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1.
“아하하하하!”
빗물터널이 아직 제 기능을 다하던 때, 펌프실 겸 엔진실로 사용되던 거대한 공동.
본래 ‘제단’이 놓여있던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파올라 소치틀, 비겁의 마녀는 웃었다. 또 울었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반쪽 얼굴에 미친듯한 웃음이 떠올랐고, 또 미친듯한 눈물이 샘솟았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아니, 완벽했을 터다.
적기사가 연이은 패퇴로 약해진 틈을 타 붉은가지를 손에 넣었다.
파올라가 노리던 것은 붉은가지의 ‘왜곡’의 기능.
왜곡의 개념을 추출 및 차용해 인과는 물론 이미 흘러간 과거까지 비틀 수 있는 아티팩트를 제작했다.
그것을 위해 ‘다곤의 피리’로 인간의 ‘연’과 수많은 사체, 그리고 심장을 손에 얻었다.
1440명분의 신경계와 뇌의 기능을 유지해 끊임없이 기도를 올리는 제단을 세웠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되돌리고 싶었으니까.
후회로 점철된 나날들을 씻어내고 속죄하고 싶었으니까.
그 결실이 이곳에 있다.
파올라는 미친 듯이 웃고 울며 제단을 집어삼키고 피어난 커다란 꽃 한 송이를 끌어안았다.
모양은 연못에 핀 단아한 연꽃을 닮았다.
셀 수 없는 희생을 담보로 하고 생명을 먹어치운 끝에 태어났다기에는 성스럽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아티펙트였다.
“아하하하!”
방해될 것 같은 마녀에겐 그동안 사육하던 호문쿨루스를 보내 죽이거나 겁을 주었다.
전력의 공백을 염려할 것은 없었다.
완전히 개화한 붉은가지를 든 적기사와 그 레플리카인 1200기의 백기사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예상대로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 급급한 마녀들은 성가신 트러블에 위협을 느끼며 도망쳤다.
서울에 남아있던 마녀 중 이 빗물 터널로 진입한 것이 세 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파올라는 분명 선을 여러 번 넘었다.
그러나 속삭임의 마녀가 일러주었던 대로 케테르 공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던 것이다.
수십 년 간 준비해왔던 오랜 염원을 이루기 위해 올라서야 할 계단은 단 하나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기사단을 일제히 출격시켜 인간의 생명을 그러모은다.
이 연꽃에 생명과 연, 그리고 마력을 바쳐 견습마녀…를 되살려낸다.
되살아난 그녀에게 제대로 낙인을 전수해주며 말해 줄 생각이었다.
미안하다고.
너무나 두려웠다고.
의식을 중단시키는 것이 견습마녀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노라고.
모든 것이 실수였으며,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그녀를 끌어안으며 사과하고 싶었다.
마녀의 사회에서 스승의 업은 제자에게까지 연좌된다.
추방자 마녀의 후대는 추방자가 되며 공적의 낙인을 물려받은 견습마녀는 공적이 된다.
아주 간혹 세피로트의 나무에서 논의되어 연좌의 사슬을 끊는 일도 있지만 파올라 정도의 사고를 친 공적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하지만 파올라에게 그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목소리도, 얼굴도 흐릿해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름마저도 잊어버린 자신의 견습마녀를 되살리는 것.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것 뿐이었다.
하루만 있었더라면, 아니 12시간만 있었더라면 모든 일이 현실이 되었으리라.
이 연꽃에서 그녀를 되살려낸 채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바람은 한 여자와 한 남자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다.
엘로아 티페레트.
공적 사냥꾼으로 이름 높은 23 위계의 공작.
파올라는 그녀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전에 만전을 기한 준비가 끝난 만큼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거의 승리에 가까웠다.
축차 투입된 백기사는 착실하게 티페레트의 소모를 강요했다.
충분히 힘을 뺀 이후 일제히 출격시킨 적기사와 백기사는 그 무시무시한 공작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앞으로 단 한 발짝.
적기사가 그녀의 생명을 빼앗았더라면 이 싸움은 파올라의 승리였겠지.
그 시점까지 붉은가지는 건재했다.
적기사 역시 심한 손상을 입긴 했지만 23 위계 마녀의 낙인을 회수할 수 있다면 백기사도 적기사도 빠른 시간내에 재건할 수 있었다.
그때 싸움에 끼어든 남자가 모든 판을 뒤엎었다.
결코 강대한 적은 아니었다.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파올라가 따로 전력으로 인지조차 하지 않았던 미약한 존재였다.
그런 그가 가장 중요한 대국에서 기어이 싸움에 난입해 적기사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그 시점에서 파올라의 패배는 확정되었다.
“아하하하….”
파올라는 그것이 너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쟁쟁한 강적들을 쫓아내고 이겨냈는데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꼴이라니.
증오도, 분노도 들지 않는다.
오직 공허함과 허무함만이 귀곡성을 내며 텅 빈 가슴에 휘몰아칠 뿐이다.
이제 도망쳐야 한다.
이성은 말해주었다.
빗물수로에 진입한 즉시 방향을 고민하지도 않고 돌입한 것을 보면 델라가 위치를 알려준 것이겠지.
머지않아 이곳으로 찾아와 이만한 죄악을 저지른 파올라를 단죄할 것이다.
애초에 전장에 직접 서는 타입이 아닌 파올라인데다가 상대는 그 티페레트다.
승산은 조금도 없다.
“…….”
파올라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연꽃을 바라보았다.
숙원, 광기, 집착, 후회, 미련, 속죄, 희생, 원망, 자기혐오의 집대성.
희미한 빛을 뿌리며 주위를 밝히는 연꽃은 이러한 상황에도 미동도 없이 고아하게 피어 제 자태를 뽐내고 있을 뿐이다.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제단은 움직이지 못한다.
제단이 피워낸 연꽃도 다를 바 없다.
본래 비가역성을 띤 인과를 비트는 것은, 과거를 뒤바꾸는 것은 그 어떤 마녀도 해낸 적 없던 위업이다.
19 위계에 불과한 파올라가 사자소생의 기능을 지닌 ‘연꽃’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광기와 집착과는 별개로 ‘운’이라는 요소가 따라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마녀로서 생을 살아가며 다시 한번 이 정도의 위업을 달성하는 일은 아마 평생토록 없겠지.
이것을 버려두고 도주하는 것은 그녀의 인생을 걸어온 마지막 목표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신의 목을 베러 오는 사신의 발걸음을 들으면서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저벅 저벅 저벅
무심한 발소리.
공동 내부를 울리는 고요한 소리와 함께 계약의 마녀, 엘로아 티페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2.
시우에게 받은 마력은 과연 깜짝 놀랄 만큼 정순했다.
너무나도 투명해서 의식하지 않는다면 존재조차 잊어버릴 만큼.
그 정순한 마력을 자기화해 낙인에 저장하는 것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남자 마녀라는 특성도 놀랍기는 하지만 성교를 통한 마력 충전 자체로 연구대상이 될 정도로 기이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시우의 헌신 덕에 엘로아는 충분할 정도의 마력을 얻을 수 있었다.
계약 대가의 지불을 유예한 채 6개의 계약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즉시 기용 가능한 4개의 계약을 남겨둔 채 공동 앞에 선다.
이곳이 델라가 일러주었던 펌프실.
주변의 지형을 살펴도 수아 지부장이 주었던 지도의 모습과 유사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겠나?”
“제가 뭐라도 돕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시우는 이미 제 몫을 다해주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어떠한 위험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파올라에게도 여력이 없다는 것이겠지.
차라리 언제든 도우러 갈 수 있는 근방에 대기시켜 놓은 채 마음껏 날뛰는 것이 엘로아의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했다.
“날 못 믿는 겐가?”
엘로아는 미소를 지으며 시우를 바라보았다.
잠시 홀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요,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엘로아는 시우의 머리를 한번 쓸어주고는 전장으로 향했다.
철문이 덜컹 비틀어 열리면서 이 모든 싸움의 시작이자 끝인 비겁의 마녀가 그녀를 맞이한다.
이렇게 얼굴을 맞이하는 것은 처음이다.
끔찍한 재난을 일으키고, 또 앞으로도 일으킬 예정이었던 공적.
그렇게 여기기에 비겁의 마녀는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일그러진 얼굴과 아름다운 미색을 뽐내는 얼굴.
그 양쪽 모두 눈에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수척해져 있다.
커다란 연꽃을 끌어안듯 몸을 지탱하고 있던 비겁의 마녀는 제단에서 내려와 엘로아와 마주선다.
“……”
“……”
두 사람은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알 수 없는 복잡한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대화는 필요 없다.
이곳에서 죽여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망집이 있다.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전투가 벌어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바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