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66화 (266/917)

#266

1.

“뭐지?”

시우는 멀뚱히 터널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니까… 이상하리만치 넓어진 터널 한가운데 말이다.

이건 예기치 못했던 일이다.

두 명의 마녀를 벌레처럼 때려잡고 무시무시한 분위기와 함께 등장했던 적기사도, 수백 기에 달하는 백기사를 단신으로 때려잡던 스승님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지게 된 것이다.

“이건….”

위험하다.

정확히 어떤 원인으로 인해 이격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의 소굴 한가운데 혈혈단신으로 내던져졌다는 일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탈출은 가능하다.

시우는 엘로아와 수련을 통해 신체를 강화하는 한편 좌표이동식도 꾸준히 정비 및 개선을 거쳤다.

기존 좌표 이동식의 절차를 간략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재 위치를 확립’ 이후 ‘이동할 위치를 확립’ 이후 ‘거리를 계산해서 워프’…

많은 과정이 생략되었지만 대충 이런 느낌이다.

좌표이동식은 워낙에 복잡하고 정밀한 마법식인지라 고도의 집중력과 마력 제어를 요구했다.

따라서 온전히 집중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시전 시간 자체가 굉장히 길어졌다.

정작 실전 중에 도주를 위해 사용하지 못했던 적이 대다수였던 것이다.

이런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시우는 앞선 3단계의 작업을 단축하는 최적화 과정을 거쳤다.

즉, 이동 중에 항상 현재 위치의 좌표를 얼추 선 입력해둔다.

이동할 위치는 랜덤으로 하되 ‘지상에 한정한다’를 적용해 계산 시간을 단축하고 안전한 도주를 도모한다.

에아의 물병처럼 아예 이동을 차단하는 결계가 아니라면 꽤 빠른 시간에 밖으로 도주할 여건을 확보해 놓은 것이다.

비겁의 마녀가 일으킨 겁난.

이 사태에 시우는 수수방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작은 힘이라도 보탤 것이라고, 최소한 손을 놓고 구경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딱 좋은 도주 타이밍이었다.

이미 시우가 감당할 수 없는 강적이 등장했고, 도망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용으로 인해 엘로아와 완전 떨어진 상태다.

“피어라.”

시우는 주저하지 않고 좌표이동식의 계산을 시작했다.

터널이 갑자기 넓어진 이후로 주위의 마력이 달라졌다.

엄밀히 말하면 마치 강력한 방해전파처럼 마력의 흐름을 억누르려 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그 방해요소를 변수부에 대입하고 적당히 조절해주니 단숨에 이 개미굴을 빠져나갈 통로가 완성되었다.

그때.

-콰과과과광!

소리가 울려왔다.

적기사가 등장하기 전에 들려왔던 것처럼, 너무나도 커다란 나머지 수백 미터 벌어진 공간을 넘어 전해져 오는 듯한 진동.

그 음원이 어딘지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어마무시한 소리였다.

저쪽에서는 엘로아와 적기사의 사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 공간 일대의 작용은 적기사에 의한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 이쪽은 ‘방해꾼’ 내지는 ‘걸리적거리는 녀석’ 정도로 취급되어 덩그러니 다른 장소로 이동하게 된 것이겠지.

“이게 맞는 건가?”

적기사가 어떤 존재인지는 엘로아에게 전해 들었다.

비겁의 마녀가 소유한 가장 큰 전력이니 사전에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자면, 적기사는 예전부터 엘로아에게 7번이나 도망을 친 강자였다고 한다.

일곱 번을 싸워 일곱 번을 모두 패주한 존재가 무슨 강자냐…라고 되물을 수 있겠다.

실제로 시우도 그렇게 생각했었고.

하지만 진지하게 전투에 임하는 엘로아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지금은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고작 일격을 본 것만으로 ‘적이 아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 압도적인 힘과 위력을 7번이나 정면에서 받아내고도 살길을 찾은 놈인 것이다.

시우였더라면 1초도 버텨내지 못했을 그것을 말이다.

그런 적기사가 지금은 더욱 강해져 있다.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감히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시우는 왼손의 건틀렛을 해제했다.

손등 위에 모래시계 모양 문양을 한 엘로아의 계약이 새겨져 있다.

익사한 마녀에게 습격을 받은 이후 엘로아가 넘겨주었던 마법.

그녀의 말에 따르면 위기에 처했을 때 방어마법을 발동시켜주는 것이라고 전해 들었다.

12개 중 하나의 계약.

23 위계의 엘로아가 12분에 1에 달하는 전력을 시우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마법과 위계의 관계를 단순한 산술식으로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 코스트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콰아아앙!

저 멀리 몇 번이나 거듭해서 울리는 굉음.

이는 아직까지도 전투가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자면 엘로아가 아직도 적기사를 제압하지 못한 채 격전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이대로 손을 놓고 도망쳐도 괜찮을까?

자신 때문에 만전이 아닌 엘로아가 흉악해 보이는 적기사와 고전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엄밀히 말하면 시우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았던 것은 엘로아다.

페리윙클의 점괘가 굉장히 흉흉한 불운을 점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시우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엔 모두의 선택이 불러온 결과물이다.

책임은 양쪽 모두에게 있다.

적어도 시우는 그리 생각했다.

“이거라면…”

시우는 페리윙클이 건네주고 간 네잎클로버를 바라보았다.

페리윙클의 부연설명에 따르면, 반드시 한번 죽음의 운명을 회피하게 해주는 일종의 부적인 모양이다.

추가로 시우에게는 오르골이 있다.

최고 강도로 높인 뒤 잠입한다면 적어도 전황을 엿볼 수 있을지 모른다.

시우로서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만약 스승님이 고전하고 있다면, 계약을 취소하고 돌려주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위기가 닥쳐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시우는 결심을 굳히고 소리가 들려오는 전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2.

무려 천이백에 달하는 백기사와 완전히 각성한 붉은가지를 들고 나타난 적기사.

엘로아는 시우의 예상대로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백기사가 들고 있는 백색창은 붉은가지와 공명하며 무겁게 주변을 억눌렀다.

광범위 디버프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일전 백기사 무리를 상대할 때도 방해요소였으나 이렇게 숫자가 단번에 모이니 그 효과가 한결 체감된다.

마치 물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몸 움직임에 지장이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엘로아가 일방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아아압!”

청명한 기합과 함께 힘껏 휘둘러진 계약검이 수십에 이르는 백기사를 일제히 베어낸다.

파괴되었던 백기사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본 뒤, 열한 번째 계약을 개방한 엘로아는 일 검에 수십 기 씩 백기사를 베어 넘기고 있었다.

벌써 1000기는 베어 넘긴 것 같은데 저 멀리서 격전을 지켜보는 적기사와의 거리는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게 엘로아가 백기사를 베며 전진하는 동안 이미 쓰러져 잔해가 되었던 것들이 다시 일어나 창을 겨누기 때문이다.

“크윽!”

엘로아는 총 16방향에서 찔러오는 창을 일제히 걷어냈다.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손등으로 주변을 후려치자 클레이모어라도 터진 것처럼 박살 나 날아가는 백기사 무리.

그러나 흰개미 떼처럼 지겹게 달라붙는 백기사는 아무리 엘로아라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적기사가 병장기를 부딪치는 것만으로 부담을 누적시키는 까다로운 전술을 구사한다 해도 엘로아는 능히 해결할 수 있었다.

사냥을 통해 갈고 닦아온 전투 경험은 헛것이 아니다.

당장 시도해 볼 만한 수 십 가지 공략법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중 하나 정도는 반드시 유효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엘로아가 적기사에 대해 잘 알고 있듯이, 적기사 역시 엘로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 서로 탐색전을 진행한 이후, 완벽한 승산을 장담할 수 없자 엘로아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 약점은 두 가지.

하나.

기본적으로 엘로아의 계약은 한 명을 상대로 시전할 수 있다.

따라서 엘로아는 일대일에서 압도적인 강점을 보이는 반면, 일대 다수 전투에 대해서는 다소 미흡한 자성마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

둘.

엘로아는 지구전에 약하다는 것.

그녀가 낙인에 저장할 수 있는 마력의 총량은 일반적인 마녀보다 적다.

또한 모든 마법을 전투형에 가깝게 마개조하는 과정에서 최적화가 깨지며 소모 값이 큰 편이다.

현재 보유한 모든 계약을 개방한 지금은 그 소모치가 맥시멈에 달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훅훅 빠져나가는 마력을 체감할 정도다.

물론 아무리 엘로아가 일 대다수에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인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다소’ 약하다는 것이다.

어중이떠중이를 모아놓고 엘로아의 발길을 붙잡으려 했다면 그녀의 일태도에 스러질 허수아비를 늘어놓는 것뿐이겠지.

그러나 적기사를 모태로 복제된 백기사들은 충분히 강력했다.

그런 백기사들이 목숨을 도외시한 채 내미는 창은 아무리 엘로아라도 무시하고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행여 베어낸다 해도 금세 다시 일어나 전장에 합류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기사를 방패로 놓고 밀어붙이는 것은 최고의 한 수였다.

열 걸음을 나아가기 위해서는 걸음 수에 열 배가 되는 적을 베어야 한다.

그 결과 말끔했던 엘로아의 옷은 군데군데 찢겨나갔고, 그녀의 탐스러운 분홍빛 금발은 땀에 흠뻑 젖어 물이라도 끼얹은 형국이 되었다.

모든 것이 뜻대로 풀려나가지 않았지만 그나마 위안 삼을 것이 있다.

시우는 안전할 것이다.

조금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수호자의 계약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

만약 그에게 위기가 생겼더라면 자율방어처럼 발동한 뒤 엘로아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아마도 떨어지자마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겠지.

그 점만큼은 천만다행이었다.

“후우….”

10기가량의 백기사를 눈 깜짝할 사이에 엘로아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 주위의 공격을 물렸다.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하는 때다.

이대로 도망치느냐.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느냐.

여기에 모여있는 적기사와 백기사가 아마도 비겁의 마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

즉, 이놈들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 뒤로 서울을 위협하는 전력은 사라지게 된다.

남은 마력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이라면 능히 추적을 뿌리치고 한 몸 뺄 정도의 여력이 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엘로아가 다시 전력을 발휘할 수준을 확보하려면 족히 1주일 정도의 요양 및 마력 회복이 요구된다.

즉, 목숨을 구할 수는 있으나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막을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이상 격전을 이어간다면, 구경하고만 있는 적기사가 본격적으로 참전한다면 도망칠 여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죽거나 죽이거나 두 결과 중 하나만이 남겠지.

-Gavakkkkk——!

적기사의 포효가 울렸다.

창을 치켜든 백기사들이 일제히 엘로아에게 달려옴과 동시에 그 하얀 물결 사이를 가르며 적기사가 날아온다.

거리가 멀다 한들 인간의 굴레를 초월한 결투에서는 지척이나 다름없는 거리다.

엘로아가 잠시 상념에 빠질 시간 따위 5초도 되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쪼개며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엘로아는 자신의 죽음을 떠올렸다.

전력을 다했음에도 결국 적기사를 꺾지 못하고 비참하게 패배한 자신의 모습을.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껏 생사를 건 칼날 위의 춤을 추게 되었을 때.

두렵지 않았던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라피….”

무고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라피의 말.

엘로아가 생전 한 번도 긍정해주지 못했던 사랑스러운 제자의 곧은 신념.

어리석은 스승은 뒤늦게 그녀의 유언을 칼처럼 품었다.

“시우….”

마지막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의 성장을 한껏 칭찬해 주었을 것을.

조금 더 솔직하게 그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을.

엘로아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사방을 짓밟는 발소리가 엘로아의 귓가를 파고든다.

엘로아는 검병을 부서질 듯이 쥐었다.

“천천히 오거라.”

낙인에 남아있던 모든 마력이 힘으로 변환되어 사지에 깃든다.

도주에 사용할 힘까지 아낌없이 쏟아부은 엘로아는 벚꽃 빛의 안광을 번뜩이며 그녀의 적을 노려보았다.

오늘 엘로아 티페레트는 이곳에서 죽거나.

살아 남아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나는 도망치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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