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1.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일등지.
야트막한 사면에 너도밤나무와 졸참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동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그 정상에 제머나이 저택이 나온다.
제머나이 백작가의 저택은 마녀들 사이에서 ‘제머나이 궁전’이라고도 불린다.
저택 부지 전체를 아우르자면 면적이 자그마한 마을과 비슷하고 저택만 해도 약간의 인프라만 갖춘다면 곧장 호텔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시설과 크기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동쪽으로는 아르스마그나 타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호수와 접해있고, 그 안쪽에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연못만 4개가 넘어간다니 대충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방문객을 압도하는 듯한 거대한 정문을 지나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마법 처리 된 꽃이 만개한 정원이 나온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정원의 푸르른 잔디를 밟으며 6개의 분수대를 지나면 저택 본관이 나오는데 이 본관 역시 아름답기로 명성이 높다.
정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홀은 대성당처럼 아치를 2단으로 겹쳐놓은 건축한 천장과 대리석 계단의 위용으로 중후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정문 홀에서 주랑과 연결되어 연회장처럼 사용되는 롱 갤러리만 해도 폭이 6M, 길이는 70M가 넘으며 각종 아름다운 회화와 조각이 꽃병처럼 줄지어 놓여있다.
결코 졸부의 겉치레나 허영 따위가 아니었다.
이 저택에는 이만한 사치와 낭비를 구가하고 있음에도 전혀 속물 같지 않게 느껴지는, 귀족적이고 우아한 기품이 있다.
그 밖에 저택 구석구석, 하물며 계단을 장식하는 상아조각 하나만 보아도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사치와 호화로움의 끝을 달리는 저택인 것이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숨을 함부로 쉬기만 해도 눈초리가 쏟아질 것 같은 은은한 긴장감이 감도는 장소라는 의미기도 했다.
단, 이런 사정은 북쪽으로 난 회랑을 따라 별관 쪽으로 빠져나오면 조금 나아진다.
본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증축 이후 별관으로 이용되는 만큼 다소 느슨한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견습마녀 쌍둥이의 방도, 50여 명에 달하는 고용인의 숙소도, 그 고용인들이 일하는 방도 대부분 이쪽에 모여있었다.
이만한 크기의 저택에 이만한 규모의 고용인이 존재한다면 자연스럽게 각종 일감도,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방도 넘쳐난다.
잼이나 스프 스톡처럼 밤낮없이 불을 써야 하는 밑 재료 준비를 위한 스틸룸.
고급스러운 접시나 글라스를 보관하는 팬트리.
상아 재질의 손잡이를 지닌 나이프나 식기를 보관하는 나이프 룸.
고기를 가공 및 처리하고 계란, 치즈, 버터 등 다양한 식자재를 수납하는 라더.
보일러실의 열기를 이용해 옷을 세탁하고 다림질을 하는 론드리 등등.
드넓은 저택의 단란한 일상을 바쁘게 보조하는 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꼭두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분주하게 돌아가는 저택의 일상도 밤이 되면 잠잠해진다.
특히 요리를 준비하는 주방 같은 경우에는 축제나 연회 전날이 아니면 이 시간까지 불이 들어와 있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오늘 밤, 이미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주방이 위치한 반지하 창문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흐음….”
“왜 언니? 문제 있어?”
널따란 주방을 차지한 것은 제머나이 오딜 그리고 오데트.
언제나 티격태격 다투기 바쁜 쌍둥이도 오늘 밤만큼은 같은 목표와 같은 고민을 지닌 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조만간 현세에서 문제를 해결한 조수님이 저택을 방문할 것이 예약되어있다.
그 자체로 신나는 일임은 분명하지만 더욱 정성 어린 환대를 위해 손수 요리한 뿔닭 찜을 내어드릴 계획을 세우고 준비 중인 것이다.
하지만 백작가의 금지옥엽으로 자라며 손에 물 한번 묻혀본 적 없는 쌍둥이다.
세계 최고의 뿔닭 찜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초장부터 삐걱이고 있었다.
“오데트, 레나가 준 레시피 다시 보여줄래?”
“레시피는 이미 외우고 있잖아.”
“그래도 줘 봐. 이게 맞나 싶어서 그렇단 말이야.”
우선 밑 재료의 준비는 완벽했다.
손질이 완료된 커다란 뿔닭 한 마리.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하고 싶었지만 차마 살아있는 뿔닭의 깃털을 뽑고 내장을 정리할 엄두는 나지 않았기에 페챠에게 미리 부탁해 두었다.
“흑마늘 얇게 저민 것 됐고, 당근, 세이지, 생강, 셀러리도 있고, 월계수 잎이랑… 로즈마리도 오케이, 각종 향신료도 다 있고, 버터도 있고…”
“왜 그러는데? 레나가 알려준 대로 인걸?”
“뭔가 부족해 보이지 않아?”
그렇다.
레나는 오딜과 오데트가 손을 다칠 것을 염려해 각종 채소를 씻어 놓았으며 껍질도 벗겨 놓았다.
우유에 뿔닭을 담가 핏물과 비린내도 제거해 뒀을 뿐 아니라 오븐의 예열도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사실상 이미 수제 요리라기보다는 간편 조리키트 급으로 재료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서툴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채소를 토막낸 쌍둥이에게 남은 작업은 간단했다.
올리브유, 소금, 로즈마리, 녹인 버터를 겉면에 꼼꼼히 발라 마리네이드한다.
삐뚤빼뚤하게 썰어진 채소와 각종 향신료로 비워낸 뿔닭 속을 채우고 실과 바늘로 봉합한다.
자투리 채소와 허브를 깔아 뿔닭이 직접 오븐 바닥에 닿지 않게 한 뒤, 미리 예열된 오븐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구워내기만 하면 끝.
실제로 그리 난이도가 높지 않은 요리였고, 귀찮은 준비과정을 레나와 페챠가 처리해 놓은 이상 레시피도 단순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오딜의 인상이 펴지지 않는 것은 그 과정이 ‘너무 단순했기 때문’이다.
“들어봐 오데트.”
“응, 언니.”
“우리는 분명 세계 최고의 뿔닭 찜을 만들려고 하고 있잖아? 그것도 조수님한테 대접하려고 말이지.”
“그렇지 그렇지.”
“하지만 이대로 충분할까? 이래서야 그냥 뿔닭 안에 채소를 넣어서 구울 뿐인 요리잖아.”
“어라?”
언니의 말을 곰곰이 듣던 오데트도 무엇인가를 퍼득 깨달은 모양이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뿔닭 찜은 분명 맛있었다.
일반적인 닭고기보다는 들새에 가까운 고급스러운 식감.
노르스름한 갈색으로 변한 두꺼운 껍질은 쿠키의 겉면처럼 바삭바삭하다.
껍질 아래 지방이 열기에 녹아내리면서 속살을 촉촉하게 감싸고, 속을 채운 채소, 허브의 풍미가 더해지면 혀를 애무 당하는 듯한 행복한 감상에 젖게 되는 것이다.
그 황홀했던 맛을 기억하는 쌍둥이에게 8줄밖에 되지 않는 레시피는 너무 단순해 보였다.
“혹시 레나가 비밀 레시피를 숨기고 알려주지 않은 건 아닐까?”
“에이 언니 설마, 레나가 우리랑 얼마나 친한데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아니야, 예전에 멋대로 거북이를 주워왔다 우리한테 걸렸었잖아. 레나도 마음만 먹으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그… 그런가?”
오딜은 진지하게 눈썹을 모으며 순진한 여동생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파했다.
조수님에게 맛있는 수제 요리를 대접한다는 대의 아래 모처럼 의기투합한 오데트인만큼 딴지는 걸려오지 않았다.
도리어 그럴듯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끄덕인다.
“원래 특제 소스나 레시피 같은 건 마녀의 자성마법 같은 거래.
할머니가 어머니한테, 그 어머니가 딸에게 일인 전수하는 아주 비밀스럽고 소중한 거지. 왜 ‘며느리한테도 안 알려주는 소스’라는 말도 있잖아.”
“그… 그럼 우리가 레나에게 레시피를 물어본 게 굉장히 실례되는 행동이었던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그러니까 특제 레시피를 감춘 레나를 책망할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우리의 원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기에 어레인지를 가해야 한다는 거야.”
어느새 ‘레나가 비밀 레시피를 감췄다!’로 결론을 내린 오딜과 오데트의 시선이 동시에 도마 위의 뿔닭으로 향한다.
크기가 거의 50cm는 되어 보이는 뿔닭은 썬텐하기 전 오일을 도포한 것처럼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누워있다.
그러나, 확실히, 다시 봐도, 고작 이 안에 채소를 넣어 굽는 것만으로 그 아름다운 맛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언니, 우선은 채소 먼저 채워볼까? 어차피 맛을 내려면 이 안에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갈릴 것 같아.”
“그래, 대신 절반만 채우자! 나머지는 곰곰이 생각하면서 더 좋은 레시피를 생각해보는 거지.”
“좋아!”
콧김을 뿜으며 의욕 충천한 오데트가 잰걸음으로 식자재 창고 쪽으로 향한다.
오딜은 손에 잡히는 대로 서늘하고 축축한 뿔닭의 배를 각종 야채와 통후추, 향신료로 절반쯤 채웠다.
“언니! 이건 어때?”
잠깐 사라졌던 오데트는 톱밥과 얼음이 잔뜩 담긴 상자 가운데 묻혀 있던 굴을 꺼내왔다.
오데트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 신선한 생굴 위에 라임과 겨자 그리고 식초를 얹어 호로록 먹는 것이었다.
타로 타운에 놀러 갈 때 종을 울리며 굴을 파는 굴 장수에게 손수레째 전초기지로 옮겨달라고 한 적도 있을 정도로 말이다.
더욱이 타로 타운에서 굴 장사꾼이 파는 굴과 제머나이 백작가에 납품되는 굴의 품질은 하늘과 땅 차이다.
바다의 꽃이라고도 비견되는 특유의 향긋함과 고소함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그 크기만 봐도 오데트의 손바닥보다 훨씬 커다란 비싼 자연산 굴이다.
이런 좋은 재료를 지나칠 오데트가 아니었다.
“오데트! 오랜만에 아주 괜찮은 아이디어인데?”
맛있는 굴+ 맛있는 뿔닭 =?
겁나 맛있는 뿔닭이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오데트만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굴을 좋아하는 오딜로서는 그 참신한 발상에 극찬을 아낄 수 없었다.
기세등등해진 오데트의 콧대가 높아진다.
“에헴! 가끔 이런 발상의 전환이 중요한 법이야, 언니. 일단 음… 10마리만 넣어보자.”
“그러자!”
오데트는 껍데기에 묻은 톱밥을 물로 씻고, 굴을 손질하는 전용 나이프까지 챙겨와 능숙한 손놀림으로 손질된 굴을 오딜에게 건넸다.
하지만 이대로는 뭔가 아쉽다.
아직 더 좋은 재료를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 굴을 넣었으면 잡내를 잡아줄 만한 음식도 필요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고민 중이야. 레몬이나 라임은 어떨까? 굴이랑 잘 어울리잖아.”
“그거 좋다! 기다려! 찾아올게!”
점점 아스트랄하게 변해가는 요리 연구회.
레나가 들었으면 쌍둥이의 치맛자락을 잡으며 말렸겠지만 불행히도 오늘 밤 쌍둥이의 폭주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이어 온갖 ‘맛있는 식재료’들이 뿔닭의 배 속에서 믹스되기 시작한다.
“우리 현세에 나갔을 때 배웠잖아? 단짠단짠은 아주 중요하다는 거.”
“그럼 꿀도 조금 넣을까?”
“흠… 꿀보다는 뭔가 설탕이 더 어울릴 것 같아.”
“설탕보다는 과일을 이용해 단맛을 끌어 올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기존의 레시피를 탈피해 더욱 위대한 요리를 창조하고 있다는 자부심.
그로 인해 위대한 셰프가 된 기분을 만끽하게 된 쌍둥이는 제 딴에는 그럴듯한 토의를 하며 이것저것 재료를 추가하기 시작했다.
“그럼 배가 좋겠다. 내가 채 썰게… 뭐야! 오데트! 이거 껍질이 잘 안 깎여.”
“그냥 껍질째로 넣자! 어차피 나중에 빼면 되잖아.”
“흠, 뭐 어쩔 수 없지. 사실 과일은 껍질에 맛있는 맛이 많이 모인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어.”
그렇게 해서 통째로 썬 배.
추가.
“오데트 이대로는 풍미가 조금 부족할 것 같지 않아? 향신료는 후추, 로즈마리 정도 밖에 안 들어갔잖아.”
“언니 말이 맞는 것 같아. 기다려봐 흐음… 치즈? 치즈 좋지 않아?”
“오늘따라 말이 잘 통하네! 치즈도 맛있지.”
그렇게 해서 라더에 보관되어 있던 커다란 한 덩이를 굴려와 강판으로 갈아 넣은 체더 치즈.
추가.
“치즈가 녹진한 맛을 더해주긴 하겠지만 풍미는 여전히 모자란 감이 있어. 좋아, 시나몬 스틱을 넣어서 맛의 밸런스를 맞춰주자.”
“시나몬 스틱을?”
“그렇지 원래 시나몬이 배랑 굉장히 잘 어울리잖아?”
“언니, 나 오늘따라 언니가 멋져 보여.”
“이 정도로 뭘 오데트, 나도 다시 봤어.”
“헤헤.”
훈훈한 교분을 쌓으며 이것저것 추가하다 보니 어느새 커다란 뿔닭의 배가 만삭 임산부처럼 빵빵하게 차올라 있었다.
개구리처럼 말캉한 살을 만지면서 가랑이 사이를 실로 봉합하느라 꽤 고생했을 정도다.
“좋아, 이 정도면 됐겠지?”
봉합한 틈 사이로 삐져나오려는 굴을 손가락으로 다시 밀어 넣은 오딜.
“완벽한 요리가 될 거야.”
겉면이 노릇노릇하게 익을 수 있도록 솔을 이용해 버터를 발라주는 오데트.
두 사람은 두근거리는 마음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은 채 커다란 뿔닭을 오븐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