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1.
엘로아가 있는 힘껏 준비한 비장의 코스 요리가 오피스텔 부엌 한 상을 가득 채우고.
두 사람은 파티를 한껏 즐겼다.
뭔가를 꾸미고 있는 공적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갑자기 사라진 호문쿨루스 때문에 신경 쓸 것도 없고, 수상쩍고 흉흉한 점괘에 불안할 것도 없는 평화.
특히나 엘로아로서는 이런 심신의 평화가 굉장히 오랜만이기에 더욱 기꺼이 시우가 건네는 술잔을 뱃속으로 털어 넣었다.
식사가 끝난 뒤엔 번잡한 식탁을 피해 거실로 술상을 옮겨 2차.
식료품 코너의 구석에서 치즈나 살라미 같은 안주류를 잔뜩 집어왔는데 어느새 절반 가까이 동나버렸다.
굴러다니는 위스키 술병만 해도 5개나 되고 말이다.
“흐으으음….”
아릿한 알코올의 축복으로 마음의 짐을 덜어낸 엘로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사실 몸이 편하냐 불편하냐를 따지자면 후자 쪽에 속했다.
지난 계약의 대가로 인해 그녀의 몸은 이곳저곳이 삐걱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몸 곳곳 미세혈관이 터져나간 탓에 전신에 푸른 멍이 가득했으며, 평상시 예민하기 짝이 없는 기감과 시력마저 저하되어 있다.
또… 남에게 말 못 할 이야기지만 꽤 격렬하게 꽃을 꺾인 탓에 아랫배에도 뭉근하게 뭉쳐있다고 해야 할까?
“피곤하신가요?”
“피곤이라니, 무슨 소린가? 이런 경사스러운 날을 즐기려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는 술잔을 기울여야 하는 법이라네.”
거나하게 취한 까닭인지 엘로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높고 반쯤 꼬부라져 있었다.
어지간하게 술을 먹어서는 티도 안 나는 그녀인데 지금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어 화장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눈도 반쯤은 감긴 것처럼 보이고 말이다.
“한 잔 더 따라보게나.”
“아직 몸도 안 좋으신데 여기서 더요?”
“문제없네, 문제없어.”
뭐, 마녀인 이상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급사할 일은 없지만… 시키는 대로 술을 따르면서도 이래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스승님이 이 정도로 쾌활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기에 시우는 비틀비틀 흔들리는 엘로아의 잔에 술을 마저 채웠다.
‘그대도 한 잔 받게’라고 말하며 시우의 술잔에도 콸콸 위스키를 부어주는 엘로아.
오늘 밤에만 몇 번인지 모를 잔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정중히 고개를 돌려 술을 마신다.
-꼴깍 꼴깍
시우가 찔끔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동안 엘로아는 또다시 거의 가득 찼던 위스키를 원샷으로 비워버렸다.
저거 온더록스 잔인데…
애초에 위스키가 저렇게 마시는 술은 맞나?
몇 번을 봐도 신기한 진풍경에 기가 막힐 무렵.
엘로아는 파자마 소매로 입술을 쓱 훔치더니 몸을 좌우로 갸우뚱거렸다.
한동안 눈을 꾹 감고 있다가 게슴츠레 뜨며 시우를 본다.
“시우.”
“네, 스승님.”
별안간 이름을 부르는 엘로아.
하지만 시우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엘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시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릴 뿐.
“스승님? 하실 말씀 있으셨던 것 아닌가요?”
“…아무것도 아닐세. 이제 슬슬 자야 할 시간이다 싶어서 말이네.”
“그럼 술자리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굴러다니는 빈 병을 챙기는 시우.
잔뜩 벌여놓은 술판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침실로 이동해 이부자리를 폈다.
얼마 전부터 시우의 방에 침대 2개를 가져다 놓고 조금 널찍이 떨어져 생활 중인 두 사람이었다.
시우의 흉괘를 전해 들은 엘로아가 만의 하나의 사태에 대비하여 옆자리를 지켰으니 말이다.
그 말인즉슨 위기가 지나고 난 지금은 굳이 한방에서 잘 필요는 없다는 뜻.
그러나 미처 침대를 옮길 시간이 없었고 두 사람도 어느새 같은 방에서 자는 것에 익숙해졌기에 엘로아 역시 별말 없이 시우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잘 정리해 두었습니다.”
“고맙네.”
엘로아는 비틀비틀 걸으며 다가오더니 침대에 그대로 푹 엎어졌다.
“스승님 그쪽은 제 침대인데요?”
“…….”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그대로 격침해버린 듯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어도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긴 빗물 터널에서 고생한 것은 시우보다는 엘로아 쪽이었고 술고래처럼 위스키를 마셨으니 저렇게 곯아떨어질 법도 하다.
그렇다고 저대로 둘 순 없었다.
남의 침대에서 자는 건 그렇다 쳐도 스승님은 다이빙하듯이 침대 위로 몸을 던져 대자로 뻗은 상태.
결코 숙면을 위한 자세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앙증맞은 두 발이 침대 옆으로 비스듬히 삐져 나와 있는 데다가 코를 이불 위에 처박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스승님, 이대로 주무시려고요? 좀만 더 편하게 주무시죠.”
“흐음…음….”
불러도 웅얼거리기나 할 뿐 제대로 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
좀 바로 뉘어주고 베개도 주고 이불도 덮어주려던 시우지만 정작 엘로아의 몸에 손이 닿으려는 순간 망설여졌다.
사실 시우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 당시의 기억이 남아있었다.
빗물 터널에서 마력의 공급이라는 명목하에 시행되었던 사제섹스를.
엘로아가 기습적으로 마녀의 체취를 맡게 해 시우를 유혹했고, 시우는 그대로 엘로아를 덮쳤다.
그것도 짐승처럼 격렬하게 말이다.
사제지간의 금기(禁忌)니 뭐니 그런 엘로아처럼 명확한 인식은 없는 시우지만서도 마냥 평소처럼 대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언제나 자애로운 얼굴로 시우를 바라보던 그녀가 애타는 듯한, 녹아내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글썽이던 것.
근엄한 목소리가 달콤한 울음소리로 변했던 것.
풋풋한 체취.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으로 꽉 잡아주는 듯하던 뜨거운 속살의 감촉과 완벽한 형태의 복숭아 엉덩이까지.
특히 마지막은 오늘 저녁 과일 코너에 가서 복숭아만 봐도 발기할 뻔했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비록 응급상황이었고 구인행위를 위해서였다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문득 술자리에서 눈이 맞아 원나잇을 보낸 인싸 남여사친처럼 태연하게 굴라는 것은, 시우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술자리 내내 묘하게 거리를 유지하지 않았던가?
평상시 자연스럽게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가볍게 껴안아 주곤 하던 엘로아가 은근히 그런 행위를 지양하는 것도 시우가 유독 의식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도 뭐. 편하시라고 하는 거니까.”
시우는 머뭇거리다가 엘로아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파자마 위로도 느껴지는 그녀의 탱글거리는 살결에 깜짝 놀란다.
거기에 알코올이 잔뜩 올라왔기 때문인지 뭔가 평소보다 훨씬 뜨끈뜨끈한 느낌이다.
딱 그녀를 품었을 때처럼 말이다.
“…….”
도둑질하는 것처럼 목이 탔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팬티 선을 고스란히 드러낼 정도로 얇은 파자마 하의도,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탱글한 엉덩이와 올라간 파자마 상의탓에 살짝 비치는 맨살도.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뇌에 인식되는 기분이다.
“어휴….”
시우는 자괴감을 느끼면서 엘로아를 끙차 들어 올렸다.
가뿐하게 들어 올린 뒤 애당초 목표대로 그녀를 바로 눕히고 이불까지 잘 덮어주었다.
“정신 나갔지.”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다.
얼마 전 유별난 일을 겪어서 그런 것이다.
애써 합리화한 시우는 원래 엘로아가 사용하던 침대에 털썩 누워 잠을 청했다.
2.
시우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맞은편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후우….”
죽은 듯이 자는 척을 했던 엘로아는 실눈을 떠 곤히 잠든 시우를 확인하고는 그제야 긴 한숨을 내뱉었다.
술 냄새가 풀풀 나는 날숨이 손등을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어제 시우와 함께 반나절에 가까운 긴 수면을 취했기에 계약의 대가로 치르는 수면시간은 이미 충분했다.
따라서 엘로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정신이었으며, 잠이 들지도 않았다.
시우가 그녀를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제대로 눕혀주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왜 그랬던 건지…”
엘로아는 의문에 잠겼다.
누구에게 할 것 없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의문이다.
왜 자는 척 따위를 한 걸까?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
그러나 다양한 원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에는 진짜 원인을 찾는 것에 한참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마음이 복잡하다.
뭔가 중요한 것들을 계속 얼버무리고 있다는 감상이 쉽사리 가시질 않는다.
“…….”
엘로아는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이 든 시우를 바라보았다.
무너져가던 엘로아를 지탱해 준, 죄악감에만 얽매여있던 그녀를 빛으로 인도해준 사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제자, 신시우.
별안간 가슴이 따끔거린다.
자신은 얼마 전 죄를 저질렀다.
그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독단으로 그를 유혹했으며 몸을 포갰다.
아니, 몸을 포개었다는 것은 굉장히 점잖은 표현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교를 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임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어쨌건 그의 의사를 무시하고 억지로 섹스를 종용한 셈이니 말이다.
완고하고 고지식한 엘로아의 사고방식이었더라면 진작에 사과의 말을 전함이 옳았다…만.
“으으….”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다.
상황이 상황이었다 한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 한들.
그때 시우에게 보였던 자신의 추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얼굴이 터질 것만큼 달아올라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한편 시우는 이 일을 없던 것으로 덮어버릴 생각으로 보인다.
구태여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것도 그렇고, 평소와 다름없이 엘로아를 대하는 것도 그렇다.
아니면 엘로아가 먼저 사과를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못난 스승이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저 덮고 넘어가려 한다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이런 오만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아…”
엘로아는 나지막한 탄식을 뱉었다.
비로소 왜 자신이 자는 척을 했는지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시우가 먼저 엘로아에게 접근하지 않고 반대도 마찬가지인 이상, 그가 몸에 손을 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반응을 떠보려 했다는 것을.
물론 시우는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아무런 이상한 행위 없이 엘로아를 편히 눕혀주었다.
일전 맨가슴을 그의 앞에 드러냈을 때처럼 말이다.
실로 얄팍했고, 그 때문인지 아무런 수확이 없는 헛짓거리였다.
아무튼 추가로 말하자면.
그에게 스승다운 모습을 보이고 의연히 넘어가려 해도 그날의 강렬한 기억이 덮쳐든다.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가 자기엔 도의적으로 옳지 않을뿐더러 시우를 실망시킬까 두렵다.
침대가 꺼지라 한숨을 쉬던 엘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저기 이불을 걷어차고 잠든 시우가 보인다.
엘로아는 공연히 일어나 그의 옆에 걸터앉았다.
좋은 매트리스라 그런지 흔들림도 없이 편안히 걸터앉은 엘로아.
“후후….”
복잡한 마음은 별개로 아이처럼 잠든 그의 얼굴을 보니 절로 미소가 나온다.
무릎을 두드리면 다리가 올라오는 것 같은 무조건반사랄까?
아마 이 마음은 스승이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가지는 인지상정이겠지.
“흐음….”
엘로아는 시우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다 시선을 돌렸다.
공교롭게도 그 끝에는 그의 거친 입술이 놓여있다.
지난번 엘로아의 것과 포개지고, 거칠게 그녀와 호흡을 교환했던 까슬한 입술이.
술 기운 때문인지 엘로아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방금 시우를 바라보며 느꼈던 것이 제자를 보며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면…
이것은 뭘까?
느슨하게 벌어졌던 허벅지가 확 움츠러들면서 새삼 술기운이 몸을 뜨겁게 만든다.
정말로 시우와 키스했더랬지, 그의 앞에 교미하는 암컷처럼 엉덩이를 내밀고 끝내는 뜨거운 정(精)을 받았더랬지…
되살아난 회상은 마치 뱀처럼 엘로아의 마음과 몸을 동시에 휘감는다.
그저 관전하는 것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열기, 하나가 되는 듯한 일체감, 그의 거친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긴 채 녹아내렸던 황홀한 열락.
엘로아의 시선이 힐끈 시우의 가랑이 사이를 향했다.
사고의 흐름에 따른 본능적인 시선이었다.
당연히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웅장한 물건의 윤곽은 옷 위로도 존재감을 과시한다.
“저게… 나의 몸 안에…”
어느새 슬며시 벌어진 엘로아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새어 나온다.
이미 한참이나 지난 일임에도 몸에 각인된 것처럼 강렬했던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려 한다.
-짝!
엘로아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힘껏 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망측하기 짝이 없군….”
해서는 안 될 생각이다.
제자를 상대로 음심을 품는 스승이라니!
넘어서는 안 될 선을 한 번 넘었다고 하여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경계가 된 것은 아니다.
술에 취해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렸나 보다.
엘로아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날밤 엘로아는 영문모를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한참이나 냉수마찰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