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1.
으레 싸움이란 벌어졌을 때는 난잡스럽기 그지없지만 끝나고 나면 허무할 정도로 단출해지기 마련이다.
무릎을 꿇은 채 상체가 뒤로 넘어간 적기사와 바닥에 나동그라진 붉은가지.
품에 안겨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킨 시우와 그런 그를 지탱하는 엘로아.
비정상으로 확장되었던 빗물 터널은 어느새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아마 붉은가지의 소유자가 죽음을 맞이함에 따라 펼쳐두었던 마법이 사라진 것이겠지.
여전히 천장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균열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별개의 마법을 펼치지 않고도 사위를 분간할 수 있었다.
“하아…크윽…”
전투가 끝나자 통각을 마비시켜주던 아드레날린이 사라져 버렸다.
붉은가지를 쥐었던 손이 욱신거린다.
은근히 마비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정작 상처는 하나 없는 것이 기묘한 일이다.
하지만 더욱 부담스러운 것은 붉은가지를 갑옷으로 뚫고 돌파하는 과정에서 온몸을 맹타하던 왜곡의 여파였다.
목숨은 건졌지만 체력은 걷고 가볍게 뛸 정도로만 남아있고, 연속적인 거듭 증폭과 그림자 컨트롤로 뇌는 익을 듯이 뜨겁다.
당연히 고압의 마력이 거쳐 간 왼눈도 흐릿하게 변할 정도로 지끈거렸고 말이다.
엘로아는 비틀거리는 시우를 부축하며 물었다.
“괜찮은가?”
“항상 싸우고 나면 몸이 말이 아니네요.”
“내게 좀 더 기대게나.”
“아닙니다, 스승님도 힘드실 텐데요.”
“괜찮네, 이런 일은 많이 있었어. 하지만 그대는 처음이지 않나?”
“그럼…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시우는 엘로아에게 몸을 맡기는 한편 조금 전의 격전을 되새김질했다.
그림자를 리본처럼 꾸며 눈속임을 한 것도.
철저히 약자의 모습을 드러내며 방심을 유도한 것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가장 시우의 뇌리에 깊게 인상을 남긴 장면은 붉은가지에서 빽빽하게 솟은 결계 한가운데로 몸을 던지던 그 순간이었다.
아가리를 벌린 죽음으로 돌진하며 페리윙클의 네잎클로버를 믿고 건 동귀어진의 한 수.
마력의 폭발로 인해 운 좋게 결계가 엉성해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우는 서늘해진 간담을 쓸어내렸다.
언제나 강적들을 상대해왔기 때문이겠지.
강해지려고 꽤 노력했다고 자부하는데 항상 임기응변을 짜내고 아슬아슬한 도박 수 끝에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 같다.
정작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좋아하는데 말이지.
시우는 품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연둣빛 네잎클로버를 꺼내 들었다.
모든 걸 건 도박 수를 다소 부담 없이 던지게 해 준 물건이었다.
줄기가 꺾여있음에도 방금 딴 것처럼 생생한 생기를 내뿜던 클로버가 지금은 말라 비틀어져 손끝에 닿자 먼지처럼 부스러진다.
아마 조금 전의 결투로 소임을 다한 모양이다.
그 와중에 분홍빛 클로버는 조금 시들긴 했어도 멀쩡하니…
이건 도대체 어디에 쓰라고 준 물건일까?
“…….”
감회에 빠진 시우를 보고 엘로아는 칭찬을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동료로서는 허를 찌른 회심의 한 수로 적기사 토벌에 성공한 것은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스승으로서 제자가 무모하게 생명을 내던진 점에 대해 책망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시시콜콜한 고민에 대해 숙고할 시간이 없다.
적기사와 백기사를 토벌했으니, 남은 상대는 비겁의 마녀.
공동에 자리를 잡고 제단을 완성한 그녀를 토벌하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
정확히는 나아가고 싶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그러게 말일세.”
여기서는 뾰족한 해답을 내어주고 싶었다.
스승답게 의연한 자세와 태도로 멋진 승리를 거머쥔 시우를 위해 앞으로의 계획을 전달해주고 싶었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지금은 엘로아도 시우도 만신창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비틀거리며 걷는 것이 고작이다.
“미리 말하지. 면목 없지만 나로서는 더는 전투를 이어갈 수 없네.”
마력은 고갈됐으며 계약은 대가 이행 중이다.
정신력을 바탕으로 애써 꿋꿋하게 서 있을 뿐 엘로아의 상태는 시우보다도 나쁠지도 모른다.
영체의 내구도를 아득히 초월하는 운동을 수행한 나머지 근육은 녹을 것처럼 흐물거렸다.
아마 뼈에는 아주 미세한 실금이 잔뜩 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일주일가량은 푹 요양해야 하는 상태.
하다못해 마력이라도 있었더라면 억지로 몸을 움직여나 보겠지만 앞서 언급했다시피 엘로아는 모든 마력을 전투에 소진한 이후이다.
“비겁의 마녀는 어느 정도로 강할까요?”
“…전투 경험이 풍부한 공적인 만큼 쉬운 상대는 아닐걸세. 우리는 그녀가 어느 정도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말이네.”
목숨을 지켜준다는 네잎클로버는 동났다.
시우가 마력을 거듭 증폭할 수 있다고 해서 무한한 마법 구사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몸 구석구석 뻗어있는 마력 회로에는 엄연히 피로도가 존재하고 그것은 연산을 수행하는 뇌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으로서는 고작 리본 한 두 가닥을 뽑아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것이 고작.
갑옷은커녕 건틀렛조차 만들어낼 수 없어 반쯤 찢어진 옷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힘들겠네요…”
“어깨를 펴게나. 항상 계획대로만 일이 흘러갈 수는 없는 일이지. 나는 그대가 무사하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네. 비록 힘이 빠져있다고는 하지만 적기사까지 마무리를 짓지 않았는가?”
그렇게 말은 해도 엘로아 역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백기사와 적기사를 모조리 쓸어버린 이상 델라가 경고했던 재앙, 즉 서울에서 벌어질 대학살은 막았다 해도 좋을 것이다.
소치틀도 이 정도의 겁난을 준비하려면 한동안은 은둔생활을 하며 힘을 모아야겠지.
그러나 공적은 피 맛을 본 짐승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이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한번 실패를 경험한 비겁의 마녀라면 다음엔 더욱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더욱 커다란 재난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럼, 빠져나가야 할까요?”
“아쉽지만 그래야 할 것 같네.”
시우는 고개를 들어 지상까지 이르는 커다란 균열을 보았다.
이쪽을 통해 나가면 굳이 수직 환기구를 찾을 필요 없이 곧장 복귀할 수 있어 보였다.
아마 엘로아를 들춰 매고 나가야 할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때.
“어!”
아주 우연한 타이밍으로 발치의 돌을 밟고 미끄러졌다.
한쪽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부축하던 엘로아 역시 넘어지는 시우를 잡아주려다 덩달아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사람 하나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쭉 빠져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그 결과물은 시우에게도 엘로아에게도 썩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
“…….”
거칠거칠한 바닥에 드러누운 엘로아.
그 위를 덮듯이 덮쳐가는 시우.
비단 로맨스 장르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멜로맛이 섞인 드라마라면 단골로 나오는 식상한 클리셰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모종의 이유로 바짝 근접하는 그런 장면 말이다.
“웃….”
습하기 짝이 없는 빗물터널은 송골송골 맺혀있는 엘로아의 땀방울을 조금도 식혀주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전부 찢어져 걸치고 있는 의미가 없는 바람막이, 그 아래 스포츠 브라, 그리고 스포츠 브라가 가려주지 못한 가느다란 목덜미, 쇄골, 가슴골에도 땀방울이 이슬처럼 맺혀있다.
진한 자홍빛을 띠며 시우를 올려다보는 엘로아의 눈은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벚꽃이 소복하게 쌓여있는 듯한 긴 속눈썹이 끔뻑끔뻑 움직인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여기가 빗물 수로가 아니라 침대였다면 자연스럽게 키스로 이어질 것 같은 와중에.
시우도 엘로아도 뻣뻣이 굳은 채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 숱하게 대련을 하는 중에도 이렇게나 가까이서 가만히 서로를 보고 있던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역시 아름답긴 하다.
특유의 신비스러운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홀린 듯이 정신을 마비시켜 비켜서야겠다는 사고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죄, 죄송합니다.”
“아, 아닐세.”
결국 한참이나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냈다.
누워있는 내내 숨을 꾹 멈추고 있던 엘로아도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키며 작게 숨을 헐떡인다.
“어…?”
그 순간 엘로아의 머릿속에 섬광이 내리쳤다.
남사스러워 꾹꾹 눌러두었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방금의 실수가 일종의 스위치가 되었음을 틀림없다.
시우에게 덮쳐지는 듯한 자세가 되는 순간이 기억 속의 장면과 겹쳤으니까.
바로 ‘수호자의 계약’으로 지켜보았던, 페리윙클을 덮쳐가던 시우의 모습.
엘로아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에 의해 가능성으로조차 거론되지 않았던 한 가지 길을, 민망한 회상과 동시에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이 정도 높이라면 리본으로 타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붉은가지도 챙기는 편이 좋겠죠? 리본으로 둘둘 말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한데…”
시우는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코를 쓱 문지르고는 엘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자는 것이겠지.
하지만 여기서 빠져나가면?
비겁의 마녀는 높은 확률로 몸을 감출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필경 많은 희생자가 나오겠지.
“시우,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네, 스승님.”
언제나 아릿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편안하게만 들리던 시우의 ‘스승님’이라는 호칭이.
유독 가슴을 죄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껏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있나?”
“없습니다.”
고민조차 않고 대답하는 시우.
그 모습에 엘로아의 눈동자가 한 차례 흔들린다.
마지막 깃발을 꽂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이 상황에 길을 제시할 구도책.
그 단서는 페리윙클과의 성교를 관찰했던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샤론과 시우가 성교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날.
엘로아를 찾아온 시우가 해명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교를 통해 마력을 증폭해 되돌려 줄 수 있노라고.
경악한 엘로아가 물었다.
낙인 안에 타인의 마력을 들여놓는 것은 몹시 위험한 행위이다.
어째서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하는 것이냐, 라고 책망했다.
그에 따른 시우의 답변은…
그렇게 되돌려주는 마력은 순수한 마력,누구든 순식간에 자기화하여 사용할 수 있는 불순물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마력이라고 말했던 것이 또렷이 기억난다.
“시우.”
“네.”
엘로아는 자신의 윤리관과 앞으로 다가올 불길한 미래를 저울질했다.
스승과 제자가 몸을 섞는다는 것은 언어도단.
아니, 그 전에 서로를 남녀로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벌어져서는 안 될 불경한 일이다.
그러나, 사제지간의 불문율이 앞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황금률인가?
수많은 도덕, 종교, 윤리, 철학에서 무고한 인간의 생명보다 우위에 놓이는 것이 있던가?
엘로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스승님? 몸이 괜찮으세요?”
시우는 눈을 감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엘로아에게 다가갔다.
“잠시만 눈을 감아줄 수 있겠나?”
“눈을요?”
갑자기 거짓말을 한 적이 없냐 묻더니 홀로 생각에 잠긴 듯 고요히 침묵하던 스승님, 그에 이어 눈을 감아달라는 부탁이라니.
뭔가 아리송하긴 했으나 엘로아에 대한 친애와 신뢰는 최고치에 가까웠다.
시우는 눈을 감았다.
“감았습니다.”
“이제 천천히 심호흡을 해주겠나? 대련이 끝났을 때처럼 말일세.”
“심호흡이요? 혹시 제 몸에 이상이 남았나요?”
“그런 건 아니네. 천천히, 그리고 깊게 쉬어 보게나.”
“어려울 건 없죠. 후흡…”
시우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심호흡했다.
확실히 몸이 맛이가긴 한 모양이다.
고작 숨만 깊게 들이쉬고 있을 뿐인데 폐부터 복부까지 지끈지끈 아파진다.
“미안하네.”
그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시우는 미처 반응할 수 없었다.
설마 엘로아가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으니까.
-풀썩!
눈을 감고 있어도 느낄 수 있었다.
엘로아가 마치 그의 품에 안기듯이 달려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향수를 코에 뿌린 것처럼 아주 진득하게 풍기는 향기.
“엇!”
시우는 경악했다.
눈을 뜨자 발꿈치를 힘껏 들어 시우의 코 밑에 머리를 바짝 가져다 붙인 엘로아가 보인다.
뒤늦게 엘로아를 밀쳐내려 했지만 시우의 팔을 꽉 붙잡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분당 심박이 두 배까지 단박에 치솟았다.
몸을 활활 불태우는 듯한 욕정과 동시에 인간의 인내심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충동이 가슴에 휘몰아친다.
이미 너무 깊게, 가까이서 향기를 들이마시었다.
거의 정수리에 코를 박는 수준인 데다가 엘로아는 땀까지 흠뻑 흘린 상태였으니 말이다.
“미안하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라 믿어 의심치 않네… 오늘 일에 대한 책임은,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반드시 지도록 할테니…”
시우는 필사적인 인내로 충동을 억누르려 들었다.
그런 시우에게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인 엘로아가 앙증맞은 입술을 달싹인다.
“지금은 나에게 마력을 충전해 주게나.”
========
퀘몽님이 작업해주신 수련후 휴식하는 티페레트 스승님!!!
넘모 예쁘게 나왔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