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65화 (265/917)

#265

1.

엘로아는 검을 올려잡은 상태로 적기사를 노려보았다.

적기사 역시 붉은가지를 쥔 채 불길한 흉소를 흘리며 엘로아와 마주한다.

서른 개의 눈을 지녔던 적기사는 비겁의 마녀에 의해 마흔개의 눈을 지니게 되었다.

그 개수는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커다란 재앙을 이끌고 왔다고 평가되는 호문쿨루스와 동일한 숫자였다.

거대한 뱀의 형태를 취했기에 ‘요르문간드’라는 이명이 붙은 괴수는, 3개의 왕국, 8개의 도시, 셀 수 없이 많은 마을 그리고 78명에 달하는 마녀를 잡아먹고 나서야 케테르 공작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때는 게헨나의 체계가 막 자리잡히던 시절.

그 당시 마녀의 평균 위계가 15 위계였음을 고려하면 78명의 마녀가 죽임을 당한 것은 그렇게 경악할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요르문간드의 강함과 그와 동일한 눈을 가지게 된 적기사를 저평가할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위계의 높낮이가 절대적인 전투력의 척도가 되지 않듯이 눈의 개수도 호문쿨루스의 강함의 절대적 지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기사는 일직이 많은 마녀를 죽이며 오랜 기간 경험을 쌓아온 전사이다.

엘로아가 7번 싸워 7번의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적기사를 죽이지 못한 것은 방심 때문이 아니다.

적기사가 제 한 몸 뺄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을 남겨놓고 엘로아와 창과 검을 나눌 실력자였기 때문이다.

“……”

“……”

엘로아는 침착하게 적기사와 대치한 상태로 서로의 전력을 가늠했다.

먼저 적기사.

호문쿨루스의 전력은 그 안에 어떤 것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명백히 갈린다.

가령 별 볼 일 없는 호문쿨루스더라도 ‘그노시스의 알’에 까다로운 자성마법이 탑재되어 있다면 강적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붉은가지’라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예장을 들고 있는 적기사는 그 자체로 난적이었다.

사상과 순리를 비트는 창격.

온갖 마법작용과 영체의 기능을 저해하는 왜곡장.

맞닿은 사물의 현실을 조작하는 붉은 결계.

어지간한 전투형 마녀보다 응용의 폭이 넓고 대처하기 까다로운 마법을 운용한다.

과거 엘로아가 압도적인 전력 차를 지니고 있음에도 적기사를 완벽히 토벌하지 못한 요인이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재회한 적기사의 창은 뭔가 달라져 있었다.

창대를 타고 흐르는 예사롭지 않은 붉은 기운은 일전과 격이 다르다.

더 풍성하다고 해야 할까, 더 짙은 위화감을 품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비겁의 마녀는 적기사를 강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붉은가지 자체의 성능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다.

한편 엘로아.

이미 백기사를 처리하며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3할에 달하는 마력을 소모했다.

12개의 계약 중 하나는 시우를 지키는 ‘수호자의 계약’으로 빠져나가 11개의 계약밖에 다룰 수 없는 상태이다.

이전이었다면 큰 문제가 없었겠지.

하지만 최상의 상태로 다시 마주한 적기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숱하게 많은 공적과 호문쿨루스를 마주해왔던 엘로아는 실로 오랜만에 위기감을 느꼈다.

“물러서 있게. 도망칠 준비를.”

시우를 뒤로 물리고 계약검을 앞으로 비스듬히 겨눴다.

“계약한다.”

아직 남아있던 세 개의 계약 중 두 개의 계약을 활성화했다.

적기사는 아마도 비겁의 마녀가 보유한 최고의 한 수.

여력을 남겨놓고 맞설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상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모든 힘을 소진해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뒤가 없어진다.

계약 아홉, 육체에 관한 개념을 새로이 정립한다.

왜곡의 영향을 최소화 하기 위해 세계 위에 엘로아라는 존재를 다시금 확립한다.

이로써 결계에 휘말려 존재가 왜곡되거나 흐트러질 염려는 사라졌다.

계약 열, 남은 마력의 절반을 소모해 그것을 힘으로 치환한다.

비겁의 마녀가 지닌 전력은 적기사가 전부가 아니다.

아직 600기 정도의 백기사가 남아있으며, 전투력이 높지 않다지만 비겁의 마녀 본인도 있다.

이 이상 마력을 할애한다면 적기사와의 전투에서는 승리해도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다.

계약검의 옆면에 새겨진 12개의 문자 중 11개가 빛나며 묵직한 마력의 파동을 주위에 흩뿌렸다.

-철컥!

먼저 움직인 쪽은 적기사였다.

머리채를 쥐고 있던 마녀의 시체를 옆으로 던짐과 동시에 미끄러지는 듯한 스텝으로 앞으로 나서며 창을 찔러온다.

언뜻 보기에 그 움직임은 백기사의 것보다도 위력이 없어 보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 자체도 크지 않고, 그 안에 실린 힘도 별 볼 일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깊은 강물은 고요히 흐르는 것처럼 집중된 힘이 요란한 과시를 하지 않을 뿐, 실제로는 그보다 몇 배는 빠르고 강한 힘을 지니고 움직이고 있다.

쇄도한 창끝은 어느새 검역의 빈틈을 타고 심장을 노리며 뻗어오고 있었다.

“하압!”

엘로아의 몸이 반회전하며 창끝을 쳐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쳐내려 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흡인력이 발생하며 창날의 끝과 검의 옆면이 찰싹 맞붙는다.

힘이 부족했다.

적기사의 힘은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까가각! 까가가각!

엘로아는 상정 외의 결과에 당황하지 않고 곧장 소드 레슬링에 돌입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처음부터 그것을 노리고 있던 것 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상대와 병장기를 맞대고 끌어 당겨 공격을 저지하는 ‘바인딩’.

상대의 빈 곳을 노려 무구를 돌려내 제압하는 ‘와인딩’.

넓게만 보면 이 두 가지 개념으로 이루어지는 소드 레슬링은 문자 그대로 씨름이나 다름없다.

맞닿은 병기에서 전해져오는 압력과 힘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채 움직임과 리듬을 예측한다.

완급과 강약을 조절해 적의 병기는 쳐내고, 나의 병기는 적에게 치명상을 입히도록 하는 치열한 수 싸움이기도 했다.

-까각! 까가가각! 깍!

단단한 호두를 깨부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창날과 하얀 검신이 끊임없이 뒤틀리고 교차한다.

흡사 몸을 꼬며 싸우는 두 마리의 용처럼 정신없이 꼬이는 검과 창은 격돌할 때마다 격렬한 마력의 불똥을 토해냈다.

둘 모두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순수한 힘 자체만을 놓고 보면 적기사가 엘로아를 앞섰지만 기술의 격차는 엘로아가 우위를 가져갔다.

-까각! 까가가각!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수 초간 공중에서 엉키던 검과 창이 떨어진다.

이 교착상태를 먼저 풀어낸 것은 엘로아였다.

억지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거친 검격으로 적기사를 떨쳐낸 것이다.

연이어 호를 그리며 휘둘러진 창과 반대편에서 호를 그리며 올려 벤 검이 격돌한다.

단순히 레슬링 상태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파가 엘로아의 앞머리를 휘날리며 울려퍼진다.

-콰아아아앙!

“큭!”

엘로아는 곤혹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힘의 차이가 생겼더라도 기술의 격차는 여전히 유의미했다.

본래대로라면 나선을 그리는 검격으로 적기사의 창 끝을 제압하고 심장을 찔러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변수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저 ‘붉은가지’.

-콰아앙!

다시 한번 휘둘러지는 창을 맞받아낸 엘로아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직접적인 공격을 허용한 것은 아니다.

버틸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충격이 전달된 것도 아니다.

다만 저 붉은 창에 농축되어 있는 왜곡의 힘.

그 왜곡의 충격파는 병장기를 맞댈 때마다 엘로아의 속을 진탕으로 만들고 있었다.

근접전과 소드레슬링에는 자신 있는 엘로아가 먼저 초근접전을 피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엘로아는 침음을 삼키며 거듭 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넘실거리는 충격파가 검 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에 퍼진다.

달팽이관이 고장이라도 나버린 것처럼 균형감각이 망가지고 시야는 물에 잠긴 것처럼 일렁인다.

일정해야 할 호흡이 엇박으로 엉키고 심장마저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매스꺼움 정도였으나 교전이 길어질수록 서서히 통증의 영역으로 감각이 이동하고 있었다.

-후우웅!

머리를 노리고 횡으로 크게 휘둘러지는 창.

허리를 뒤로 젖혀 그것을 피해낸 엘로아.

창날이 그녀의 머리 위를 스쳐 가는 순간, 마치 창의 궤적을 그리는 것처럼 붉은 결계가 생겨나 엘로아에게 쏟아진다.

엘로아는 이미 무게 중심이 무너진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해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스쳐 간 결계에 몸이 안쪽에서 산산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뇌를 찌른다.

“읍….!”

엘로아는 머리가 뿌옇게 변할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자리를 박찼다.

거리를 벌린 채 상처를 살핀다.

“하아…하아….!”

상처 자체는 무척 얕았다.

팔이 통째로 뜯겨 나간 줄 알았거늘 상처 자체는 나뭇가지에 스친 생채기 수준이다.

하지만 이 짧은 탐색전만은 엘로아의 경계 의식을 촉구하기에는 충분했다.

몇 번에 걸친 계약으로 강화하고, 왜곡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존재까지 확립했다.

지금 엘로아의 몸은 마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걸어 다니는 요새에 가까운 내구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영체가 고작해야 부산물로 취급하던 결계에 부상을 입었다.

생각해보면 왜곡장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 것부터 이상했다.

일전의 격돌에도 분명 왜곡장을 느꼈으나 그때는 고작 뱃멀미 정도의 어지러움에 불과했다.

지금처럼 더는 검을 맞댈 수 없어 뿌리쳐야 할 수준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후우….”

재회한 적기사는 생각보다 훨씬 난적이 되어 있었다.

엘로아의 모든 마법과 공격은 근접전에 특화되어있다.

그렇기에 일수를 나누는 것만으로 막대한 부담을 떠넘기는 붉은가지는 상성이 좋지 못했다.

엘로아는 심호흡과 함께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동요로 잔물결을 일으키던 마음은 어느덧 명경지수처럼 맑게 변한다.

어차피 동요한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상황을 파악하고 최선의 판단을 할 뿐.

서로의 무구가 맞닿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발을 더 많이 써야 한다.

자리를 지키는 것에 고집하지 않고 밀면 밀리고, 당기려 할 때 파고 들어가자.

계약을 하나 더 소모해야 할까?

남은 마력을 적기사를 상대하는데 전부 쏟아붓는 것이 옳은 판단일까?

적기사는 확실한 선제권을 지녔음에도 엘로아를 몰아붙이지 않고 물러섰다.

대신 제자리에 선 채 창을 치켜들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D—-D——Drivat—-!”

엘로아는 또 다른 의미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선홍색 투구 아래로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서 인간의 언어와 흡사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을 살아온 호문쿨루스는 점차 또렷한 자아를 지닌다.

그렇지만 단순한 울음소리가 아닌 의미와 체계가 잡힌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듣도보도 못한 일이다.

“Drivat—- Lajak—-!!”

탁음이 섞인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아니, 노래에 가까울까?

강철을 긁어내는 듯한 거센소리와 함께 붉은가지에서 새빨간 결계가 뻗었다.

처음엔 공격이라 생각해 대응하려 했으나 정작  결계는 엘로아의 어깨너머로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곳곳에 박혀 들었다.

“이건…!”

엘로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다.

현실이 잠식되고 있다.

아무리 5개의 터널이 모이는 곳이라 해도 지하공간인 만큼 넓이는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렌즈로 굴절된 상을 보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넓이로 변해있다.

더욱 기묘한 것은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전혀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장소였던 것처럼 정신을 차리니 뒤바뀌어 있었다.

엘로아는 돔형 축구장보다 넓고 높게 변해버린 빗물 터널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았다.

“——-Yatholot!”

적기사가 창끝으로 바닥을 찍는 순간.

구석구석으로 뻗었던 결계들이 일제히 소멸한다.

정적이 일었다.

“시우…”

갑작스러운 정적은 늘 불길한 미래를 동반하곤 한다.

좌표이동식으로 탈출을 준비하고 있을 시우를 돌아본 엘로아.

그를 먼저 도망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시우는 없었다.

마법이 사용되는 기척도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먼저 도망간 것은 아닐 것이다.

당황하는 엘로아의 눈에 또 다른 이변이 포착되었다.

그녀가 여태 쓰러뜨려 왔던 백기사들이.

이미 잔해가 되어 땅을 구르던 것들이 역재생하는 것처럼 조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끅…끄윽…끅 끅…!

적기사는 또다시 불쾌한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붉은가지의 능력은 ‘왜곡’.

정해진 과거마저 비틀고, 천명과 천리를 거스르는 역천(逆天)의 예장.

비겁의 마녀가 수천 명의 인간과 다섯의 마녀를 제물로 바쳐 잠재력을 끝까지 끌어낸 붉은가지는 복제한 호문쿨루스를 되살려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인과와 섭리를 초월한 기현상은 이미 망가졌던 호문쿨루스를 모조리 복구해냈다.

거의 시차 없이 통로에서 수 백기에 달하는 백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일정한 박자로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부츠 소리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소음과 함께 소치틀이 보유한 거의 모든 백기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오직 엘로아 티페레트를 사냥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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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몽님이 제공해주신 팬아트…!

라피를 부르며 슬퍼하는 티페레트 공작입니다!

퀘몽 그림공방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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