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82화 (282/917)

#281

1.

“시우 군과 거리를 둬 주시겠어요?”

조금 전까지 상상하지도 못했던 최고의 제안을 받고 화색이 되었던 샤론.

그녀의 얼굴이 곧장 딱딱하게 굳는다.

처음 겪는 일이지만 어째 어디서 많이 봤던 광경이었다.

흡사 드라마에서 ‘이 돈 받고 내 아들과 헤어져 주게’라고 부탁하는 못된 사모님이 아닌가?

물론 시우는 알비레오의 아들도 아니었고 알비레오가 시우의 어머니인 것도 아니었지만 꼭 모양새가 그렇다는 의미다.

“…왜 인지 먼저 여쭈어도 될까요?”

갑자기 거리를 둬달라니.

제머나이가의 견습마녀 쌍둥이와 시우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아무리 눈치 없는 샤론이라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긴밀한 연인 관계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일전에 쌍둥이가 찾아왔을 때 그렇게 불안해하던 것 아닌가?

정작 그때는 별일 없이 넘어가 안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말이 나와버리니 자신의 안일함을 탓하게 된다.

알비레오는 차분한 말투로 상황을 설명했다.

“저는 시우 군을 몹시 괜찮게 보고 있어요. 앞으로의 장래를 생각해도, 지금껏 받아왔던 은혜를 생각해도, 그의 사람됨됨이를 생각해도 그렇죠. 아, 물론 제가 탐난다기보다는 우리 쌍둥이와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말이지만요.”

“제가 방해된다는 건가요?”

샤론의 목소리에는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마치 소중하게 여기던 인형을 빼앗기는 아이를 본 것 같아서 알비레오도 썩 마음이 편치는 않다.

하지만 샤론은 금방 마음을 굳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약서를 테이블 앞으로 쓱 내민다.

“죄송합니다. 회복도 도와주시고, 제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안을 해주신 것도 정말 감사드려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흐음….”

“하지만… 시우랑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제안은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알비레오는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계약서를 자색 눈동자로 훑었다.

거절할 수 있을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설마하니 조금의 고민도 않을 줄이야.

그만큼 알비레오의 제안은 마녀라면 거절하기 힘들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다.

현재 백작은 21 위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쌍둥이에게 낙인의 일부를 그릇으로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쌍둥이들이 철없고 멋모르는 아이들에 불과하다지만 훗날 제머나이 백작가의 이름을 물려받고 22 위계의 백작이 되는 것이다.

먼저 샤론은 알비레오와의 계약을 거절함으로써 그런 쌍둥이와 교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찼다.

그뿐 아니다.

샤론은 빚이 많다.

돈이 돈을 불러오는 세상에서 땡전 한 푼도 없이 그런 목돈을 만드는 것은 아무리 마녀라 해도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진리진명 학술회의 추천장과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소개장.

소개장이나 추천장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게헨나에서 어느 정도 인맥을 가진 마녀를 잡고 고급스러운 술을 주며 부탁한다면 그깟 종이 한 장은 써주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제머나이가의 인장이 찍힌 소개장이라면 무게가 달라진다.

학술회에 들어가게 된다면 호의를 빙자한 에렐림 공작의 타산으로 적잖은 양의 연구자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트리니티 아카데미로 들어가게 된다면 다소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즉각 수석교수로서 임용되어 각종 고서에 대한 접근 권한이 생길 것이다.

압도적인 재력에서 기인한 제머나이 백작가의 ‘지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게헨나 출신인 샤론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단칼에 거절한 것이다.

“늦은 시각에 실례했습니다. 이제 슬슬 현세로 돌아갈 채비를 할게요.”

주섬주섬 자리를 일어나려는 샤론을 보며 알비레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여기서 마음만 먹는다면 샤론을 힘으로 압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샤론과 대화를 시작하기 전 알비레오는 오랜만에 그녀의 채무증서를 뒤적여 보았다.

거의 아무런 담보도, 신용도 없는 샤론은 돈을 빌리기 위해 온갖 독소조항이 적힌 빚문서 위에 서명을 해야 했다.

이제 막 계승을 끝낸 샤론은 사회 경험이 부족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중에는 상환 기간이 10년을 초과했다면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일괄 상환을 요구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었다.

또 이 조항, 저 조항을 잘만 묶는다면 얼마든지 이자와 원금을 늘릴 수도 있다.

말하자면 지금 당장 빚을 독촉하며 돈다발로 뺨을 때리며 협박할 수도 있고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우와 샤론을 억지로 뜯어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알비레오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현세에 있던 시우를 어떤 측면으로든 서포트 해주었을 것이 분명한 샤론을 막무가내로 찍어누르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쌍둥이가 시우와 엇나갈 단초를 제공할 수도 있으니 실리적인 면모를 따져봐도 하책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잠시만요.”

알비레오는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샤론에게 눈짓했다.

샤론은 마지못해 자리에 다시 앉는다.

“음, 제 말을 조금 오해한 것 같네요. 제가 성급한 면이 있어 본론을 먼저 늘어놓는 탓에 가끔 이렇게 오해를 불러오곤 한답니다.”

“…….”

여전히 경계심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알비레오를 바라보는 샤론.

“저는 사람 마음이,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고작 이해득실을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의 제안이 에버그린 양의 마음을 시험하는 듯 느껴졌다면 사과할게요.”

알비레오는 꾸벅 샤론에게 가볍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다만 쌍둥이들은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는 어린애들이에요. 물론 성년도 지났다지만 제 눈에는 여전히 꼬마로만 보인답니다. 아직은 감정을 지각하는 것도 아직 미성숙하기 짝이 없죠.”

알비레오는 한차례 뜸을 두었다.

“하지만 샤론 양은 아니잖아요? 어른이고,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죠.”

시우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마음은 호기심+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준 은인에 대한 호의에 가깝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고, 또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본 및 지침이 하나도 세워지지 않은 백지상태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와 거리를 둬달라는 말은, 쌍둥이들에게도 기회를 달라는 의미였어요.”

게다가 알비레오가 의도적으로 셋을 갈라놓은 탓에 출발점마저 뒤처진 상황.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기회를요?”

“그래요, 너무 빼앗긴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주는 거지요. 최소한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있게끔 말이에요.”

“저에게는 그럴 자격이 처음부터 없는 걸요… 애초에 시우의 마음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저는 에버그린 양에게도 감사와 존중을 느끼고 있어요.”

사실 알비레오의 말을 조목조목 뜯어보자면 궤변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만으로 막무가내로 샤론을 압박한다는 느낌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애초에 같은 마녀라 해도 살아온 경험이 다른 것이다.

샤론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알비레오는 슬슬 굳히기에 들어갔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절대로 에버그린 양을 내치거나 아예 경쟁에서 배제하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다만 부족한 아이들을 둔 보호자의 마음으로 조금의 양보를 부탁하는 거죠.”

“…….”

“훗날 쌍둥이가 낙인을 계승하게 되고, 그때까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에게도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건 시우 군을 사랑하는 에버그린 양에게도 기쁜 일이겠죠.”

이것이 알비레오가 감추던 쐐기였다.

동시에 샤론의 마음을 강하게 흔드는 말이기도 했다.

직접적인 압박이 없어도 이 정도로 넌지시 흘려준다면 그 속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결정이 곤란하다면 천천히 대답해주셔도 좋아요. 그럼 좋은 밤 되시길.”

알비레오는 멍하게 굳은 샤론의 앞에 계약서를 돌려준 채 방을 나섰다.

2.

“우울해….”

샤론은 무릎을 끌어안고 침대에 기대앉아 있었다.

가슴 속 푸른색 우울함이 복잡한 얼룩처럼 번진다.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심란해지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의 얼굴이 있다.

“보고싶다…”

시우가 보고 싶었다.

10년간의 빚쟁이 생활 겸 거지생활은 샤론이 현세에 진절머리를 내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어딘가 쫓기는 것처럼 불친절하고 딱딱한 사람들, 빚 상환에 대한 압박감, 언제나 텅텅 비어있는 지갑…

다시 생각해도 절대 좋은 기억이 남을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토록 게헨나로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막상 게헨나 안에 있으면서도 타로 타운의 흰고래 주점에 갈 생각도, 키퓌쉬의 케이크나 쿠키를 맛볼 생각도, 아름다운 레노먼드 타운의 산책길을 걸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신 떠오르는 것은 시우와 함께 오피스텔에서 살았을 때 함께 봤던 영화, 그때 갈증이 일어나는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던 맛 없는 맥주.

그와 호문쿨루스를 수색하는 겸 밤의 도시를 돌아더니던 현세가 그립다니…

고약한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건 샤론을 우울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 아니었다.

어차피 시우가 돌아오면 다시 얼굴을 보면 되는 것이고 현세야 나중에라도 함께 나가면 된다.

그러나 속 편히 그의 얼굴을 보기에는 백작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훗날 쌍둥이가 낙인을 계승하게 되고, 그때까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에게도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딱히 악의는 없었을 말이지만 그 말에 샤론은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머리가 차갑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샤론은 지금까지 시우에게 받아오기만 했다.

시우의 돈으로 음식을 사 먹었고, 그의 지원으로 편한 잠자리를 얻었을 뿐 아니라,  덕분에 불완전계승이라는 장애까지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샤론이 그에게 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샤론은 빚쟁이였고 17 위계의 마녀였으니까.

설령 20 위계로 올라서며 스승님께 어깨를 펼 수 있는 마녀가 되었다 한들 일반적인 20 위계의 마녀와 제머나이 백작가의 정식 상속자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까지 시우에게 기대기만 해왔고, 또 앞으로 발목만 잡을 자신이 옆에 남아있는 게 정말 옳은 일일까?

누구보다 시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샤론이 아니라 귀여운 쌍둥이인 것이다.

“…….”

그것도 완전히 헤어지라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 말이었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했겠지만, 정작 알비레오는 애매한 기준만을 말해주었기에 샤론도 고민이 깊었다.

20 위계를 완벽하게 승계받는 것에 성공했다 하여 곧장 제 것처럼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더 이상 그에게 기대지 않고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알비레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시우 옆에 대등한 관계로 당당히 설 수 있을 테니까.

“웃기네….”

샤론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레파토리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는 참 많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행복과 사랑을 포기하는 답답한 여주인공.

제삼자인 관찰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저 답답했다.

그깟 미래가 뭐라고, 그깟 장래가 뭐라고.

함께 있는 것이 더 행복하면 된 거 아니야? 라고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었는데.

이제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어떤 기분으로 그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는지도 알 것 같다.

“후우….”

샤론의 고민은 밤과 함께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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