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1.
엘로아는 주춤주춤 벽으로 물러선 채 혈투를 벌이는 시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실내를 가득 채우는 그림자.
지금의 엘로아는 그 안의 전장을 꿰뚫어 볼 수 없다.
“시우….”
그저 주먹을 꽉 쥐며 응원할 뿐.
간간히 들려오는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는 아직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후우….”
자욱하게 피어난 그림자 안에서 시우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사실 이런 식으로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설령 적기사가 왜곡장으로 밀어내지 않는다고 해도 그다지 피해를 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적기사는 아직 그것을 모른다.
처음 보는 자성마법에 신중하게 대응하겠다는 듯이 5M 정도의 왜곡장을 유지하며 그림자를 물리고 있다.
그 덕택에 시우는 조금은 자유롭게 근접전 이후 그림자로 다시 숨어드는 히트&런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Krrrrrrr
적기사는 자신을 둘러싼 그림자를 보고 불만스럽다는 듯 목울대를 울렸다.
사실 붉은가지의 능력이 완전했더라면, 충분한 마력을 비축하고 있었다면, 이 거슬리는 그림자를 모조리 날려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지금만 해도 조금만 시간을 주면 죄다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하압!”
-콰아아앙!
하지만 왜곡장을 넓게 펼치려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귀신같이 달려오는 흑색의 갑주가 그것을 방해한다.
무리하게 검과 창을 맞대게 하여 왜곡장의 조정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반격을 하려 들면 쏜살같이 그림자 안으로 파고든다.
또 그것을 추적하려 하면 4가닥의 리본을 날려대 추적을 저지한다.
마음먹고 쫓아간다면 따라갈 수야 있겠지만 저 흐느적거리는 리본은 지금 상태로선 꽤 위협적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물리적인 실체를 확고하게 지니고 있기에 붉은가지로도 완벽하게 카운터치기 곤란한, 달리 말하자면 적기사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위협이 되는 공격’이다.
-Krrrrrrr!
검은 갑주를 뒤집어쓴 마녀는 이제껏 상대해왔던 마녀 중에 약한 축에 속했다.
기묘한 잡기술을 사용하는 통에 성가시기는 하지만 위기감을 주지는 못한다.
적기사는 벌써 검은 갑주를 찢어 죽이고 분홍머리의 마녀를 난도질하는 상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시우가 유도한 방심이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동일한 패턴의 반복.
상대방에게 그것을 강제로 학습시킨다.
그것이 시우의 첫 번째 노림수였다.
시우는 차분하게 머릿속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었다.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고 도망친다’라는 육체적인 활동.
‘그림자를 활용할 마법 계산을 연산한다’라는 정신적인 활동.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이다.
실제로 지금 시우의 머릿속은 과열된 것처럼 뜨거워지고 있었다.
-휘이이익!
이번에도 그림자에 잠깐 숨어있던 시우는 적기사가 왜곡장을 확장 시키려는 낌새를 느끼자마자 달려나갔다.
일반적인 마녀라면 이렇게 기민하게 반응할 수 없겠지만 시우는 가능하다.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으니까.
-Kaoooo!!!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고 창을 치켜든 적기사.
몇 번 성가시게 해줬더니 독이 바짝 올라있다.
따라서 왜곡장을 넓히려 들 때마다 달려드는 시우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그것을 미끼로 활용한 것이다.
달려드는 적을 창으로 찍을 자세로 대기하는 적기사.
-콰드드드득!
시우는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땅에 발을 박아 넣어 제동을 가하고 물러선다.
관성을 거스르는 역동작에 무릎에 부담이 고스란히 실리고 자세는 무너졌다.
-Koooo!
그 기회를 놓칠 적기사가 아니었다.
쫄랑쫄랑 숨어다니던 쥐새끼를 드디어 잡았다는 듯 백스텝을 밟는 시우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반격의 타이밍이었다.
여태 신중하게 적을 관찰하던 적기사가 먼저 움직여 주었다.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계산해두었던 대로 마력을 조작했다.
주변에서 넘실거리던 그림자가 일제히 하나의 형상을 갖춘다.
자신들끼리 뭉치고 직조되어, 더는 흐물거리는 연기 따위가 아닌 확실한 실체를 지닌 리본이 되었다.
말미잘의 촉수가 해류에 흔들리는 것처럼 수백 가닥의 리본이 일제히 적기사를 향한다.
당연하지만 시우에게 그만한 리본을 만들어 낼 능력은 없다.
처녀의 베틀로 한가닥 한가닥 정성을 들여야 직조 가능한 리본은 상상 이상으로 까다로운 컨트롤과 어마어마한 연산을 요구했다.
전성기의 에아 사달멜리크라면 몰라도 시우에게는 아직 수백 가닥의 리본을 활용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예전 어미 개를 쓰러뜨릴 때처럼, 미리 펼쳐놓았던 대량의 그림자를 일시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가능하다.
즉, 블러프이다.
위협적인 공격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잠깐의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적기사로서는 시우가 비장의 한 수를 숨겨두었다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밑천이 바닥난 사냥감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달려들었는데 마주하게 된 것은 공작의 날개처럼 활짝 펼쳐진 리본들의 향연.
몇 번의 격돌로 인해 저 리본의 위력은 이미 알고 있다.
하나 두 개 정도는 정타를 허용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수백 개를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순식간에 앞으로 쇄도하는 리본을 보고 적기사는 붉은가지의 왜곡장을 펼쳐야 할지, 혹은 수축시켜야 할지를 갈팡질팡했다.
아주 찰나의 틈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시우는 수백 가닥의 가짜 리본과 함께 적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림자의 연막을 사용해 같은 전술을 학습시킴으로써 만들어낸 ‘방심’은, 갑작스러운 반격에 의한 ‘당혹감’을 가중한다.
-Krrrrrr!!!
이미 지름 10M 정도로 펼쳐져 있는 붉은가지의 왜곡장.
그 경계면에 부딪히자마자 블러프 용으로 만들어둔 리본들은 덧없이 부서져 나갔다.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기사는 분개한 듯이 창을 치켜들었지만 시우는 거리를 바짝 좁혀 파고든 이후.
적기사가 뒤늦게 창을 뻗자 낙뢰가 치는 것처럼 나무뿌리 형태의 결계가 전방으로 뻗어 나온다.
지금까지의 패턴이었더라면 시우는 이 시점에서 다시 도망쳤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가속했다.
지금껏 그림자를 통제하기 위해 사용했던 마력을 모조리 신체 강화에 떄려박는다.
무리한 마력의 운용 탓에 체감상 세 배는 부어오른 것 같은 마력회로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터질 듯 맥동했다.
파리지옥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빼곡한 결계로 달려들어 가는 감상은 몸에 기름을 부은 채 불 속으로 뛰어드는 듯하다.
하지만 시우에게는 네잎클로버가 있다.
페리윙클 왈, 단 한 번은 반드시 죽음을 회피하게 해주는 부적.
부디 그 효과가 빼어나길 믿으며 두려움에 금방이라도 풀썩 꺾일 것 같은 무릎으로 억세게 땅을 떠밀었다.
한 걸음.
결계가 몸에 소리 없이 부딪쳤다.
그 순간 발휘된 ‘수호자의 계약’.
반투명하게 떠오른 방어막이 이리저리 뒤틀리더니 성대한 마력의 폭발과 함께 무효화 됐다.
그 폭발에 휘말린 결계가 흩어지며 다소 엉성해진 것은 그야말로 운이 좋았다는 표현이 걸맞다.
또 한 걸음.
의식이 흐릿해지는 것을 참으며 시우는 공중에 발을 띄웠다.
다행히도 결계 자체에는 물리적인 저지력이 없었기에 아음속에 가까운 돌진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탈수기 안에 웅크리고 들어가 몇 시간이고 돌아간 듯한 통증이 온몸을 난자한다.
대물저격총조차 가볍게 막아낼 갑옷이 점토처럼 일그러진다.
-콰아아앙!!
설마 결계 한가운데로 몸을 던지는 자살 특공을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적기사의 반응은 현저히 느렸다.
시우의 몸이 적기사의 갑옷과 격돌하며 굉음을 내었다.
결계가 주는 고통과 충돌에 의한 충격으로 인해 잠깐 의식이 날아갔던 시우.
그로기 상태에 빠지려는 정신을 찢어발기는 느낌으로 되찾아온 시우는 자신과 적기사의 몸이 겹쳐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계에 쥐어 뜯겨 그림자의 갑옷이 모조리 날아가 맨몸이 되었다는 것도 느리게 자각한다.
-Krr
시선을 아래로 돌리자.
의식이 날아가면서도 단단히 쥐고 있던 그림자의 검이 손잡이 부근까지 갑옷의 명치에 박혀있다.
검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통해 적기사의 생명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음을 느껴졌다.
이겼다.
시우는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적기사는 자신의 ‘핵’을 정확하게 관통한 그림자의 검을 보고 망연자실 서 있었다.
시우의 검날은 필살의 일격이 되어 적기사의 생명을 끊어놓은 것이다.
-끼이이익!
한쪽 무릎을 꿇는 적기사.
그 동작이 꼭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괴한 심정이 든다.
-Krrrrr
하나씩 꺼져가는 투구 속 안광이 회광반조처럼 빛나는 것을 본 시우는 섬뜩함을 느꼈다.
적기사는 자신의 패배를 받아 들였다.
몸에 지니고 있는 ‘붉은가지’를 지키기 위한 오랜 사명도 끝이난 것이다.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저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분홍머리의 마녀.
지금껏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괴롭혔왔던 숙적.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응축된 분노는 최후의 힘을 쥐어 짜낼 오기를 주었다.
-철컥!
다 쓰러져가던 신체를 간신히 지탱한 적기사.
그 커다란 손에서 3M의 창이 핑그르르 돈다.
순식간에 투척 준비가 끝난 적기사.
시우는 섬짓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적기사는 마지막 순간 길동무로 엘로아를 데려갈 생각이다.
“스승님!”
시우는 팔을 뻗었다.
안되는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엘로아를 겨누고 날아갈 준비를 하는 붉은가지의 창대를 움켜쥐었다.
투척을 방해할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
새빨갛게 달궈진 쇠막대기를 잡은 통증.
근육, 뼈, 세포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분리되어 버리는 끔찍한 고통.
시우는 죽어가는 짐승 같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조차 여러 사람이 동시에 지른 것처럼 몇 겹으로 갈라진다.
붉은가지는 결코 맨손으로 만져도 좋을 물건 따위가 아니다.
소유자인 적기사가 거의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가 되어 그 위력은 현저히 약해졌지만 왜곡장이 둘둘 둘린 위험물.
영체에 있어서는 방사능을 흠뿍 머금은 핵제어봉이나 다름없다.
그런 위험물을 마력도 거의 남지 않은 상황에서 꽉 움켜쥐었으니 이런 고통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문자 그대로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고통이었으니까.
그러나 시우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붉은가지를 놓지 않았다.
고통으로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 와중에도 이것을 놓으면 엘로아가 당한다는 위기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무릎을 꿇었던 적기사 뒤로 털썩 쓰러지자 시우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창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곧장 바닥에 털썩 쓰러진다.
“시, 시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로아가 비틀비틀 시우에게 달려왔다.
맥없이 뒤로 쓰러지던 시우의 모습은 엘로아에게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더불어 후회와 죄책감도.
그가 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붉은가지를 손으로 잡는 선택을 한 것인지.
엘로아도 알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게! 시우! 시우!”
모두 자신 때문이다.
시우는 엘로아를 지키기 위해 그런 말도 안 되는 무리수를 강행한 것이다.
이번에도 이렇게 제자를 잃는 것일까?
엘로아의 상처를 보듬어주었던 시우마저 잘못된 판단으로 떠나보내게 되는 것일까?
“이러지 말게… 제발 눈을 떠주게나….”
눈물이 쏟아졌다.
가슴이 쥐어뜯기는 것 같은 통증에 호흡마저 버거워진다.
그때 엘로아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시우는 그녀의 품에 안긴 채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엘로아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스승님… 괜찮아요. 잠깐 정신만 잃은 거 같습니다.”
엘로아는 제자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는 몰골을 보였다는 사실도.
애원하듯 그를 붙잡았단 사실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저 별 탈 없이 일어나준 그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하여 저도 모르게 덥썩 시우를 끌어안아 버렸다.
“고맙네… 고마워… 정말 고맙네…”
엘로아의 얼굴에 새겨진 미소는 때마침 천장의 틈새로 내리쬐는 햇볕보다도 밝고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