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77화 (277/917)

#276

1.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을 커다란 재난이 지나갔다.

돌이켜 생각하면 몇 번을 생각해도 간 떨리는 순간뿐이었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백기사나, 무시무시한 적기사나.

누구 한 사람의 힘이라도 모자랐더라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극심한 소모를 겪고 계약 대가의 이행이 밀려있는 엘로아도.

온몸에 잔 상처를 가득 입고 적기사와 마주했던 시우도.

붉은가지를 들고 위치포인트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뻗어 온종일 침대에서 피로를 회복했다.

아무리 영체라 한들 이 정도까지 굴리면 수면이 필수적인 것이다.

시우와 엘로아가 곯아 떨어진 동안 수아 지부장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모든 일은 수아가 펼쳐두었던 거대한 이면결계 내부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뒷정리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조력을 약속했던 두 마녀의 유해를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는 것.

본디 마녀라는 존재 자체가 두루두루 알고 지내는 경우도 적을뿐더러 이번에 적기사에게 살해당한 두 마녀에게는 견습마녀가 없었기에 일 처리가 한결 빨랐다.

시우는 이번 토벌의 공로를 인정 받아 붉은가지의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사실 엘로아가 전부 힘을 빼놓은 것을 막타만 친 것이라 이렇게까지 대단한 걸 받아도 될까 싶어 거듭 거절했다.

하지만 수아 지부장의 경우에는 워낙에 시우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마찬가지인 엘로아는 이미 계약검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예장을 들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시우에게로 전리품이 돌아왔다.

그렇게 붉은가지의 수여까지 끝낸 이후.

엘로아, 시우 그리고 델라가 빗물 터널의 공동에 모였다.

제단이 설치되고, 파올라가 최후를 맞이한 공동이었다.

“시작하게나.”

일이 벌어지는 동안 서울을 뜨지 않고 위치포인트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던 델라.

그녀는 굉장히 우울하고 슬픈 눈빛이었다.

시우가 기억하기로 원래는 굉장히 표독스러운 느낌을 풀풀 풍기는 불여우 상이었는데, 지금은 속눈썹이 아름답게 뻗은 눈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져 있다.

델라는 여느때처럼 붉은 드레스가 아닌 검은 그레스를 입고, 부서진 연꽃의 잔해 아래 쓸쓸하게 죽어있는 파올라의 앞에 섰다.

새하얗게 한쪽 눈을 치켜뜬 채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손으로 머리를 쓴다.

“이제 그대의 생명을 진리의 빛으로 돌려보내니. 그대를 옭아맸던 미혹의 사슬을 풀라. 죽음은 육신의 껍질을 벗고 진리로 나아가는 성스러운 의식일진저…”

델라는 파올라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수아 지부장에게 장례를 치르게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일반적으로 마녀의 장례식은 ‘견습마녀에게 낙인을 물려준 선대’를 기리는 의식이다.

이 경우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증거가 되므로 암울한 분위기에서 치러지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후대를 남기지 못한 마녀 같은 경우는 지금처럼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가까운 지인들이 지켜보는 아래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네자릿수에 달하는 인명 피해와 10명이 넘는 마녀를 죽인 공적이 이토록 멀쩡히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적은 마녀 사회의 규칙을 어긴 자들.

정상적인 마녀는 그런 범죄자들의 처우에 대해 가차 없었다.

일반적인 경우였더라면 시신을 게헨나로 보내 ‘첫 번째 붉은 지붕 살롱’에서 경매에 부치거나, 아니면 시신을 손에 넣은 마녀가 연구재료로 사용했겠지.

델라는 전 재산을 위치포인트에 기부하고 시신을 양도받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수아 지부장은 그다지 고민하지 않고 윤허했다.

비겁의 마녀가 사고를 치기 전에 수습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델라가 제공한 정보 덕이니 말이다.

파올라가 언제든 죽일 수 있었던 델라를 살려두었음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얄궂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전까지 파올라의 행방을 감춰주었던 델라를 마냥 신뢰할 수도 없기에, 엘로아가 참관하는 자리에서 장례를 마무리 짓기로 이야기가 끝났다.

“그 육신을 신성한 불로 태워, 흙은 흙으로,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리라.”

델라의 짧은 추도문과 함께.

발치에서 불길이 솟아 공동 전체를 불태운다.

연꽃을 피워내고도 조금 남았던 제단의 찌꺼기, 반쯤 부서져 내린 연꽃, 싸늘하게 식은 파올라의 몸까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화염 속에서 타들어간다.

연기조차 나지 않는 백색의 불길로 모든 것을 일소한 델라가 구두 굽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용암처럼 치솟았던 모든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편히 쉬소서.”

멍한 눈빛으로 파올라가 앉아있던 자리를 지켜보는 델라.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를 비워주었다.

다른 업무로 몹시 바쁜 수아 지부장을 위해 대신 장례를 참관하느라 거의 일어나자마자 지하수로로 향했던 엘로아, 그를 뒤따라온 시우.

“…….”

“…….”

솔직히 잠도 덜 깼고,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반쯤은 비몽사몽이었기에 별다른 생각을 떠올릴 새가 없었는데.

막상 저런 장면을 보고 나니 뭔가 입맛이 썼다.

비겁의 마녀가 무시무시한 학살자라는 건 알고 있다.

미친년 중의 미친년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저 연꽃이 잃어버렸던 자신의 제자를 살려내기 위해 피워낸 것이라는 전말을 듣고, 또 쓸쓸하게 혼자 죽어있는 모습을 보자 썩 개운치가 않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의 죄가 참작 받을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수직배기구를 빠져나오자 여느 때처럼 분주하기 짝이 없는 서울 시내가 보인다.

널따란 도로를 꽉꽉 채운 차들도 보이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며 삼삼오오 지나가는 회사원도 보인다.

기분 좋은 가을바람과 석양, 그리고 사람들 살아가는 소리가 적당한 비율로 조화된 시내였다.

슬쩍 옆을 바라보다가 문득 엘로아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상념에 빠져있던 것 같던 멍한 눈에 생기가 돈다.

썩 시원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는지 엘로아가 물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는가?”

“뭔가… 생각보다 개운하지 않네요.”

이 평화를 지켜내는 데 아주 조금은 일조를 했다고 생각하면 또 뿌듯하다.

어찌됐건 시우가 아니었더라면 적기사는 엘로아를 죽였을 것이고, 다시 돌아가 난동을 부렸겠지.

그랬더라면 이 평화로운 일상도 참혹한 학살의 단말마에 더럽혀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우는 꾹꾹 담아 두었던 속말을 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정말 이상한 이야기겠지만요. 저는 비겁의 마녀가 조금 안타깝다고 느꼈어요.”

“그렇겠지. 그대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거의 즉답으로 들려오는 오글거리는 대사에 시우는 주춤했다.

당황스럽다는 기색으로 엘로아를 바라보아도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시선으로 되려 시우의 눈을 마주 봐왔다.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너무나도 올곧은 신뢰의 눈동자였기에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다.

솔직히 과분한 평가라고 생각 중이다.

“그, 그렇다 치고요.”

“그렇다 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네.”

“네, 뭐….”

어쩔 줄 몰라하는 시우의 모습을 보던 엘로아가 살포시 미소를 띠었다.

아리따운 얼굴에 곧은 눈길, 거기에 꽃 같은 미소까지 더해지자 도저히 얼굴을 맞대고 있을 수 없어 살짝 고개를 돌리는 시우.

“그대가 왜 나를 그렇게 골려대는지 알 것 같네. 그대도 이런 반응이 보고 싶어 매번 내 옷이랑 요리를 칭찬했던겐가?”

“골려대다뇨, 그냥 칭찬해드린 것뿐인데…”

“나 역시 칭찬을 하고 있을 뿐 아닌가?”

엘로아는 뒷짐을 진 채 걸음이 빨라진 시우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은근히 장난을 걸었다.

지금껏 시우와 엘로아가 가까워졌다 한들 이렇게 장난스러운 모습까지 보인 적은 없었는데…

아무튼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기분 좋은 듯이 보조개 핀 웃음을 짓던 엘로아는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세상의 일들은 칼로 잘라낸 듯이 딱 나뉘어 일어지지 않는다네. 사악하기만 한 인간도 없고, 선하기만 한 인간도 없지.

그대가 비겁의 마녀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선한 면모를 보았기 때문일 걸세. 그대가 나에게 그래 주었던 것처럼 말이야.”

“제가 또 뭘 해드렸다고 그러세요. 그만하시죠, 이젠 안 넘어갑니다.”

영락없이 엘로아가 장난을 거는 줄로 착각한 시우는 경계하는 모습을 취했다.

어찌나 표정이 완고한지 결코 쑥스러워하거나 멋쩍어하지 않겠다는 강한 다짐이 느껴진다.

하지만 엘로아는 결코 거짓을 말하거나 그를 치켜세우기 위해 억지로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비록 오해였다고는 해도 대뜸 초면에 주먹을 꽂아 빈사 상태로 몰아넣었던 엘로아를.

심지어 그의 친구까지도 겁박하며 끝끝내 의심을 거두지 못했던 엘로아를.

그는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고 용서해주었다.

그뿐이랴?

아무런 관계가 없을 그녀를 위해 위로해주고, 곁에 있어 주었다.

집착과 망상에 가까웠던 걱정을 듣고 제 안전을 챙기기 위해 게헨나로 피신했던 것이 아니라 함께 싸워주었다.

결국엔 위기에 빠진 엘로아를 구해내고 적기사까지 잡아내었지.

그리고 그 뒤에 마력이 부족했던…

엘로아는 탁하고 생각을 끊어냈다.

불필요한 생각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다해도 그녀의 뺨이 달아오른 것은, 비단 건물 사이로 내리쬐는 가을 석양이 내려앉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엇…!”

절대로 그녀의 장난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시우의 다짐은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엘로아가 별안간 시우의 손을 꼬옥 잡았기 때문이다.

깍지를 꽉 껴서 잡는다거나 그런 의미심장한 접촉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눈빛만큼이나 따뜻하고 신뢰 가득한 손길이었다.

“고맙네.”

엘로아는 그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가 그의 손등에 슬쩍 뺨을 가져다 대었다.

달리 특별한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냥 이렇게 하고 싶었다.

말랑말랑한 엘로아의 뺨이 손등에 꾹꾹 눌린다.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와 맞닿자 탁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불경한 생각이긴 해도… 그녀의 온몸이 이렇게 부드럽고 매끄러웠다는 기억이었다.

조건반사로 떠오른 야릇한 회상에 곤경에 처하기 전, 엘로아는 먼저 뺨에서 손을 떼고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인가?”

“우선 게헨나에 샤론을 데리러 갈 생각입니다. 쌍둥이들이 놀러 오라고 했던 것도 기억에 남고…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싶은 분도 있어서요.”

“역시 그런가?”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시우가 샤론의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엘로아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표정 변화에 오히려 자신이 놀랐다는 듯이 다급히 다잡는다.

그러나 이어진 시우의 말에 애써 가꾼 표정 관리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스승님도 함께 가실래요? 게헨나.”

그렇게 제안해줄 것이라 예상이야 했다지만, 그 말이 뭐라고 이렇게 기쁜지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려는 것을 꾹 억누르는 엘로아.

“물론이네. 어차피 계약의 대가가 이행되는 동안은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으니 말이야.”

고개를 슬쩍 숙이고 괜스레 입술을 매만지는 엘로아.

저건 시우가 최근에 알게 된 엘로아의 습관 중 하나인다.

그녀는 무척 기분이 좋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을 때 저런 동작을 취한다.

“시우.”

“네, 스승님.”

예상대로 한껏 텐션이 올라간 목소리의 엘로아가 척하고 손가락으로 백화점을 가리킨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까지 오게 된 모양이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큰일을 해내지 않았나. 마냥 궁상을 떨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자축 파티라도 하는 게 좋겠지.”

“그거 좋은데요?”

“요리는 내가 준비하겠네. 오랜만에 온종일 취해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야.”

놀이동산 입구를 보고 신나는 아이처럼 방방 들뜬 엘로아를 보니 시우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새겨졌다.

가끔 이런 모습 보면 스승님이 아니라 귀여운 여동생을 보는 느낌이다.

“자, 폐장까지 얼마 남지 않았네.”

“아직 7시밖에 안 됐는데요? 3시간이나 남았는데.”

“오늘은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를 총동원해주지. 쇼핑 시간이 5시간이라도 모자랄 걸세.”

아직 전투의 후유가 남아있음에도 깃털 같은 발걸음으로 식료품코너로 향한 두 사람은 카트 두 대 분량을 꽉꽉 채울 동안 한참이나 쇼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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