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67화 (267/917)

#267

1.

엘로아는 ‘다음’에 대한 생각을 버렸다.

죽음의 두려움은 깨끗한 검의 움직임에 잘려나간다.

대신 뇌리를 채우는 것은 이 수라장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일뿐.

잡념과 고뇌를 비워내고나면 육신은 하나의 검이 되고, 검은 육신과 하나가 된다.

마음껏 마력을 방출하며 칼춤을 추는 엘로아는 폭풍 그 자체였다.

까다로운 강적임이 틀림없을 백기사들이 마치 일개 병졸처럼 베어지고 쪼개진다.

백색창이 폭풍이 몰아치는 대나무 숲처럼 흔들리는 가운데…

-쇄애애애액!

흉흉한 소리를 내며 새빨간 창이 사이로 기어들어온다.

적기사는 끝까지 신중했다.

결코 혼자서 엘로아를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차륜 전술을 구사하듯이 백기사를 차례로 투입해 빈틈을 벌린 뒤 엘로아가 허점을 보인 순간을 노려 간간이 공격했다.

-콰과과광!

소리의 영역을 넘어, 충격파처럼 변해버린 소란 속에서도 엘로아는 등 뒤를 찔러오던 붉은가지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했다.

설령 사각에 존재할 지라도 반경 30M의 모든 공격을 감지할 수 있는 계약, ‘초월지’ 덕분이다.

“핫!”

엘로아는 이미 쿠키처럼 박살이 나 있는 땅 위로 재빨리 몸을 굴리며 창격을 피해냈다.

붉은가지와 직접 부딪히는 것은 좋지 못한 선택이다.

회피를 우선시하다 보니 이런 볼썽사나운 동작마저 취하게 되었다.

붉은가지에서 뻗어온 결계마저 피해낸 뒤 적기사 쪽으로 몸을 돌려 도약하려 했다.

이 백기사들을 되살려내는 것은 저 붉은가지다.

결국 적기사를 죽이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철컥! 철컥! 철컥!

순식간에 물러서서 몸을 빼는 적기사.

달려들려는 엘로아를 가로막는 것은 하얀 성벽처럼 느껴지는 수백 기의 백기사다.

감정도 이지도 없는 그것들은 자신의 대장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엘로아의 강인한 육신과 두려움 없는 검격이 질풍으로 화해 나아간다 한들, 팔랑크스 대형처럼 빼곡하게 창을 겨누는 백기사를 모두 뚫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리한 힘 빼기였다.

아마 엘로아가 지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면 적극적으로 교전에 개입해 목을 치려 들겠지.

“헉, 헉… 허억…”

숨은 이미 턱 끝까지 차올랐다.

호흡은 격해져 혀끝에서 쇳맛이 날 정도이다.

더 이상 시간이 끌릴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정말 끝을 내야 할 때이다.

건곤일척의 일격에 모든 마력과 모든 힘을 걸어야만 했다.

-드르르륵!

단단히 뿌리를 뻗은 나무처럼 대지를 딛는 두 발.

비스듬하게 내려온 검.

저 멀리서 적기사가 최후의 발악을 보며 비웃듯 눈을 빛내는 것이 보인다.

-우우우웅!

사방을 짓누르는 마력의 압력.

엘로아의 손등 위로 하얀 핏줄이 돋으며 연분홍빛 마력의 스파크가 화려하게 튀기 시작했다.

-Jazak—-!

수상한 전조를 느낀 적기사의 지시에 백기사가 일제히 엘로아에게 달려들었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자신을 방패삼아 엘로아와 적기사 사이에 커다란 성벽을 쌓는다.

엘로아의 공격을 몸으로 막을 심산이었다.

모든 힘을 일 점에, 극점에 모아 벤다.

몸과 정신 그리고 검이 하나가 된다면,

그 참격은 하늘까지 닿을 터.

소리 없이 검을 올려 그은 그 순간 잡념은 사라졌다.

죽음도 삶도 그 경계도 오로지 머리카락보다 얇은 검 끝 위에 오롯이 실릴 뿐.

천지가 진동한다.

공간을 베어낼 듯 천지를 베어낼 듯 깔끔한 일선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격은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달린 위력을 보였다.

엘로아를 향해 덮쳐들던 백기사가 핵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일제히 사라진다.

농축되었던 마력의 분출로 폭발하듯 날뛰는 섬광.

엘로아의 검이 머리 위로 그어진 그 순간.

————-!!!

하늘이 보였다.

지하 45M의 터널.

지상에 이르기까지 벽면과 암반, 두꺼운 토대를 모조리 베어낸 결과 수백 미터에 달하는 틈새가 생겨난 것이다.

목숨을 내던지는 듯한 검기가 적기사의 코앞에서 번뜩이고.

————-!!

폭격이 일어난 듯한 굉음과 함께 적기사가 내민 붉은가지와 부딪친다.

동시에 퍼져나가는 반원 형태의 왜곡장, 그리고 잎맥처럼 줄기줄기 뻗는 결계.

지금껏 무리 없이 엘로아를 상대하던 적기사의 동체가 일순 출렁인다.

왜곡을 통해 물리적인 충격을 분산시켰다 한들, 결계를 통해 분산시킨 에너지마저 또 한 번 분산시켰다 한들,

커다란 힘을 정면으로 마주한 까닭에 크게 물러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왜곡장으로 이루어진 방패는 단순히 물리적인 가림막 따위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강력한 물리적 충격이 가해지건 그 방향을 교묘하게 틀고 조작하여 외부에서 가해진 ‘힘’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왜곡하는 난공불락의 방패.

통상적이라면 엘로아의 검격이 그 방패를 넘어설 일은 없었을 것이다.

-콰직!

그러나.

엘로아의 참격이 쉴드처럼 전방을 향해 펼쳐졌던 왜곡장에 격돌하자마자 깨져나가기 시작한다.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집약된 힘과 물리력이 기어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빠드드득!

그러고도 여력이 남은 것인지 적기사의 텅 빈 몸 한가운데를 파고드는 참격은,

확실히 닿았다.

상처 자국 하나 없던 새빨간 흉갑이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움푹 패며 찌그러졌다.

허나.

거기까지다.

백기사를 재생시키는 붉은가지의 능력도 한계가 있던 것이겠지.

방어하기 위해 극심한 소모가 있었는지 엘로아가 일제히 베어낸 백기사는 다시 재생하지 않았다.

일격을 받아낸 적기사도 비틀비틀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완벽히 정상은 아닌 모양이다.

이러한 참격을 한 번만 더 날릴 수 있었더라도 승리의 여신은 엘로아에게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Krrrrrr

하지만 적기사는 죽지 않았고 여전히 힘이 남았다.

쓰러지지 않고 적의에 불타는 눈길로 엘로아를 노려본다.

“후우….”

엘로아의 몸에는 이제 한 줌의 마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계약의 대가가 이행되며 근육과 뼈에 막대한 부담이 실리면서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철컥!

적기사가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명백히 정상적이지 못하다.

막 고압 전류에 감전되었다 움직이는 것처럼 팔다리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Kra ra ra ra ra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기사는 환희에 찬 웃음을 지으며 엘로아에게 걸어온다.

괴물 주제에 너무나도 인간적인 웃음소리였기에 엘로아는 꺼림칙함을 느꼈다.

더는 되살아나지 않는 백기사의 잔해를 밟으며 나아간 적기사는 엘로아 앞에 섰다.

-빡!

“커헉!”

붕 휘둘러진 붉은가지가 엘로아의 복부를 타격했다.

2.5M의 거구가 휘두른 3M에 달하는 창격이다.

날이 달리지 않은 뒷부분에 얻어 맞은 엘로아는 공중을 날아 십여 미터를 날아가 뒤에 형편없이 추락했다.

목숨을 노린 일격이 아니다.

그 증거로 엘로아는 여전히 살아남아 배를 움켜쥔 채 꿈틀꿈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싸울 수 없다 해도 추하게 엎드려 죽을 생각은 없다.

-철컥 철컥 철컥

적기사는 다시 엘로아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퍽!

간신히 일어선 엘로아의 뺨에 거칠게 휘둘러진 건틀렛이 작렬한다.

마른 가죽을 매질하는 소리와 함께 엘로아는 다시 몇 미터나 나동그라졌다.

입 안쪽이 터져 핏물이 흐르고 두개골이 쪼개질 듯한 충격이 남아 괴롭다.

그 이격 째에 적기사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적기사는 자신을 긴 시간 동안 괴롭혀 왔던 적에게 철저한 응징을 가하려는 것이다.

지극히 인간다운 발상이었지만 지금껏 보여준 인간적인 면모를 생각하면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엘로아는 다시 일어나 검을 들어 올리려다 도저히 그것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미 힘이라고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남아있지 않다.

앞으로 주어진 길은 이대로 분풀이 대상이 되어 유린당하다가 너덜너덜한 시체가 되는 일뿐이다.

-Krrrrr

머리카락이 잔뜩 흐트러져 얼굴을 한껏 가린 엘로아.

그 위에 다시금 그림자를 지우는 적기사.

적기사의 팔이 다시 한번 올라가는 그 순간, 엘로아는 보았다.

적기사와 엘로아의 사이를 갈라서듯 끼어든 망토처럼 검게 일렁이는 입자.

전신을 날렵하게 감싼 흑색의 갑주와 같은 빛깔의 검.

매우 익숙한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적당히 해 씹새야.”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있는 힘을 다한 참격이 적기사를 향해 휘둘러진다.

-콰직!

엘로아가 가르쳐 주었던 그대로 휘둘러진 그림자의 검이 적기사의 투구에 작렬했다.

쩍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적기사의 몸체가 크게 휘청이며 날아간다.

물론 적기사의 상태가 온전했더라면 시우에게 공격을 허용하는 일 따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시우가 강해졌다고 한들 둘 간의 역량 차이는 운이나 실력 따위로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적기사가 저 멀리 날아가 버린 것은 지금 그것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엘로아가 모든 힘을 다한 것처럼 저 적기사 역시 상당한 수준의 소모를 겪고 있었다.

시우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엘로아는 멍하니 시우의 말을 듣고 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전까지는 죽음을 각오한 나머지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시우를 보자 이성이 되돌아온 것이다.

“자, 자네 지금 뭐하는 게인가? 진작에 도망친 것이 아니었나?”

“말 안 듣는 제자라 죄송합니다. 저 혼자 도망칠 수가 있어야죠.”

공간의 왜곡은 더럽게도 넓게 작용한 모양이다.

시우는 체감 1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오고 나서야 엘로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침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적기사가 엘로아를 가지고 놀 듯이 핍박하던 장면이었으니 어떻게 눈 돌아가서 끼어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약해졌던 것일까?

엘로아는 상황도 잊고 눈물이 핑 돌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럴 때가 아니라네. 도망쳐야 해!”

덮썩 그의 손목을 잡는 엘로아 하지만 그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모종의 다짐을 끝낸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스승님, 저놈 지금 정상이 아닌 거죠?”

시우에게 얻어맞은 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는 적기사.

그림자의 칼이 파고들었던 투구 한쪽에 긴 검상이 남아있다.

본래라면 왜곡장에 가로막히거나 쉽게 피해내야 했을 공격이, 적중해 유효타를 남겼다.

어찌 보면 절호의 기회.

엘로아가 여력이 조금 더 남았더라면 이길 수 있었겠지.

“스승님, 제게 주신 계약, 다시 회수하실 수 있나요? 여기서 확실하게 끝내는 것이 최고의 시나리오인 것 같습니다.”

엘로아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백기사를 물리치고, 적기사의 힘을 빼놓았다.

겨우겨우 만들어 놓은 1 대 2의 찬스.

이대로 시우와 엘로아가 빠져나간다면 다시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비겁의 마녀가 대책을 마련할 테니 말이다.

둘이서 합공을 하자, 아무래도 그런 의미 같았다.

그러나 엘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하네. 내겐 남은 힘이 없어.”

계약을 회수한다고 하여 바로 변경할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수호자의 계약은 전투용이 아니다.

무엇보다 엘로아의 몸은 이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저 혼자 해봐야겠네요. 가능할까요?”

엘로아는 고민했다.

불시의 기습이지만 일격을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약해져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지금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 중이다.

엘로아는 시우의 힘과 재능을 믿었다.

어쩌면 그가 적기사에게 최후의 일격을 꽂아 넣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이라는 가능성에 기대어 그를 사지로 밀어 넣는 것이 옳은 일인가?

과연 시우가 잘못돼 버린다면…

그렇게 염려의 말을 늘어놓으려던 엘로아는 시우의 눈을 보았다.

그것은 두려움을 잊고 절대적인 자신감을 품은 영웅의 눈이 아니었다.

끝없이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겁에 질린…

그러나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갈 용기를 지닌 자의 눈이다.

어쩌면 그를 너무 지켜야만 할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만약 시우를 ‘제자’가 아닌 ‘동료’라고 생각했더라면 엘로아는 지금 이 순간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천천히 생각을 곱씹은 엘로아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해볼 만할 걸세.”

엘로아의 말을 듣자마자 시우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들었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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