었지만 이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시우가 심혈을 기울여 리본을 짜내도 왜곡장은 천천히 리본을 부식시킨다.
따라서 이렇게 철저하게 말아놓아도 하루면 리본을 전부 갈아줘야 하는 데다가 여전히 미세한 왜곡장을 주변에 흩뿌렸다.
하지만 반대로 이 무시무시한 성능을 완전히 끌어낼 수만 있다면 시우의 노후 준비도 일진보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름 각 잡고 연구 중인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눈으로 마력의 흐름을 보고 관측해도 지금까지 알아 왔던 시우의 마법 지식으로는 한계가 역력했다.
이 왜곡장 자체가 일종의 자성마법인 것처럼 해석이 난해했다.
모처럼 유니크템을 손에 쥐고 있는데 착용 제한 때문에 사용하지도 못하니 뭔가 아쉬웠다.
“잘 안되는가?”
그때 삐걱 문이 열리더니 엘로아가 뚜방뚜방 걸어들어왔다.
봄 벚꽃보다 고운 색을 지닌 포니테일이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린다.
손에는 커피와 과일이 담겨있는 쟁반이 들려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쟁반을 받고소파에 앉았다.
벌써 며칠째 온종일 연구에 몰두하는 시우를 위해 엘로아는 종종 간식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엘로아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시우가 끄적거린 전마지를 들여 보았다.
“내가 뭐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몸이라도 움직이면 어떻겠는가? 하루 내내 책상에 앉아봐야 사고가 좁아질 뿐이네.”
당연하지만 엘로아도 우수한 마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력장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언령 마법을 구사하는 그녀는 붉은가지 해석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또 충분히 시간을 들여 해석한다 한들, 엘로아의 자성마법 체계에 맞춰 해석된 붉은가지를 시우가 고스란히 따라할 수 있을리도 없고 말이다.
“이미 많이 도와주시는걸요. 당분간 수련은 조금 미루는 걸로 하겠습니다. 일단은 게헨나에 들어가고 싶어서요.”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엘로아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확실히 엘로아와의 대련은 유익하고 재미도 있지만 그만큼 체력을 많이 잡아먹는다.
지금 당장은 연구에 집중하는 것이 옳아 보였다.
“게헨나에 가면 조금 더 양질의 자료나 연구 기구들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 우선은 이걸 들고 포탈을 넘을 만큼만 리본의 방직 방식을 바꿔볼까 합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딱 그 정도라면 이삼일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요.”
엘로아의 한쪽 눈썹이 살짝 놀란 듯 올라갔다.
그의 말대로라면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전혀 다뤄본 적 없는 종류의 마력장을 완전히 차폐할 정도로 연구가 진행됐다는 의미이다.
사실 저렇게 끙끙거리는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해도 모자랄 판국인데.
저런 부분에서 뻐기지 않는 것이 참 시우다웠다.
“영 답답해 보이기에 제자리걸음인 줄 알았거늘. 역시 내 제자답구나.”
“또 그러십니다.”
칭찬하는 것에 맛 들인 엘로아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시우를 보고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비록 임시라지만 제자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스승의 기쁨이다.
하지만 요새는 이따금 시우를 놀리고 그가 당황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그래 이 정도의 거리감이 딱 좋다.
정겹고, 화목하고, 서로 간의 신뢰가 넘치는 이 관계가 말이다.
엘로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우의 입에 포크로 콕 찍은 사과를 물려주었다.
2.
시우가 아직 붉은가지를 들고 포탈을 건널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샤론은 쌍둥이의 공부방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수업이 외부소음에 방해받지 않도록 복도 전체에 깔린 붉은 주단 위를 빙빙 돌며 심란한 마음을 다잡는다.
“후우….”
지난밤 샤론은 알비레오를 찾아가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쉽게 설명하고, 쉽게 말하는 것이지만 정말로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다시 시우를 만났을 때는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당당한 연인이 될 수 있도록.
여태껏 받아오기만 했던 샤론에서 아낌없이 주는 샤론으로 거듭나고 싶었다.
그 부분이야 어떻게든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고 하면…
정작 강의에 들어가야 하는 지금은 다른 문제로 속이 더부룩했다.
“좋아, 문제없어.”
꼬리무는 강아지처럼 제자리를 돌던 샤론은 심호흡을 끝내고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벽 한쪽을 차지한 벽난로와 아름다운 정원이 내려 보이는 창가.
교탁과 칠판 맞은편에 나란히 놓인 책상.
그 책상에는 서로서로 쏙 빼닮은 귀족 영애 쌍둥이가 앉아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윤기가 넘치는 검은 흑발과 트레이드 마크이자 시그니처인 커다란 하프 보닛이 눈에 확 들어왔다.
쌍둥이를 가르치기 위해 준비해온 각종 수업자료를 품에 안고 태연함을 가장했던 샤론.
그녀는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예상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음을 깨달았다.
“…….”
“…….”
기분 탓이 아닌 싸늘한 적막이 감돈다.
샤론과 쌍둥이는 일직이 안면을 텄던 적이 있다.
쌍둥이가 데네브 백작과 현세에 깜짝 방문했을 때 함께 영화도 보고 이것저것 맛있는 것도 먹었으니 말이다.
그때는 쌍둥이가 귀여운 여동생처럼 느껴졌었다.
실제로 쌍둥이가 샤론을 언니처럼 잘 따르기도 했고.
하지만.
재회한 지금은 느낌이 전혀 다르다.
“…….”
“…….”
샤론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차가울 정도로 차분한 눈으로 샤론을 빤히 쳐다보는 쌍둥이.
보석보다 고운 눈동자가 문 앞에서 교탁 앞까지 이동하는 샤론을 확실하게 록 온 했다.
시우와 동거하던 샤론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와 아주 정확히 흡사했다.
경계심 어린.
미심쩍은.
모종의 불만과 꿍꿍이를 안으로 꽁꽁 감춘 듯한 눈동자.
이 정도는 알비레오 백작이 연애 전선에 직접 개입해 올 때 예상했던 것이다.
사랑을 쟁취하는 것이 전쟁이라면 샤론은 엄연히 쌍둥이의 ‘적국’으로 인식된 셈이니 말이다.
백작이 제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견습마녀의 연애 사업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쌍둥이 쪽에서 부탁했을 가능성이 크니 말이다.
하지만 벌써 쫄 건 하나도 없다.
그래봐야 쌍둥이는 견습마녀에 불과하다.
샤론은 불완전계승을 완전히 극복한 20 위계의 대마녀이고 말이다.
연적이니 뭐니, 시우를 가운데 두고 싸우는 경쟁 관계니 뭐니 해도 수업은 수업.
딱 봐도 말괄량이인 쌍둥이를 이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기선제압은 필수적이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사원소 이론 및 원소 응용마법 강의를 담당하게 된 샤론 에버그린입니다.”
그러나 당찬 마음과 쌀쌀맞은 생김새와는 달리 새가슴인 샤론이다.
짐짓 근엄하게 말하는 와중에도 어쩐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안녕하세요. 쾌차하셔서 다행이에요.”
“안녕하세요.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쌍둥이 역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깍듯한 존대로 샤론을 맞이한다.
현세에서 함께 지내는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살갑게 굴던 모습과는 다르다.
단숨에 거리감을 느낄 수 있는 은근한 기싸움이었다.
그래도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쌍둥이의 일변한 태도에 씁쓸하고 내심 속상하다.
내색하지 않은 채 샤론은 분필을 잡고 곧장 수업에 OT에 들어갔다.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어떤 부분을 가르칠 것인지, 어떤 부분에서 준비가 필요한지도 얘기해야 했으니 말이다.
견습마녀에게 마법 공부란 이를테면 건물을 쌓기 전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다.
얼마나 견고하게 쌓아가느냐에 따라 낙인에서 마법을 체득하는 정도도 속도도 달라지니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자, 이렇게 총 12개의 파트로 나누어서 1년간 배우게 될 거예요. 매주 학습한 내용에 따른 과제가 나갈 거고요. 매달 말에 정기적인 시험을 통해 학업 상태를 점검할게요.”
“네.”
“네.”
더 대화를 이어갈 구실이 궁색하게 단답형으로 끝이었다.
“질문할 사항이 있나요?”
쌍둥이는 슬쩍 시선 교환을 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한다.
“아니요.”
“없어요.”
“…그럼 첫 장부터 곧장 이어나가도록 할게요.”
샤론은 교재를 참고하며 원소마법식을 칠판에 쓱쓱 적었다.
먼저 쌍둥이의 실력을 알아볼 시간이다.
“먼저 오딜 양이 이 문제를 풀어보겠어요?”
“네.”
자리에서 쓱 일어나 칠판으로 걸어 나오는 오딜.
오늘의 수업은 시종일관 휴전 협상 테이블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상태에서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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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어묵 님이 그려주신 아멜리아의 두번째 팬아트!
마녀복이 이렇게 야릇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골반에 걸쳐있는 팬티라인이 너무 예술이어서 페이스 조절도 잊고 연참을 해버리고 말았어요…!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