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1.
멕시코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마약, 갱단, 불안정한 치안, 빈민가?
이는 대체로 틀리지 않은 이미지이다.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 부패한 정치인, 중앙정부 이상의 권력과 무력을 보유한 카르텔.
그들은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생산된 마약을 들여오는 밀수 산업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왕국을 세웠다.
대항하는 적대조직, 정치인, 언론인, 군경을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처형하며 공포정치의 기반을 닦았으며.
설령 일반인이라 할지라도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잔인하게 처형해 그 시신을 도로에 널어놓기도 한다.
미국과의 접경지역에 속하는 국경도시 시우다드후아레스를 일례로 들자면 마약 전쟁으로 인해 해마다 1만 명 가량의 사상자가 나오고 있으며 최악의 치안 요건으로 인해 연간 살인율이 10만 명 당 200여 명에 달할 지경이니 흔히 ‘멕시코가 위험하다’라는 인식은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 카르텔의 항쟁과 마약과의 전쟁이 치열한 접경지역에 한하는 이야기로 남부 최대도시 멕시코시티까지 내려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연방정부와 대사관이 모여있는 멕시코 시티는 카르텔이라도 선뜻 건드리기 부담스러운 지역이기에 상당한 안정과 번화를 이루었다.
특히 멕시코 시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폴랑코까지 온다면 16세기 당시 유럽풍 건축물이나 동상 따위가 마천루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있어, 도저히 그 위험한 멕시코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도심의 중앙에는 최악 수준으로 정평이 난 스모그조차 닿을 수 없는 고고한 건물이 하나 있다.
암흑 속에 피어난 별 무리처럼 아름다운 야경을 굽어볼 수 있는 호텔 ‘세인트 레이 멕시코 시티’의 최상층에서 마녀들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에 참여한 인원은 총 4명.
정식 회의가 아니라 개인적인 호출에 의한 소집이라 한들 공적 집단 ‘클리포트’가 한참 맹위를 떨치던 시절에 비하면 반의반도 안되는 인원이었다.
1883년 게헨나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공적이 목숨을 잃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들 모인 게 얼마 만인지 몰라? 20년 전이었던가?”
초대한 모두가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났음을 확인한 ‘욕망의 마녀, 비앙카 벨릴리’는 옆머리를 빙빙 꼬며 웃음을 지었다.
풍성한 상앗빛의 백발은 우아하게 어깨를 타고 흐르고 비취색 눈동자는 어스름한 조명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명명한다.
“니가 왜 상석인 거죠?”
동시에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적하는 마녀의 목소리에도 비앙카는 여유롭게 답했다.
“너희가 내 도시에 왔고, 내가 호스트니까, 내가 상석에 앉는 게 당연하지 않아? ‘클레흐 아스모데’.”
“납득할 수 없고요. 당장 의자를 옮기든지 아니면 술이라도 더 근사한 걸 내오든지 하세요. 이 싸구려를 누구 혀에 가져다 대려는 거에요?”
단 한 명, 뾰족한 목소리로 불만을 표하는 클레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
멕시코의 대규모 카르텔부터 시작해 지방 구석구석 뻗어있던 군소 카르텔을 통합하고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어 낸 것은 다름 아닌 비앙카다.
수만 톤에 달하는 마약과 그 백배는 되는 시체의 산 위에 왕좌를 놓은 만큼 그녀의 말은 과장된 것이라 생각하기 힘들다.
다만 클레흐가 불만을 표한 이유는 두 사람의 관계가 앙숙이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클레흐가 일방적으로 비앙카를 싫어하는 것이지만.
클레흐는 콜롬비아 마약 생산 플랜트의 주인이고 북미로 마약을 유통하는 과정에서 탐욕스러운 비앙카에 의해 어마어마한 돈을 삥 뜯기니 좋은 감정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다.
마법연구는 어찌됐건 적지 않은 돈을 요구하니 말이다.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싸우는 거야? 꼬맹이는 언제나 기운 넘치네~”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있던 수녀복의 마녀가 웃음을 띠며 태여자약하게 말했다.
옷자락이 다소 펑퍼짐한 디자인이지만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감추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닥치세요, 젖탱이만 큰 년아.”
“말이 너무 심하네. 너희 전쟁놀이에 무기를 대주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니?”
클레흐는 꼬리를 밟혀 튀어 오르는 고양이처럼 즉각 시비를 걸어왔다.
어떻게 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
이곳에 모인 마녀들은 악명 높은 ‘클리포트’ 소속의 공적, 그중에서도 특히나 강한 권세와 마법을 지닌 대마녀들.
케테르 공작과 티페레트 공작의 숙청을 피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두었음에도 제각기 세력을 형성한 최악의 공적들이다.
이해관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배를 타고 이따금 협력할 뿐 기본적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적이다.
당장 클리포트에 일원으로 끼어 있던 물병자리의 마녀도 죽음이 확인되자마자 모든 이권과 세력이 물어 뜯겨 공중분해 됐음을 생각하면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임시 소집한 이유를 묻고 싶다.”
건조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소란을 끊어낸다.
마치 붓으로 그린 듯이 새카만 머리카락을 지닌 마녀였다.
서늘한 잿빛의 눈동자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는 1초도 원하지 않은 듯한 기색이다.
“뻔하잖아? 다들 이번 사태에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
“의뭉 떠는 거 존나 역겨워요.”
비앙카에게 빈정대는 클레흐를 모두가 무시하며 자연스럽게 대화가 진행된다.
“비겁의 마녀?”
“그래, 그거 맞아.”
비겁의 마녀는 클리포트와는 아무런 연이 없는 마녀였다.
여기 모인 네 명과는 다르게 마땅히 세력을 짊어지지도 않은 채 혈혈단신으로 돌아다녔으며, 애초에 목적 자체도 완전히 달랐다.
그렇기에 딱히 협력과 협의가 필요하지도 않고 갈등이나 분쟁을 조정할 필요도 없던 공적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비겁의 마녀를 주시하고 있던 것은, 그녀가 아주 훌륭하게 실험쥐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손에 꼽는 대도시에서 사상자 네자릿수에 달하는 재난을 일으켰고, 대량의 인명피해가 일어날 게 뻔한 마법실험을 도심 한복판에서 했어. 하지만 케테르는 움직이지 않았지.”
“속삭임의 마녀가 말했던 대로군.”
“예언기관에서 빼돌린 정보라고 하니 신빙성 자체는 원래부터 높았어.”
“나는 그 간잽이년 마음에 안 들어요.”
여기에 있는 마녀들은 강대한 권력과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물밑에서 암약했을 뿐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억제력이 어디에서 기인했냐를 따지자면 말할 것도 없다.
모든 마녀가 경외하는 케테르 공작, 그녀의 존재 때문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비겁의 마녀의 사태를 보면 예언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잖아? 케테르는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야. 움직이지 ‘못’하는 거지.”
“하지만 그 정도로 확신하기엔~ 너무나 위험이 크잖아? 릴리스가 거짓말치고 돌아다닌 게 한 두 번도 아니고.”
“진실을 고한 적도 있다. 클리포트에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신용할 수는 없지만.”
“다들 미쳤나? 그년이 어떤 년인지 알잖아요? 이제와서 믿네마네 하는 것도 웃기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클레흐의 비웃음.
하지만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클레흐의 어투는 둘째치고 그녀의 말 자체는 합당했다.
릴리스는 결코 신용할 수 있는 마녀가 아니었다.
무엇이 목적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온갖 혼란과 혼동을 조장하고 다니는 속삭임의 마녀.
동업자로 삼기에는 아주 최소한의 신뢰조차 주지 못하는 자다.
심지어 그녀의 마녀명이 무엇인지조차 누구도 알지 못하니 말이다.
“그 박쥐 같은 년의 말을 듣고 떠벌떠벌하려고 날 불러들인 거라면, 갈래요. 들을 가치도 없네요. 우둔하긴.”
“이하 동문이야~ 난 아직은 지켜보고 싶은걸?”
“자자, 그러지들 말고. 내 말을 들어봐.”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려는 듯 어수선해지는 분위기를 비앙카가 손뼉을 쳐 정리한다.
집중된 이목 가운데 비앙카는 태연자약하게 도발을 늘어놓았다.
“다들 케테르가 무서워 벌벌 떨며 사는 것도 지겹지 않아? 솔직히 웃기잖아. 예전에는 공적이니 뭐니 하는 개념도 없었어. 마녀가 마법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일은 당연한 거였지. 이 부자유와 억압 속에 우리를 밀어 넣은 장본인이 침묵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그림자가 무섭다고 영원히 웅크리고 있을 예정이야?”
“그것은 같은 말의 반복이다. 나는 아직 ‘예언’을 믿을 수 없다.”
“그래, 하나의 사례로는 부족하다는 말인 거 알고 있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소집한 거야.”
비앙카는 본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직도 속삭임의 마녀를 믿지 못하는 거라면 내가 두 마리째의 실험쥐가 될게. 모두가 무서워하는 돌다리를 대신 건네주겠다는 거지.”
“그거 좋은데? 콱 뒈져 버렸으면 좋겠네요.”
클레흐는 악담을 쏟아부으면서도 솔깃한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다시 한번 예언을 증명해 보일게.”
“맨입으로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성배를 들리는 없고, 아하~ 그런 거구나.”
“대신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로 여기 모인 너희들이 편의를 보장해줬으면 좋겠어.”
그렇다.
지금 비앙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케테르 공작이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는 예언을 검증하는 대신 여러 이권을 챙겨달라고.
이 자리에 모인 마녀들은 하나 같이 비앙카의 밑천 사업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자들이다.
“너희가 소박한 호의를 보인다면, 나는 성의를 다해 그럴듯한 결과를 내놓을 거야.”
“…….”
비앙카의 의도를 알아차린 즉시 다른 마녀들 역시 머릿속 계산기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공적들에게 케테르의 존재는 발밑에 깔린 대전차지뢰에 가깝다.
지금은 눈치를 보며 위에서 살살 뛰어다니고 있지만, 결국 언제 터질지 모르는 족쇄이자 벽.
속삭임의 마녀가 전해주고 간 ‘예언 기관’의 예언이란 가벼이 넘어갈 것이 아니다.
천년이 넘는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빗나간 적 없던 예언을 내려준 기관이다.
물론 릴리스는 전혀 신용할 수 없는 마녀지만, 그녀가 변덕을 부려 정확한 사실을 전달해 준 것이라면?
부담스러워 펼치지 못했던 마법 실험과 사업을 마음껏 해낼 수 있다면?
게다가 그 목숨을 건 시행착오를 누군가 대신해준다면?
선뜻 거절할 수 없는, 충분한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는 솔깃한 제안이 되는 것이다.
“난 좋아~”
“나 역시 좋다.”
“니가 죽으면 네 꼭두각시도 내가 먹어치워 줄게.”
“이야기가 빠르네.”
모두가 비앙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면 더 많은 것을 뜯어낼 수 있겠지만 여기서 만족한 비앙카.
그 뒤로 일은 술술 진행되었다.
비앙카는 목숨을 거는 비용에 비하면 소박한 것을 요구했고 심지어 대가의 절반 가량은 확실한 실험 이후에 받는 것으로 약조했다.
나머지 세 마녀가 의아해할 정도로 저자세로 끝이 난 협상이었다.
“좋아, 우리가 서로 얼굴 맞대고 화기애애하게 담소 나눌 사이도 아니고 이쯤에서 끝낼까?”
“나도 네 역겨운 목소리 더 듣고 싶지 않거든요?”
“…….”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마~ 그래도 꽤 오래 보고 지낸 사이잖아~”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짝!
비앙카가 다시금 박수를 치자 소란이 가셨다.
어둑히 켜져 있던 호텔 전체의 조명이 켜지며 일변한 회의 테이블.
“끄으윽…끄르르륵…!”
요란스럽게, 고요하게, 느긋하게 테이블을 점령하고 있던 세 마녀는 더는 없다.
대신 입과 눈에서 피거품을 흘린 채 죽어가는 인간 세 명 앞에 비앙카는 태연히 앉아있었다.
의사총체를 통한 이혼의 마법.
비앙카를 제외한 다른 마녀는 멕시코 시티까지 먼 걸음을 한 것이 아니라 마법을 통해 이 자리에 참석해 있던 것이다.
물론 마녀의 막대한 지식과 마력을 일반인이 맨몸으로 받아낼 수 있을리 없다.
불쌍한 희생양은 술식이 끝나자마자 뇌가 뭉개지며 죽어가겠지만 그건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읏…!”
비앙카가 별안간 뜨거운 탄식을 내뱉는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마녀에게는 보이지 않던 사각에서, 비앙카의 치맛자락 사이로 기어들어 가 있던 누군가가 회의 시간 내내 은밀한 곳을 핥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못 참을 뻔했네. 이제 됐어. 나오렴.”
쩍 벌리고 있던 다리 사이로 누군가가 주춤주춤 기어 나온다.
어깨 아래에서 부러지는 단발, 가련한 꽃과 같은 신체라인.
피에 절은 듯한 루비 같은 눈동자가 두려운 듯이 비앙카 벨릴리를 올려본다.
마녀가 아니고서야 지닐 수 없는, 어느 곳에도 흠잡을 수 없는 가련한 얼굴에는 찐덕한 애액과 침이 덕지덕지 붙어 몹시 천박해 보인다.
“요새 아주 솜씨가 늘었는데? 우리 에아.”
“….…”
얼마전 비앙카가 거둔 애완견,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하던.
그 마녀의 정체는 에아 사달멜리크.
악명 높던 물병자리의 마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