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81화 (281/917)

#280

1.

깊고 어두운 공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은 거리감마저 앗아간다.

하지만 샤론이 느끼는 것은 어둠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하고 포근한 태내로 다시 되돌아온 듯한 기분.

여기는 무의식의 세계.

마녀가 대를 걸쳐 쌓아온 모든 마법적 자산이 쌓여있는 관념의 공간, 아인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밖에서 어떤 일이 있을까?

지금의 샤론에게 있어 그런 것들은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인격마저 파편으로 변해버릴 것 같은 이 심오한 공간 속에서 그녀는 오롯이 자신의 마법에 집중했다.

아인의 가운데를 독차지한 거대한 십자 형태의 구조물.

다섯 가지 원소의 힘을 아우르는 그것은 원소의 궤이다.

수많은 물, 불, 흙, 바람 그리고 허공의 원소들이 요정의 춤처럼 어둠의 한가운데를 떠돈다.

“아름답다….”

뚜렷한 의식이 없는 상태임에도 샤론은 그것에 경외를 느꼈다.

제각기 차갑고, 따뜻하고, 단단하고, 생명력이 넘치며 그 모든 기운을 아우르는 조화를 관조하며 끝없이 그것을 해석하고 분석한다.

아인의 내부에는 구조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소가 있고, 마력이 있다.

본래 샤론의 것이 아니던, 여태껏 몇 번이나 받아왔던 마력이 거센 물살처럼 구조물을 휘감는다.

-쿠구구구궁!

그리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지를 울리는 진동과 함께 공명하기 시작한 원소의 궤.

“아….”

순간 황홀함에 가까운 지적 쾌락이 샤론의 전신을 강타한다.

그것은 깨달음.

샤론이 처음으로 낙인을 물려받을 때 느꼈던 밀려드는 정보와 지식의 파도.

본디 샤론이 완전히 물려받았어야 할 지식이 흡수되는 과정이었다.

-쿠구구구궁!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이 울릴 때마다 괴사한 신경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궤 안으로 마력이 뻗는다.

불완전계승으로 인해 불능이 되었던 낙인의 파츠가 생생히 부활하는 것이다.

마침내 합당한 권리를 손에 쥔 대마녀의 탄생에 원소들이 기쁜 듯 들썩인다.

샤론을 껴안은 원소 하나하나가 회오리처럼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기꺼이 그 급류에 몸을 맡겼다.

이제껏 이해하지 못했던 모순과 궁리를 돌파하는 강렬한 충격.

눈이 아릴 정도로 환하게 빛나는 빛과 함께….

“아….”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던 샤론의 눈이 떠졌다.

정신을 차리자 기분 좋은 달빛이 비스듬히 쏟아지는 방이었다.

어지간한 서민 4인 가족은 넉넉히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은 넓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지나치게 빛에 민감한 눈을 돌려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어쩐지 예스러우면서도 고급스러운 가구가 즐비하다.

조금 더 범위를 좁혀 보자면 침대 위이다.

뒤통수로 느껴지는 깃털 베개의 촉감은 최상품.

가슴까지 덮고 있는 이불의 촉감도 최상품.

심지어 근사하게 드린 천개마저 일일이 수를 놓은 최상품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정체했던 기억이 의식이 되돌아옴에 따라 뒤쫓아온다.

샤론의 기억에 마지막으로 새겨졌던 것은 그녀의 가슴에 파이크를 꽂아 넣던 익사한 마녀.

그리고 강대한 호문쿨루스 앞에 홀로 남겨졌던 시우.

“시우야!”

근처에 없다는 것을 뻔히 알 수 있는 환경임에도 샤론은 다급하게 소리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까진 이제껏 바라고 바라왔던 완전계승이 완료된 사실 따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크윽! 흐윽!”

고작 땅을 발로 디뎠을 뿐인데 자율방어가 작동한다.

너무 오랫동안 누워있던 탓에 사지가 뻣뻣하게 굳은 것이다.

그때로부터 얼마나 지났지?

시우는 어떻게 됐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허둥지둥거리던 샤론의 몸이 우뚝 굳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언뜻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뭐야…?”

처음에는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샤론을 구해주었다는 사실까진 짐작 중이다.

치료해주고 알뜰살뜰한 간호를 해주었다는 것까지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정원과, 정원 너머로 보이는 풍광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잠시 뇌정지가 왔다.

그렇다.

여기는 현세가 아니라 게헨나다.

조금의 미세먼지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공기와 벨 에포크 시대 느낌이 물씬 나는 방안 풍경이 그것을 다시금 증명한다.

“그렇구나…”

이내 샤론은 납득했다.

“나는 죽었구나…”

그렇게도 오고 싶었던 게헨나로 돌아오고, 스승님이 물려주셨던 낙인도 전부 회복했다.

자기처럼 기구한 팔자를 가진 마녀가 이렇게 잘 풀릴 리는 없지.

이곳은 모든 소원이 행복하게 이뤄지는 사후세계였던 것이다.

그럼 시우 소환술을 쓰면 시우도 나타날까?

아니, 여긴 천국이니까 시우를 부르면 현실에서 시우가 죽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멍한 머리로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는 샤론.

“그런가요? 제 눈에는 멀쩡히 살아있는 것 같은데.”

“히익!”

별안간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샤론을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뒤를 잡혔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조금 전까지 망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1초 만에 마녀복과 완드를 불러내어 척 뒤를 겨눈다.

반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샤론을 바라보는 마녀는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직접 마주한 지는 한참 전이지만 불과 얼마 전에 그녀의 쏙 닮은 여동생과 만나기도 했고 말이다.

“배, 백작님…”

“편하게 알비레오라고 부르세요.”

샤론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황급하게 완드를 등 뒤로 감추었다.

빚쟁이의 본능은 실로 무섭다.

막 깨어나 사리 분별이 안되는 샤론의 머리를 급속냉각해 주었으니 말이다.

“궁금할 것 같아 미리 얘기하는데. 시우 군은 안전해요. 서울에서 소란이 일었지만 잘 해결됐다는 전언이 도착했고요, 또 여기는 제머나이 백작가의 저택이고, 에버그린 양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요.”

“네…?”

“모두 잘 됐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죠.”

한동안 굳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던 샤론.

커다랗게 떠진 그녀의 눈에서 주륵 눈물이 흐른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시우가 안전하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다행이에요…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 모습을 알비레오는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손수건을 건넸다.

“훌쩍…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정말 다행이에요…”

“이야기를 좀 할까요?”

2.

“그… 제가 나눌 말씀이 있을까요?”

숲의 요정 엘프가 실존한다면 대충 이런 생김새가 아닐까 싶은 사랑스러운 외모에 헐렁한 환자용 드레스 위로도 감출 수 없는 큰 가슴과 넓은 순산형 골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알비레오가 생각에 잠긴 동안 샤론의 민트빛 눈동자가 눈치를 보는 것처럼 힐끔거린다.

이러나저러나 제머나이 백작은 채권자고 샤론은 긴긴 세월 동안 제대로 돈을 갚지 못한 악성 채무자이다.

혹시 간병비 같은 것을 빌미로 빚을 추가한다면 샤론은 꼼짝도 없이 지급해야 하는 실정인 것이다.

“후우, 일단 대충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할 것 같아서요.”

“어떤 일이요?”

“최근 시우 군에 관련된 일이요. 이상하게 그는 큼직한 사건에만 휘말리네요.”

어리둥절해 하는 샤론에게 알비레오는 차근차근 근래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 설명했다.

현세에도 다양한 연락망과 정보통을 가진 그녀가 속속들이 사정을 알고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있던 일련의 사건이 비겁의 마녀의 계획이었던 것.

티페레트 공작에게 협력한 시우가 적기사와 비겁의 마녀를 토벌했다는 것.

큰 문제 없이 뒤처리를 끝내고 게헨나에 쌍둥이와 샤론을 만나러 올 예정이라는 것.

시우가 위기에 처했었다는 얘기만을 듣고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던 표정을 짓던 샤론은 크게 잘못된 일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었음을 전해 듣고서야 멈췄던 숨을 쉬었다.

“샤론 양은 혼수상태였죠. 시우 군의 배려로 저희 제머나이 백작가에서 회복을 돕고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몇 번을 감사해도 부족하네요…”

꾸벅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샤론의 정수리 위로 알비레오의 복잡한 시선이 얽힌다.

데네브에게 시우의 근황에 대해 전해 들었던 알비레오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녀관계 정도는 대화를 하며 주변 단서를 유추하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상호 간의 마음이나, 감정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 말이다.

특히 샤론 같은 경우에는 대놓고 단서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확연히 달라진 마력의 질을 생각해 본다면 그녀가 쓰러져있는 동안 불완전 계승을 이겨냈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무의식의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 계기가 되었던 거겠지.

게다가 그녀는 당장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처지다.

그런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시우라니…

시우를 향한 샤론의 호의는 거의 맹목적인 사랑에 가깝다는 것이 알비레오의 진단이었다.

시우 역시 본인은 서울에 남으면서도 샤론의 대피를 우선시했음을 생각하면,

더군다나 두 사람이 변을 당했던 장소가 호텔이었음을 생각하면, 둘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진전되었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동거까지 하고 있다는 듯하니 문자 그대로 불처럼 뜨거운 사이겠지.

물론 시우를 게헨나에서 쫓아낸 것은 알비레오 본인의 선택이다.

쌍둥이와 시우의 관계가 위험할 정도로 선을 타는 것을 눈치챈 알비레오는 적어도 위계 계승이 끝날 때까지라도 셋을 떨어뜨려 놔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었다.

뒤로만 관계를 즐긴다지만 어느 날 불쑥 실수를 일으킬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그 당시에는 쌍둥이를 위한다고 했던 선택이 이제와서는 아쉬운 결정이 되었다.

결국 쌍둥이가 듬뿍 빠져있던 남자를 샤론 에버그린이라는 엄한 마녀에게 빼앗긴 꼴이 되었으니…

5년만 기다려 달라고 약조한 것은 사실이나 현세살이가 팍팍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우를 내쫓았던 장본인이, 그가 쌍둥이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고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고지를 내주었다고 순순히 물러나는 것은 이류다.

알비레오는 알비레오대로 생각이 있었다.

당초 샤론에게 독대를 요청했던 사유를 풀어 놓는다.

“에버그린 양.”

“네.”

“저희 저택에 머물면서 쌍둥이의 가정교사가 되어줄 생각은 없나요?”

“네…?”

“마침 메리골드 남작이 자리를 비우면서 원소 계통 담당 교사 자리가 비었거든요. 에버그린 학파는 현존하는 원소 계통 마법 중에 가장 정통에 가까우니 잘 됐죠. 계약서를 작성해 두었으니 읽어보세요.”

쌍둥이를 위해서라면 비록 떳떳하지 못한 수단이었지만 여기서 슬쩍 개입해 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샤론에게는 미안해도,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도.

사랑하는 딸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

갑작스러운 제안에 계약서를 훑어보던 샤론은 화들짝 놀랐다.

너무나도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쌍둥이는 5년 이내에 반드시 낙인을 계승할 예정.

즉, 최대 계약 기간은 5년.

그 안에 쌍둥이가 낙인을 계승하던, 성취가 부족해 계승하지 못하던 남은 빚은 모두 소멸한 것으로 처리.

융자 때 담보로 잡혔던 연구자료를 모두 되돌려 줄 예정이며 계약 기간 내에 상당한 액수의 연구비, 식비, 주택 겸 공방, 품위 유지비 지원.

마지막으로 계약 기간 종료 시 진리진명 학술회 추천장 혹은 트리니티 아카데미 소개장.

빚은 물론이오 현생과 미래까지 탄탄하게 설계할 수 있는 지원이 약조되어 있었다.

“좋아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샤론은 뛸 듯 기뻐했다.

이렇게만 된다면 더는 시우에게 기댈 것도 없다.

어엿하게 한 사람분 몫을 하며 그와 함께할 수 있다.

수십 년 간 그녀를 괴롭혔던 문제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다.

샤론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달콤한 계약이었다.

“다만 조건이 있어요.”

알비레오는 애써 그런 샤론의 모습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시우 군과 거리를 둬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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