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1.
어두컴컴한 아가리를 벌린 수직구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위치포인트 광화문 지부에서 불과 5km도 떨어지지 않은 한 공사 현장.
모종의 이유로 공사가 중단되어 녹슨 가림막만이 높게 둘러싸인 공터에는 덩그러니 놓인 구멍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승강기가 설치된 관리용 수직구가 있었는데 통째로 시멘트를 부어 단단하게 막혀 있었다.
비겁의 마녀가 공방으로 삼기 위해 여러 물리적, 마법적 절차를 거쳐 출입구를 숨겨둔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주변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아 갖은 유동인구로 북적거리는 서울에 공백 지대가 되어 있었다.
한낮이라 그런지 꽤 깊은데도 바닥이 보인다.
높이는 대략 40~50M 사이.
일대 전역에서 흘러온 빗물이 이 수직구 겸 환기구를 가득 채우게 된다면 수문이 열리면서 지하로 뻗은 빗물터널에 빗물을 저장하는 형식이다.
그렇게 모인 빗물은 5km에 달하는 터널을 흘러 한강으로 방류되고 말이다.
“…깊네요.”
시우는 갑옷을 챙겨 입은 채 터널을 내려보았다.
아주 작게 중얼거렸을 뿐인데 반향을 일으킨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그렇구나.”
엘로아는 영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시우를 데리고 가겠다는 결심을 끝낸 지금도 마음 한 켠은 가시가 박힌 것처럼 껄끄러움이 남았다.
그의 의기와 용기는 높이 사고 또한 존중한다.
그러나 강한 마음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면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부조리함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수아 선생의 신호를 기다리며 엘로아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시우만큼은 지켜내겠다는 다짐을 거듭했다.
-슈우우웅!
그리고 예정되었던 신호가 왔다.
작전의 진행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수아 지부장이 이면결계를 펼치며 백기사의 역습을 대비하고 결계의 축을 지킨다.
티페레트와 시우가 전력의 주축이 되어 공방 안에 숨어 있는 비겁의 마녀와 적기사를 격파한다.
그동안 농경의 마녀와 유리의 마녀가 시선을 분산시킴과 동시에 백기사를 유인한다.
끝.
사실 작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단순 명쾌한 공략법이다.
“시우, 명심하게. 위험하다 싶으면 주저하지 않고 퇴각해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도망이라는 말 대신 퇴각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대체한 엘로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 전역을 덮는 거대한 이면결계가 천천히 하늘로 모여들고 있다.
저 결계가 완성되는 순간이 진입 타이밍이었다.
시우 역시 투구를 젖히고 대규모 스케일로 구성되는 결계를 바라보았다.
동해같이 푸른 빛으로 빛나던 돔형 결계가 완성되는 순간 동시에 수직구 안으로 뛰어들었다.
2.
시우의 몸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마음만 먹는다면 힘을 집중해 아음속의 속도를 낼 수 있었고, 병장기를 휘두를 때 그 끝은 특별히 공을 들이지 않아도 음속을 가뿐히 넘어서기도 한다.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지금 그의 무장 중량을 합친다면 가뿐히 어지간한 이륜차의 무게를 넘어간다.
그러나 그림자의 갑주를 외골격 슈트 삼고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할 수 있음에도 가끔은 ‘완전한 인간이었던 시절’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예를 들자면 운이 좋아야 반신불수, 보통은 추락사 높이의 수직구를 맨몸으로 자유낙하 해야 할 때라던가.
-쿵!
하지만 시우의 염려와는 다르게 그의 무릎은 가뿐하게 점프로 인한 충격을 흡수하고 착지에 성공했다.
비록 자유 낙하한 쇳덩이에 얻어맞은 꼴이 된 시멘트 바닥은 쩍하고 금이 가며 흙먼지를 일으켰지만 말이다.
그 옆에 엘로아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뿐한 몸놀림으로 내려선다.
“내게 붙어서게 시우.”
“…….”
동서로 넓게 뻗은 터널에는 그 어떤 적의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우는 금방 알아차렸다.
이곳은 ‘다르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고작 아파트 13층 정도의 높이를 내려왔을 뿐인데 피부에 달라붙는 공기가 달랐다.
지옥의 입구에 발을 들인다면 이런 기분일까?
질척질척하게 내려앉은 분위기, 폐부를 한가득 채우는 마른 곰팡내 속에서 비릿한 혈향이 느껴지는 듯하다.
“빛이 필요하겠군.”
본래는 벽면에 수은등이 주르륵 박혀있지만 폐쇄된 지 20년이 넘은 지금 제구실을 할 리가 없다.
엘로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장식불 여러 개가 조명탄처럼 터널 안쪽으로 쏘아졌다.
그 덕에 수직구의 빛이 닿지 않는 터널의 안쪽까지 상세하게 살필 수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크네요.”
직경 10M.
덤프트럭 두 대가 지나다녀도 넉넉할 정도의 넓이와 높이다.
거대한 원기둥을 완만한 각도로 눕혀 놓은 듯한 통로의 모습은 예상대로 터널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하중을 분산하기 위해 반원 형태를 취하는 일반적인 터널과는 다르게 이 배수 터널의 통로는 거의 완벽한 원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높이와 폭이 거의 일치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니지, 몹시 좁은 거라네.”
엘로아는 이미 임전 태세에 깃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언뜻 보기엔 넓어 보이지만 단순 기동만으로 제트기 수준의 출력을 보여주는 엘로아가 날뛰기에는 무척이나 좁다.
아마 백기사들은 이 좁은 터널을 이용해 사방팔방 튕기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줄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요?”
“이쪽일세.”
엘로아는 동쪽 터널을 향해 돌아섰다.
수아 선생의 브리핑으로 전장의 지형에 대해서는 이미 숙지하고 있다.
지름이 5M~10M에 달하는 원기둥 형태의 통로가 개미굴처럼 서울 지하 곳곳에 뻗어 있다.
약 800M 간격으로 수직구가 존재하며 엘로아의 목표는 동쪽으로 2km정도 나아가면 있는 엔진실이다.
본래 시스템을 총괄하는 엔질실 겸 펌프실이었던 공동을 비겁의 마녀가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오—— 오—- 오오——-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기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음원이 멀고 복잡한 터널 벽면에 이리저리 굴절되어 미미한 진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한 수준이었다.
미간이 굳었다.
옆을 바라보자 별반 다를 것 없는 표정을 짓는 엘로아의 모습이 보인다.
“이게 무슨 소리죠?”
-오—- 오오—— 오오오——-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귀를 기울이자 한결 정확하게 들려오는 진동음.
지옥 불에 고통받으며 걸쭉하게 녹아버린 가련한 영혼을 커다란 국자로 퍼낸다면 이런 소리가 날까?
듣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치고 구역질이 나는 비명의 합창이었다.
그 합창이 일종의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저 멀리 굽은 터널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철컥! 철컥! 철컥!
쇠 부츠가 마른 바닥을 차는 소리.
병장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벌써 마중 나와주는군. 한 번에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지.”
“준비하겠습니다.”
엘로아는 발소리의 반향만으로 적의 숫자를 헤아렸다.
총 32기의 백기사.
수적 우위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런 터널이 아니라 갈림길이나 공동처럼 조금이라도 넓은 장소에 도달했을 때 일시에 덮치는 것이 현명하다.
아마 엘로아의 전투력을 가늠해보려는 잽이라고 봐도 되겠지.
“우선은 잠시 물러서 있게나. 전력을 가늠해 봐야겠네.”
엘로아가 팔을 뻗자 공간을 찢고 부름에 응한 계약검이 찬연한 자태를 드러냈다.
검면에 남아있는 6개의 문자가 빛나며 엘로아의 눈꼬리에 자홍빛의 마력 반사광이 맺힌다.
“계약한다.”
엘로아는 각기 두 개씩 총 6개의 계약을 통해 각력, 배근력, 완력을 강화했다.
이는 엘로아가 신체 강화에 할애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이 이상 강화를 강행해 봐야 영체가 버텨줄 수 없다.
아직 적은 1000기가 넘게 남아있다.
이 토벌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효율적으로 백기사를 처리하고 적기사, 그리고 소치틀과 마주하느냐이다.
이어 모습을 드러낸 백기사.
-철컥철컥철컥철컥
하얀 창을 한 손에 쥔 그것들은 엘로아를 발견하자마자 점차 빠르게 땅을 박찼다.
잘 훈련된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하얀 갑옷을 어스름한 조명에 빛내며 일제히 뛰어든다.
“잘 봐 두게나.”
엘로아는 비스듬히 선 채 검끝이 오른편 땅에 맞닿을 때까지 허리를 돌렸다.
이미 검격의 준비 자세라기보다는 야구 배트를 풀스윙하려는 자세에 가까워 보였다.
“…후읍…!”
엘로아는 숨을 들이쉬었다.
가장 선두에 선 백기사의 창끝은 어느덧 거리를 좁혀 엘로아의 한 치 앞에 아른거린다.
그럼에도 엘로아는 눈을 감고 있을 뿐 작은 동작조차 취하지 않았다.
명상하는 것처럼 고요하게 들이 쉬었던 호흡을 멈출 뿐.
마침내 백기사의 창끝이 엘로아의 미간에 꽂혀 들려는 때.
보다 못한 시우가 리본을 뻗으려 들었을 때.
엘로아가 눈을 떴다.
그녀의 디딤발이 떠밀듯이 시멘트 바닥을 파고들고…
——————!!!!
좁은 터널 안에서 수백 톤의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것 같은 굉음이 작렬한다.
검이 휘둘러져서 만들어진 것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이질감이 드는 에너지의 폭류.
아까와 달라진 엘로아의 자세를 바탕으로 ‘검을 휘둘렀구나’라고 추측할 뿐, 정작 시우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섬광탄 수준의 빛의 분류가 피어났다 사라지는 장면뿐이었다.
그리고…
-쿠구구구궁!
어떤 것은 공중에서, 어떤 것은 터널 천장을 따라 달리며, 어떤 것은 투창까지 하며 엘로아에게 달려들었던 백기사 서른 두기.
선제를 취한 것은 백기사였으나 한참이나 뒤늦게 휘둘러진 엘로아의 공격이 훨씬 신속했다.
검이 휘둘러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파괴의 분류가 뒤늦게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엘로아를 중심으로 종형의 파형이 퍼지며 모든 백기사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무형의 프레스기에 눌린 것처럼 갑옷 전체가 박살 나 쇳조각이 물고기 비늘처럼 흩날리는 와중에,
검격의 궤적에 겹친 백기사 스무 기 가량은 깔끔하게 분리됐다.
그 파괴의 잔해들이 와르르 앞으로 나뒹굴며 빈 깡통 차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면서도 붕괴를 염려한 것인지 터널의 외벽에는 어떠한 손상도 없다.
옆에 달라붙어 있던 부직포가 너덜너덜하게 떨어졌을 뿐.
이는 그녀가 그저 무차별적으로 힘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힘의 첨단까지 확실한 고삐를 쥐고 휘둘렀음을 의미했다.
“…후우….”
엘로아는 검을 내리며 잔심을 통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뒤에선 시우는 입을 반쯤 벌린 채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23위계의 마녀인 엘로아가 강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본심을 다해 싸우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시우는 까마득한 격의 차이를 느꼈다.
그 어떤 난관조차 단신으로 돌파할 것 같은 압도적인 무력.
“이것이 전력을 다하여 벤다는 것일세.”
엘로아는 시우를 바라보았다.
반드시 지켜내고 싶은 소중한 제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시우는 심각한 상황도 잊고 박수를 짝짝 칠 뻔했다.
“대단하십니다…”
“하지 말게나. 방심할 때가 아닐세.”
“네, 알겠습니다.”
엘로아는 다급하게 시우를 만류했다.
이 소리를 듣고 적이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던가, 아니면 공방에 설치된 트리거를 작동시켜 함정이 발동하게 된다든가 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시우의 칭찬을 들으면 멋대로 입꼬리가 올라가 버리는 바.
이 긴장감과 임전 태세에 들어간 분위기를 헛되이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서 가세, 아직 갈 길이 멀다네.”
휙 등을 돌려 앞서나가기 시작한 엘로아를 바라보며 시우는 과연 자신이 나설 타이밍이 있긴 할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