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68화 (268/917)

#268

1.

엘로아가 발한 검기는 두께 45M에 달하는 토양과 암반을 케이크처럼 깔끔하게 베어냈다.

그럼에도 토대가 무너지지 않고 낙반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천장을 베어낸 검격에 군더더기가 없었음을 의미했다.

길쭉한 V 형태로 조각이 난 천장에서 흘러 온 빛이 장벽처럼 드리운다.

장엄하게 내리쬐는 빛의 벽을 경계로 대치한 시우와 적기사.

검은 갑주를 입고 검을 꼬나 쥔 1.8M의 남자.

붉은 갑주를 입고 적색창을 쥔 2.5M의 괴물.

호문쿨루스를 상대할 때 체격 차이가 상당했던 적은 많았다.

당장 시우가 처음으로 죽였던 그림자 괴수는 시외버스 정도의 크기였고, 이후 상대했던 어미개 괴수는 저층 빌라가 쿵쾅쿵쾅 뛰어다니는 크기였다.

하지만 눈앞의 적이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투구 아래로 붉은 눈동자 40개가 일제히 시우를 노려보고 있기 때문일까.

고작 머리 두 개 정도의 시선 차이가 새삼 까마득한 차이로 느껴진다.

“시우 잘 듣게나.”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살피는 미묘한 신경전.

엘로아는 시우에게 적기사가 보유한 능력에 대해 읊어 주었다.

“놈의 힘은 이미 많이 남아있지 않네. 그대가 기습을 성공했다는 것은 그만큼 몸이 느려지고 둔해졌다는 의미지. 아직 유의미한 충격이 몸에 남아있을게야.”

“네, 붉은가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여전히 적기사에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시우.

적기사도 시우에 맞대응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같은 궤적의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도는 한 사람과 한 괴물.

안에 담긴 마법을 반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

그중에 일회성이 아닌 물품을 일컬어 아티펙트라 부른다.

하지만 아티펙트에 내장된 마법이 단순히 마법을 넘어 자성마법 보조하는 매개로 쓰이거나, 그 자체로 자성마법을 발휘할 때 예장이라는 상위 명칭이 부여된다.

적기사를 까다로운 적으로 만들어주는 예장 역시 저 붉은가지.

대충만 분류해도 세 가지나 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붉은가지는 까다로운 예장이야. 첫 번째는 왜곡장일세. 마법과 충격을 차단하는 격벽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무구를 맞대는 순간 왜곡을 전가하려 드네.

한두 번까지는 견딜만 하겠지만 길어지면 괴로울 것이야. 절대 오랫동안 정면에서 맞부딪치지 말게.”

마법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세상에 아무런 대가 없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적기사 뿐 아니라 붉은가지 자체도 상당한 소모가 있을 것이다.

현재를 왜곡시켜 과거로 역행하며 백기사를 무한히 부활시켰던 붉은가지가 더는 백기사를 일으킬 수 없는 것도 증거 중 하나다.

“붉은가지에서는 결계가 뻗어 나온다네. 속도 자체는 빠르지 않지만 위력은 절대적이지. 창날이 훑고 지나간 궤도를 특히나 주의하게.”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대 자신을 믿게나. 준비됐나?”

시우는 엘로아의 충고를 천천히 곱씹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아는 시우의 뒷모습을 보며 과연 이 선택이 맞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시우는 정확하게 전황을 파악했다.

비겁의 마녀가 보유한 최고 전력 적기사와 백기사.

엘로아는 남은 모든 힘을 쏟아부어 백기사를 일소하고 적기사를 쇠약 상태로 만들었다.

만약 여기서 후퇴하게 된다면 적기사와 비겁의 마녀는 다시 몸을 숨길 것이다.

수아와 티페레트는 근 몇 개월 동안 소치틀의 공방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공방을 습격할 수 있던 것 자체가 사로잡혔던 델라가 제공한 정보 덕분이다.

안 그래도 몸을 숨기는 것과 도주에 능했던 적기사가 다시 잠적한다면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면 언젠가 만전에 만전의 상태를 갖춘 소치틀이 현세에 재앙을 불러오겠지.

공적인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빠르게 플랜 B를 마련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또 수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될 것은 자명했다.

그렇다해도 더 좋은 방법이 없었을까?

아무리 시우를 믿는다 한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 그가 목숨을 거는 것을 구경해야 하는 일은 괴로웠다.

그러나 엘로아의 궁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창을 쥔 채 시우를 노려보던 적기사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탁!

그 속도는 힘이 온전했을 때에 비하면 현격히 느리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기준이다.

시우는 고작해야 흐릿해졌던 적기사가 눈앞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을 포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콰아앙!

뒤늦게 방어를 위해 휘두른 검이 붉은가지와 격돌한다.

비스듬히 휘둘러진 창날과 격돌하는 그림자의 검.

그리고…

“커헉!”

시우는 절대로 정면에서 상대하지 말라는 엘로아의 충고가 옳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고작 검을 맞대었을 뿐인데 내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기분이다.

검끝을 타고, 손끝을 타고, 전신에 범람한 왜곡장의 충격은 굳건한 형태를 갖추던 시우의 갑옷을 물결처럼 출렁이게 만들었다.

극심한 충격과 부담에 마법의 조형이 흐트러진 것이다.

간신히 갑옷이 흐트러지지 않게 재연산을 끝낸 시우에게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펼쳐지는 제 2격.

풍차처럼 창을 돌린 적기사가 자세가 흐트러진 시우를 향해 한껏 창을 휘두른다.

원심력이 더해진 일격과 그 뒤로 흡사 나무의 뿌리처럼 뻗어 시간차 공격을 가하는 붉은 결계.

시우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몸을 뒤로 빼는 것밖에 없었다.

-부우웅!

투구 끝을 스치고 지나간 창날이 과자처럼 투구를 부숴버린다.

그러나 뒤이어 따라온 결계는 시우의 가슴에 작렬했다.

“끄아악!!!”

“시우!”

결계의 속도가 느리고 변변한 마력이 담기지 않았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었다.

붉은가지가 공격마다 쏟아내는 결계는 시우의 ‘존재 자체’를 왜곡하려 들고 있었다.

육신에 사념과 마력이 더해 이루어진 영체에게 ‘왜곡’은 극독이나 다름이 없다.

본래였더라면 그것으로 끝.

시우의 최후가 되어야 했을 테지만 시우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수호자의 계약이 자율방어처럼 작동해 소멸하려는 시우를 붙들어 맨 것이다.

흐릿해졌던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시우는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이런 괴물같은 놈이…”

쉬운 싸움이 되리라 낙관한 것은 아니었다.

마력의 흐름을 비추는 시우의 좌안은 적기사에게 적지 않은 힘이 남았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붉은창이 적기사에 손에서 미끄러지듯 이동한다.

창의 끄트머리를 잡은 적기사는 대지를 쪼갤 기세로 길게 쥔 창을 힘껏 내리쳤다.

다시 한번 후퇴하는 시우.

땅에 맞닿은 붉은가지에서 또다시 뿌리 같은 결계가 피어나 시우를 노렸다.

저게 문제다.

지금 적기사의 동작은 명백히 정상이 아니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불편해보여 파고들만 한 빈틈이 충분했다.

지금처럼 큰 동작을 했을 때 창 안쪽으로 걸음을 내딛는다면 영 승산이 없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작 사이사이를 보조하는 듯한 결계의 존재는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수도 많고 촘촘하다.

조금 전의 위력을 보자면 무시하고 나아갈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피지컬이라면 적기사 쪽이 위이다.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무구를 맞댄다’라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는 현시점에서는 기술적인 면에서도 열세가 확정된다.

그렇다면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갈 키워드는 어디에 있을까?

마법.

붉은가지는 다양한 마법을 구사한다.

결국 적기사의 공략을 까다롭게 만드는 것은 저 마법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마력의 흐름을 읽어 파훼법을 찾아낸다면?

“피어라!”

숨 돌릴 틈 없이 연격을 이어오려는 적기사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마력을 증폭한 시우.

수중에 퍼지는 먹물처럼 새까만 그림자의 입자들이 일제히 품어져 시우의 자취를 감춘다.

증폭한 마력을 그림자의 입자로 치환해 연막처럼 활용한 것이다.

-Krrrr

적기사는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에 당황한 듯 주춤했다.

그러나 그 정체가 아주 작은 입자로 이루어진 마법임을 깨닫고 왜곡장을 부풀렸다.

물리적인 형태가 확고하지 않은, 아직 경화를 거치지 않은 그림자라면 왜곡장은 절대적인 카운터 역할을 수행한다.

왜곡장에 밀려 나가자마자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깔끔하게 사라지는 연막들.

-쉭! 쉭! 쉭! 쉭!

그 찰나의 틈새로 적란운 사이를 누비는 유도미사일처럼 튀어나오는 것은, 끝이 날카롭게 꼬아져 마치 나팔꽃의 봉우리처럼 보이는 4가닥의 리본이었다.

시야가 3M 미만으로 좁아져 있는 적기사로서 그것은 상정 외의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창을 휘둘러 모든 리본을 분쇄하고 찢어발겼다.

시우는 그 모습을 그림자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림자를 연막 형태로 살포한 것은 단순히 눈을 가리고 도망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왜곡장의 특성을 파악하는 시험지로 사용한 것이다.

시우의 눈은 붉은가지가 보인 일련의 마법적 작용들을 착실하게 해석하고, 추량하고 있었다.

벌써 유의미한 정보 하나를 얻었다.

붉은가지의 사기성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근접전에 한해서는 왜곡의 파동을 맞닿은 적에게 전가해 신체 내부부터 데미지를 쌓고, 외부의 마법에 대해선 장막처럼 펼쳐져 마법의 구성을 뒤틀어버린다.

이 정도면 게임사에서 클리어할 수 없는 보스몹을 만들기 위해 지급하는 사기 아이템을 들고 있는 꼴이다.

가까이서도 안되고 멀리서도 안되면 도대체 어떻게 상대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방금의 테스트로 시우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

바로 왜곡장의 특성이다.

왜곡장은 평상시 붉은가지 내부에 쪼그라든 풍선처럼 농축되어 있다.

그것을 부풀린 풍선처럼 넓게 펼치는 것으로 외부의 마법을 차단할 수는 있지만 표면적이 넓어진 만큼 인장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왜곡의 강도 자체는 낮아진다.

시우의 가설대로라면 그림자를 막기 위해 왜곡장을 부풀린 상태라면 영향을 최소화 한 채로 근접전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아직 왜곡장이 수축하지 않은 타이밍을 틈타 시우는 적기사에게 달려들었다.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그림자가 돌풍에 흐트러지며 시우의 검이 새된 소리와 함께 휘둘러졌다.

-콰아앙!

나름대로 끝까지 모습을 숨긴 끝에 시행한 기습이었지만 적기사는 확실히 반응했다.

붉은가지를 들어 대각선으로 내려 베던 검을 막아낸 것이다.

시우는 이를 꽉 물고 혹시 모를 충격에 대비했다.

-파츠츠츠!

그러나 붉은 결계가 스파크처럼 튀어 오를 뿐 역으로 들어오는 고통이 크지 않다.

그저 뱃멀미하는 정도의 매스꺼움이 일순 속을 휘저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저 결계가 방해하는 이상 왜곡장이 없더라도 적기사를 무력으로 짓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어라!”

시우는 다시 그림자로 숨어드는 한편 4번의 거듭 증폭을 통해 마력을 뽑아냈다.

무리한 마력 증폭에 지끈거리는 왼눈, 그것을 전부 그림자로 치환하여 터널 전체를 빼곡하게 덮는다.

그 모습은 화재가 일어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KouzaK——!

적기사는 언뜻 듣기에도 불만스러운 표호를 내뱉으며 창을 휘적였다.

왜곡장은 어렵지 않게 그림자의 연막을 밀어낸다.

사실 지금 시우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

몸에 가까이 달라붙지 않은 이상 갑옷이나 검처럼 형태를 유지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리본으로 만들기에 시우가 다룰 수 있는 리본의 개수는 4개가 한계이다.

정작 효과는 기껏해야 눈을 가리고 마법의 작용을 조금 방해하는 정도겠지.

그래서 승산이 없는가?

시우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아니.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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