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1.
싸움은 끝났다.
두 사람의 격차가 너무나도 압도적인바, 파올라는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엘로아에게 당하고 말았다.
물론 이것은 엘로아가 어느 정도 마력을 회복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적기사와 싸운 직후의 엘로아였더라면 저 징그러운 촉수에 휘감겨 한 입 거리 간식이 되었을 것이다.
엘로아는 찬연한 빛으로 빛나는 연꽃 앞에 섰다.
그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연꽃에 기대듯이 누워있던 파올라가 끈적한 울혈과 함께 필사적인 목소리로 엘로아를 멈춰 세운 것이다.
“기…다려…!”
놀랍게도 파올라는 심장을 꿰뚫리고도 잠시간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호문쿨루스에게 몸을 동화하면서 그 끈질긴 생명력 일부를 이어받은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죽음의 시간을 유예받은 것일 뿐이다.
“…….”
엘로아는 다시 계약검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목을 쳐내 고통을 덜어줄 심산이었다.
“멈춰… 제발, 내 얘기를 들어봐…!”
파올라는 다급하게, 피로 벌겋게 물든 이를 드러내며 엘로아를 올려보았다.
아직도 왈칵거리며 진한 혈액을 내뿜는 가슴의 상처.
적합한 조치가 없다면 비겁의 마녀가 맞이할 운명은 명약관화였다.
엘로아는 검을 휘두르려던 자세 그대로 우뚝 멎었다.
일직이 많은 공적이 엘로아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공포에 짓눌려 싸움에 돌입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비를 애원하던 마녀도 있었다.
그러나 엘로아는 단 한 번도 검을 멈추거나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인 적 없었다.
대신 묵묵히 스스로 짊어진 업을 수행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죽였고, 견습마녀를 죽였으며, 같은 마녀를 죽였다.
그 어떤 그럴듯한 대의명분이 있다 한들 그것은 잘못된 일이며, 단죄받아야 할 죄악이다.
거기엔 어떤 타협이나 호소, 또는 동정심 따위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아니, 이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엘로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사실 도망칠 곳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무너져 버린 삶의 목적을 지탱하기 위해 복수심이라는 거무튀튀한 감정을 동력으로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을.
“…….”
그러나 칼같이 망설임을 잘라내던 엘로아도 비겁의 마녀에 한해서는 예외였다.
파올라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임은 부정할 수 없다.
“당신도.. 알고 있잖아… 잃는다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자기 실수로 견습마녀를 잃고,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게… 얼마나 괴로운 건지도.. 알고 있을 것 아니야…!”
파올라는 필사적이었다.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게 된 주제에, 입을 여는 것만으로 구멍 뚫린 폐가 괴로울 주제에.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절절하게 엘로아에게 외쳤다.
“나도… 나도, 당신과 똑같아… 그렇다면 이해해 줄 수도 있는 거잖아… 당신이라면,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잖아…”
또한 엘로아가 쉽게 검을 내리그을 수 없는 것은 파올라의 호소가 그저 자신의 목숨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코 비루한 생을 연장하기 위해 엘로아에게 동정을 사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던 게 아니야… 한낱 마법 따위 때문에 이랬던 게 아니야… 당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 나는, 그저, 돌이키고 싶었을 뿐이야!”
파올라 역시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죄악감을 느끼며, 자책을 느끼면서.
과거를 다잡기 위해 무엇이든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가련한 처지였다.
공적과 호문쿨루스의 목을 벨 때.
자신의 행위가 진정으로 정의를 위해서였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우연히 라피가 남겼던 말이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요’ 였고, 복수의 대상이 공적이었으므로 공적과 호문쿨루스를 사냥해왔을 뿐이다.
만약 비겁의 마녀에게 원망할 대상이 달리 있었고, 조금만 더 제대로 된 말을 들어줄 사람이 곁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해하네. 그대의 아픔, 비탄, 슬픔, 비애 모두…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네.”
비겁의 마녀, 파올라 소치틀은 엘로아 티페레트의 일그러진 거울이었다.
만약 라피의 마지막 말이 없었더라면.
엘로아가 슬픔과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영락했더라면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엘로아는 한쪽 무릎을 꿇고 비겁의 마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자홍빛의 시선에는 연민과 동정이 서려 있다.
거기서 일말의 희망을 찾은 것일까?
비겁의 마녀는 더욱 열변을 토하며 흐느낀다.
“여기… 결과가 완성됐어, 이 연꽃만 있다면 당신의 견습마녀도 살릴 수 있어…! 조금만 못 본 척 넘어가 주면 돼… 내 견습마녀를 살려낸다면 나도 사라질게…! 그러고 나면 당신도 이 연꽃으로 얼마든지 견습마녀를 되살릴 수 있어, 좋잖아?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최선책이잖아? 그렇지?”
엘로아는 다시금 연꽃을 보았다.
“그래! 저것만 있으면 우리의 후회를 다잡는 것도 가능하다니까? 다시 행복해질 수 있어! 공적이니 물병자리의 마녀니 복수심을 불태우지 않아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라고…!”
소담하게 피어있는 연꽃.
그것은 단언컨대 엘로아가 이제껏 살아오며 보았던 그 어떤 아티펙트보다 아름다웠다.
도저히 셀 수 없는 시체 더미 위에 피어난 꽃이라고는 상상되지 않을 만큼 말이다.
새끼를 생각하는 어미의 마음이 그렇듯.
비록 비겁의 마녀의 행동은 사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견습마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저렇게 아리따운 꽃을 피워낼 만큼 정녕 순수했으리라.
“그래, 할 수 있는 거야… 전부 되돌아갈 수 있는거야….”
파올라의 말은 교묘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꽃을 발동시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쏙 빼놓았다.
지금 당장은 티페레트를 갈등에 빠지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똑같은 슬픔을 지니고 고통을 공유한 상대라면.
이 한 마디가 어떤 유혹보다 탐스럽게 느껴질 터.
그리고 그 말은 정확히 엘로아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라피를 되살릴 수 있다.
무의미한 복수 따위가 아니다.
전해지 못했던 말을 하고, 주지 못했던 가르침을 주고, 이제는 보낼 수 없는 미래를 함께할 수 있다.
엘로아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미래가 여기 확연한 모양을 갖춘 채 있다.
엘로아는 눈을 감았다.
단 하루도 잊지 못했던 라피의 목소리, 귀여운 코, 동그란 눈.
세상 그 무엇을 주어도 바꾸지 않았을 엘로아의 보물.
비겁의 마녀의 손을 잡는다면 그것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
꿈에서, 그마저도 딱딱하게 굳어버린 핏기 가신 시신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에서.
“이 연꽃을 피우기 위해 몇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나.”
엘로아는 담담히 그리고 조용히 미련을 잘라내었다.
눈을 다시 뜨자 심상 한가득 피었던 라피의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잖아… 가장 소중한 사람을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잘못된 건 아니잖아…!”
“내겐 그대를 비난할 자격이 없네. 그대의 슬픔을 미련이라 치부할 자격도, 그대를 부정할 자격 또한 없네.”
“좋아! 내가 양보할게…! 당신의 견습마녀를 먼저 살리는 것으로 하자…! 그 다음에 내가 할게…”
순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파올라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현실을 부정한다.
“…….”
그러나 대답이 없는 엘로아를 보고 덜커덕 단두대의 칼날이 내려온 것처럼 확실하게 깨닫는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는 건데…! 이해한다면서… 너라고 나와 다를 것 같아?”
필사적인 부탁과 애원이 덧없이 잘려나간 뒤에 그 자리를 대신 하는 것은 증오와 분노.
절규에 가까운 파올라의 규탄이 엘로아를 향한다.
“그대의 분노와 절망 또한 이해하네. 나 역시 그러하였으니.”
“닥쳐! 넌 아무것도 몰라! 내가, 내가 이것만을 위해… 이것만을 위해….”
엘로아는 가엾게 여기는 눈빛으로 발악하는 파올라를 내려보았다.
“애도하네, 후회하고, 절망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죄악감에 몸부림친다네. 나 역시 라피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했을 것이야.”
만약 시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복수의 대상마저 잃고 방황하던 자신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마음을 품고 비겁의 마녀의 제안을 들었더라면.
지금처럼 쉽게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었을까?
부정할 수 있다 답한다면 그것은 오만이다.
엘로아는 자신을 그렇게 강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히 고뇌했을 것이며, 어쩌면 빈사 상태에 빠진 파올라를 도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그대의 힘을 빌려 라피를 되살려낸다 한들, 라피는 분명 슬퍼 할게야.”
“하! 결국엔 원망 받는 게 두려워서 그런 겁쟁이 같은 선택을 한다는 건가?”
“그래, 두렵다네.”
엘로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를 되살렸을 때. 무슨 짓을 한 줄 아냐고, 왜 살려냈냐고 성토할 모습이 눈에 선하군. 하지만 틀림없이 용서할 게야. 울고, 날뛰고, 때리고, 소리를 지르며 날 원망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못난 스승을 안아줄 것이 분명하네.”
“…….”
“그 이후로는 내가 저지른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현세를 떠돌겠지.”
“그거면… 된 거잖아….”
“그건 라피가 원하는 게 아니라네. 나의 이기심일 뿐이지. 내게 남겨진,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떠나간 이를 애도하며 묵묵히 나아가는 것 뿐일세.”
“…….”
마지막 생명을 쥐어짜내는 열변과 분노에 모든 기력을 다한 것인지 파올라의 목소리는 말려 들어 갔다.
끓어오는 선혈에 목이 잠겨 끝없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끝이 가까워졌다.
엘로아도 파올라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대화라면 충분히 주고받았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있나?”
“…….”
최후의 희망마저 빼앗겨버린 파올라는 이미 죽은 듯한 한쪽 눈동자로 엘로아를 올려보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공허한 가슴에서 짙디짙은 악의와 증오가 불처럼 타올랐다.
그건 모든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간 원수에 대한 증오였다.
“널 증오해.”
엘로아의 검이 아름다운 나선을 그렸다.
베는 소리조차 없이 유려하게 선을 그린 검날이 파올라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고, 연이어 그녀가 기대다시피 있던 연꽃마저 파쇄한다.
엘로아는 피 한 방울 묻어나지 않은 검을 아공간으로 돌려보낸 뒤 씁쓸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마저도, 이해할 수 있겠군.”
잔뜩 금이 간 유리 세공품처럼 천천히 바스러지는 연꽃과 그 아래 덮이는 파올라의 시체를 확인한 뒤.
엘로아는 시우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