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1.
총 1km 남짓한 거리를 걷는 동안 엘로아는 시우에게 단 한 번도 전위를 내주지 않았다.
최초 서른 두기가 일제히 달려들었던 것과는 달리 여덟 기에서 열기 정도씩, 훨씬 소극적인 인원이 공격해 오는데도 그랬다.
“물러나 있게.”
겉으로는 시우의 참전을 허락한다 말을 해두었지만 실은 불안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미숙한 시우가 찰나의 실수나 방심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을까 말이다.
시우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면 끝까지 미룰 생각이었다.
“하압!”
벌써 열 번째 격돌.
아홉 기의 백기사를 깔끔하게 베어 넘긴 엘로아는 다시금 호흡을 가다듬었다.
첫 싸움 때처럼 마력을 거창하게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비겁의 마녀가 엘로아의 전력을 가늠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백기사의 수준을 파악했다.
적기사라면 몰라도 그 하위호환에 불과한 백기사는 힘으로도 기술로도 엘로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남은 것은 효율을 의식하며 최소한의 힘만으로 제압할 뿐.
“뭔가 이상하군.”
“뭐가 말인가요?”
엘로아의 중얼거림에 시우가 반응했다.
“내가 상정했던 가장 최악의 상황은 백기사를 대동한 적기사가 일제 공격을 시도하거나, 축차 투입되는 물량에 마력이 고갈되는 것이었네. 특별히 병법에 능한 자가 아니라도 이런 식의 전력 소모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인데…”
상황 자체만 놓고 본다면 매우 순조롭다.
벌써 도합 150기의 백기사를 거의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죽였다.
적 전력의 1할을 넘어가는 숫자를 소모값 없이 처치한 것이다.
이쯤 되자 도리어 지나치게 쉽다는 것이 불안함이 되어 등골을 긁었다.
“외부로 나간 것이 아닐까요? 결계를 걷어내기 위해서요.”
“그럴 리는 없네. 소치틀의 계획의 핵심은 이 배수 터널이야.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지켜내야 하는 요충지지.”
위치포인트가 보유한 최고 전력이 턱 밑까지 칼을 밀고 있는데 외부로 병력을 돌린다?
승산이 거의 없는 도박이나 다름이 없다.
엘로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계약검의 검병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쯤 되면 비겁의 마녀도 알아차렸을 것이네. 고작 이 정도 숫자의 백기사 따위로는 우리의 진격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탐색전이라고 부르기에 서로 간의 데이터는 넘치도록 쌓였을 것이다.
하다못해 보다 공격적으로 전력을 배분하고 적기사나 강력한 호문쿨루스를 내보내지 않는다면 엘로아를 저지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다른 수직구로 진입한 두 마녀가 훌륭히 양동작전을 펼쳐주고 있는 걸까?
“이렇게 애매한 숫자로 툭툭 병력을 버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정도로면 발걸음을 잡는 정도밖에 되지 않거늘…”
“발걸음을 잡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닐까요?”
그 뒤에 병풍처럼 서 있던 시우는 이마에 흐르는 엘로아의 땀을 대신 닦아주며 말했다.
“그대 생각을 말해주게.”
“제단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누구도 모르잖아요. ‘제단’이 완성되는 순간 완벽하게 주도권을 쥘 방법이 있어서 시간만 끌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일리 있군.”
엘로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좀 전부터 간헐적으로 울리던 귀곡성이 터널을 한가득 채웠다.
-오—-오오오—-오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확실히 더 크게 들린다.
칠판을 긁는 소리보다도 신경을 파고드는 불쾌한 울림에 엘로아도 시우도 눈을 찌푸렸다.
“저것도 지긋지긋하네요.”
“그러게 말일세.”
델라는 저 소리를 지척에서 몇 개월 동안이나 들어놓고 제정신을 유지했다는 것 아닌가?
시우는 새삼 그녀의 정신력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신이었더라면 한 사흘째 되는 날에 미쳐버렸겠지.
“서두르겠네. 그리고 아까부터 거듭 말하지만 언제든 퇴각할 준비를 해놓게. 시간은 내가 벌 수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오오——!
더는 가로막는 백기사도 보이지 않았다.
모종의 불안함을 느껴 통로로 달려나가던 시우와 엘로아는 동시에 멈춰 섰다.
질질 끄는 듯이 길게 울리던 비명이 카세트테이프가 끊어진 것처럼 중간에 뚝 끊겼기 때문이다.
언제쯤 끝나나 싶었던 듣기 싫은 소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적막이 감돌자 차라리 계속 들려주었으면 하는 심정이 들었다.
어찌됐건 상황이 일변했다는 의미였으니.
시우와 엘로아가 멈춰선 장소는 다섯 갈래의 터널이 모이는 갈림길.
오른쪽에서 두 번째 터널을 따라가면 제단이 나올 예정이었다.
“준비하게나.”
엘로아는 다시 계약검을 들었다.
이제 슬슬 본격적인 공격을 감행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많은 숫자로 밀어붙이고 싶다면 널찍한 장소에서 하는 것이 수적 우위를 살리기 적합할 터.
다섯 방향으로 나 있는 터널이 한 곳으로 몰리는 이곳이야말로 적합하겠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눈앞에 닥친 위험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번에는 그대도 힘을 써줘야겠네.”
“알겠습니다. 스승님.”
“부디 조심하게.”
“제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절대 발목잡지 않을 테니까요.”
-철컥!
일전과 달리 사방에서 울려오는 쇳소리와 함께 터널에서 백기사가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끝없이, 끝없이 나온다.
얼핏 보기에도 세자릿수에 달하는, 결코 적지 않는 숫자였다.
“좋군.”
이 정도의 전력을 한 번에 내보낸 것이라면 비겁의 마녀가 승부수를 띄웠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엘로아의 안색은 차분했다.
언뜻 보기에 빗물 터널에 진입한 이후로 가장 큰 위험이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백기사는 엘로아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대할 만했다.
엘로아의 자성마법과 전투 스타일은 출력은 뛰어나나 연비가 그리 좋지 못한 스포츠카를 닮았다.
만약 백기사가 50기에서 100기 정도씩 축차 투입 됐더라면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재가속하는 과정에서 마력이 계속 낭비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기사를 대동하지 않은 백기사가 이 정도 숫자로 옹기종기 모여준 것은 마력의 절약 측면에서 매우 호재였다.
하지만 아무리 엘로아라도 여섯개의 계약만으로 이들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힘들다.
“계약한다.”
따라서 추가로 두 가지 계약을 내걸었다.
계약 일곱, 전체 마력의 4분의 1을 지불하여 순수한 힘으로 전환한다.
일곱 번째 계약으로 부족한 힘을 보충한다.
여기에 모인 백기사는 적어도 전체 병력의 반절 이상.
마력의 4분의 1만을 소진하고 정리하는 것이 베스트 시나리오라고 생각해 힘을 조절하고 제약을 걸었다.
계약 여덟, 반경 30M의 모든 공간을 감지하는 ‘초월지(超越知)’를 얻는다.
여덟 번째 계약으로 다수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사각을 없앴다.
특히 여덟 번째는 일대 다수의 전투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각지대를 커버함과 더불어 시우가 등 뒤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즉각 돕는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 넓은 통로가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일제히 달려드는 백기사.
계약검을 휘두르며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마주하는 엘로아.
-쾅! 쿠쾅! 콰과광!
분홍빛 마력반사광을 길게 늘어뜨리며 춤을 추듯 사방으로 검기를 발산하는 엘로아의 모습은 흡사 양 떼에 뛰어든 늑대와 같았다.
검을 휘둘러 벤다.
발을 휘둘러 몸통을 쪼갠다.
지나치게 가까이 붙었다 싶을 때는 어깨나 팔꿈치를 이용한 육탄 돌격까지 감행하며 전진했다.
어지간한 마녀는 갈기갈기 찢어 죽일 수 있는 백기사도 엘로아의 맹공 앞에서는 수수깡처럼 꺾여나갔다.
공교롭게도 백기사와 엘로아의 상성은 굉장히 좋았다.
각종 마법 작용을 방해 및 방어하는 붉은가지의 역장은 엘로아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녀의 계약은 체외가 아닌 뼈와 근육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외부로 분출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한 물리적 실체를 지닌 이상 왜곡장에 방해를 받는 정도가 크지 않았다.
물론 역장의 방어력이 단단한 만큼 베어내는 데 조금 더 힘이 들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엘로아는 네 기의 백기사를 동시에 베며 힐끗 시우의 상태를 살폈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 정도의 수를 동시에 상대하며 단 한 기의 적도 놓치지 않을 순 없다.
대략 7~8기에 달하는 백기사가 엘로아의 검격을 피해 시우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노심초사하며 걱정하던 엘로아였지만 이내 그 걱정은 기우로 돌아갔다.
“합!”
제자리에서 핑그르르 돌듯 검을 휘두르는 시우.
태생적인 마력량의 차이와 기술의 차이 덕에 엘로아만큼 폭발적인 파괴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분한 눈길로 자신을 덮쳐 드는 백기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한번 얻은 깨달음은 시간이 지났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시우의 검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나풀거리며 공간을 날카롭게 가르는 리본과의 연계는 훨씬 더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세련된 검술이다.
정제된 검술이다.
또한 아름다운 검술이다.
이전 5기의 백기사를 상대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적이 일제히 달려듦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하나씩 수를 줄여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콰과과광!
시우의 동작이 어설프게나마 엘로아의 참격을 따라 그린다.
보다 더 정확하고, 보다 더 강렬한 일격이 백기사 하나의 허리를 단숨에 휘감듯 베어냈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수련의 결과물, 낙인 안에 내재한 만병지왕의 계약이 실전경험을 만나 점차 만개하고 있었다.
점점 더 강해진다.
거짓말처럼 백기사를 상대하는 것이 이전처럼 어렵지 않았다.
전신의 혈맥을 타고 거세게 흐르는 피가, 아주 작은 근육 하나하나까지 의지대로 움직이는 듯한 일체감이, 검과 하나가 된 듯한 손이, 아주 생생하게 느껴진다.
시우는 웃음이 피어날 것 같은 것을 참으며 심장으로 창을 찔러오던 백기사를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쪼개버렸다.
“후우…후우…”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시우는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엘로아 역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묶었다.
총 598기의 백기사가 엘로아의 손에 의해 박살 났고, 새어나간 22기는 시우가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물론 전체적인 숫자에 비해 시우의 조력은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으나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다는 것은 명확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나?”
“괜찮습니다. 스승님은요?”
“걱정 말게나, 이 정도의 잡졸들이야 아무렇지도 않네.”
엘로아의 표정은 한결 여유가 생겼고 시우는 뿌듯함과 기쁨에 슬쩍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 지레 겁을 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겁의 마녀는 상정 외의 기습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진짜 적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지만 이런 낙관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콰앙!
굉음이 울렸다.
부서진 백기사의 잔해 사이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콰앙!
다시금 저 멀리서 철판을 내리치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마치 지진이 난 듯한 떨림이 동반되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조심스레 계약검을 거머쥐는 엘로아와 소리가 들려오는 통로 쪽을 바라보는 시우.
-철컥 철컥 철컥
얼마 지나지 않아 피에 젖은 듯한 묵직한 발소리가 뒤를 잇는다.
장식불이 비추는 갈림길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백기사보다 조금 더 커다랗고 피칠갑 한듯 새빨간 갑주를 걸친 기사였다.
“저 놈이 적기사…”
분위기가 다르다.
조금 커다랗다는 것과 색이 다르다는 차이점밖에 없는데 등장 순간부터 시우의 본능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저놈은 자신이 어떻게 해볼 레벨이 아니다’라고.
비겁의 마녀에게 사로잡히기 전보다 0.5M 정도 신장이 커져 지금은 2.5M에 이른다.
오른손에는 2.5M는 족히 되어보이는 붉은 창, 붉은가지가 들려 있다.
온갖 제물을 흡수하며 제단 위에서 각성 의식을 끝낸 덕에 적기사도, 붉은 가지도 훨씬 더 짙은 심홍빛을 지니게 되었다.
“……!”
“……!”
잔뜩 긴장한 눈으로 적기사의 모습을 살피던 시우와 검을 나눌 준비를 하던 엘로아는 동시에 숨을 집어삼켰다.
두 사람은 연이어 들려온 두 번의 굉음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적기사의 손에는 두 명의 마녀가 머리채를 쥐여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건강한 갈색 피부를 지닌, 시우에게 추파를 던졌던 농경의 마녀, 에블린.
하반신이 깔끔하게 사라진 그녀의 상반신에서는 반쯤 잘려나간 내장이 구불구불 흘러나왔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시멘트 바닥에 질질 끌렸는지 선홍색 살덩이에는 덕지덕지 먼지가 붙어있다.
하얀 머리칼에 어여쁜 회색 눈동자를 지녔던 유리의 마녀, 파트리샤.
그녀는 아마도 공포와 경악으로 물든 표정을 지은 채 뻣뻣이 굳어 있었다.
여기서 ‘아마도’라는 수식언이 붙은 것은 그녀의 머리가 절반밖에 남아있지 않은 까닭이다.
당연하지만 둘 다 죽었다.
-끅 끄윽 끅 끅
시우도 엘로아도 할 말을 잃어버린 가운데.
적기사의 투구 사이로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과 호문쿨루스는 종족도 다르고 신체 구조도 완전히 다르다.
당연히 사용하는 언어가 같을리 없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도,
한 마디의 문장이 오가지 않아도,
그 불쾌한 음색 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소리는 환희에 가득 찬웃음이다.
몇 번이고 자신을 몰아붙였던 적수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뒤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그 오랜 원망.
집념.
분노.
를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렇기에 적기사는 그저 웃고, 웃다가 눈을 떴다.
투구를 빼곡하게 수놓은 ‘스무 쌍’의 눈동자는 마치 인간이 웃음을 짓는 것처럼 붉은빛을 내며 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