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62화 (262/917)

#262

1.

마녀란 본디 누군가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

정해진 체계 내에서 묵묵히 자신의 과업을 완수할 뿐.

따라서 게헨나의 공작이니 위치포인트의 지부장이니 하는 거창한 칭호가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아 아가사가 일일이 돌아다니며 만일의 사태 시 조력을 약조 받은 7명의 마녀.

그들은 지부장실에 소파 하나씩을 꿰차고 제각기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세계 미인 대회나 여주인공 배역 오디션을 하고 있다고 볼지도 모르겠다.

제각기 다른 머리색, 눈동자 색, 피부색을 지닌 이들은 하나같이 빼어난 미인이었으니 말이다.

“하아암~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래?”

키가 170은 되어 보이는 ‘농경의 마녀’는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하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잘 태닝한 것처럼 건강한 살결, 노출도가 높은 야한 드레스는 품위 없이 흐트러졌고, 그 덕에 도드라진 탄탄한 허벅지를 여유롭게 꼬았다.

다들 별말 하지 않지만 대충 비슷한 분위기였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굳이 이런 걸 해야 하나?’, ‘귀찮아 죽겠네’ 같은 느낌이란 의미다.

지부장이 왜 그들을 호출했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느새 마녀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껴있는 시우에게 더 흥미를 지닌 듯한 눈치였다.

“안녕?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벗겨질락 말락 한 하이힐을 발끝에서 까딱거리던 농경의 마녀, ‘에블린 이모텝’은 싱긋 윙크하며 시우에게 추파를 던졌다.

“안녕하세요.”

시우도 어쩔 수 없이 대충 답례했다.

원래도 그렇지만 오늘은 더욱 이런 추파가 반갑지 않다.

델라가 깨어나자마자 전해준 사실은 시우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자면 한 과격 무장 종교집단에 의해 서울 한복판에 대규모의 바이러스 테러가 예고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느낌이랄까?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서울에 사는 천만 명의 사람들이 모두 위기에 노출되어있다.

일전에 전시회장의 백화점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학살사건처럼 말이다.

어두컴컴한 점내를 흠뿍 적시던 선혈과 창자조각이 아직도 눈에 선한 시우로선 그것만으로 속이 부글부글 끊는 느낌이었다.

“이 자리에 모여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옵니다.”

브리핑을 위해 자료를 준비해온 수아는 커다란 칠판을 염력으로 동동 띄운 채 지부장실로 들어섰다.

“그러네요, 지면이나 메일로 연락주시는 걸로 충분했을 텐데.”

다소 퉁명스러운 답변이 들려온 쪽은 ‘유리의 마녀’, 파트리샤 카자드.

투명할 정도의 피부에 창백할 정도의 안색을 지닌,

신화 속 설녀가 실존한다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마녀였다.

“사안이 일각을 다투는지라 일방적인 통보로 모시게 된 점에 대해서는 고개 숙여 사과드리옵니다.”

“이봐, 그렇게 말할 것까지 있겠어? 어차피 골방에 틀어박혀서 마법이나 끄적이고 있었을 거면서.”

“마녀의 의무는 등 돌린 채 쾌락만 영위하는 마녀에겐 시간 낭비라는 개념이 없나 보죠?”

페트리샤와 에블린은 가까운 사이인 듯 서로 한 두 마디씩 주고받았다.

사실 그 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초등학교 학급회의도 이 정도보다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일텐데 싶다.

“지금 서울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위기에 봉착했사옵니다. 그 어떤 재난보다 커다랗고, 그 어떤 위헙보다 치밀하게 짜인 함정에 빠졌죠.”

수아는 델라에게 전해 들은 모든 사실을 전했다.

비겁의 마녀의 계획이 대규모 학살이라는 것.

이미 그것을 위한 밑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

추가로 백기사의 존재와 강함에 대해서도 하나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이번 사태에 끼어드는 것이 몹시 위험하다는 사실까지 전부 말이다.

어차피 여기 모인 마녀들은 정의를 위해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합당한 보수를 약속받고 고용된 용병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수아가 거짓을 고한다면 생각한 것 이상의 위기가 닥쳤을 때 주저 없이 몸을 뺄 것이다.

인원에 맞춰 짜둔 계획이 일그러질 바에는 처음부터 사실을 전하고 진솔한 협력을 요구하는 것이 낫다.

“…….”

“…….”

수아가 차분하게 상황을 전달하는 동안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정돈되었다.

대신 마녀들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수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무심했고, 누군가는 경악했으며, 누군가는 시큰둥했다.

“좋아, 잘 들었어요. 일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하죠.”

현세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고풍스러운 마녀복을 입고 있던 마녀 하나가 주저 없이 자리를 떠났다.

게헨나에서 어렵게 초빙했던 에메랄드 타블렛 소속의 마녀였는데.

백기사의 특성과 상성이 좋지 않다고 여긴 것인지 포기가 빨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전해 들었던 것과는 이야기가 너무 다르네요. 가보도록 할게요. 그럼 이만…”

눈치를 보며 주저하던 위치포인트 소속의 마녀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시우, 수아, 엘로아, 델라를 제외하면 남은 인원은 다섯.

“계획에 관해 듣고 싶어. 설마 아무런 방비도 없었으면서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겠지?”

에블린이 다리를 반대로 꼬며 묻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엘로아가 나섰다.

“비겁의 마녀가 만든 ‘제단’이 완성되기 전. 그녀가 공방을 차린 폐쇄 터널에 진입할걸세.”

이대로 앉아있다가는 모든 상황의 주도권이 소치틀에게로 넘어간다.

델라의 말대로 엘로아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손바닥으로 빗물을 막을 수는 없다.

소치틀이 쌓아올린 제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델라 역시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소치틀이 백기사를 일제히 날뛰게 내버려 둔다면 인명피해가 발생할 것이며 엘로아도 수아도 그것을 원치 않는다.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요. 벌집이 들쑤셔지면 비겁의 마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어 보여요.

계획에 차질이 생겼음을 깨닫고 발악하겠죠.”

“그 점에 대해서는 수아 선생이 대책을 마련해 두었네. 서울 전체에 결계를 펼칠게야. 일반적인 이면결계 와는 달리 자유롭게 안팎을 오갈 수 없지.”

수아는 지난 기간 동안 위치포인트에 주박의 술식이 새겨진 기둥을 박아놓았다.

비겁의 마녀의 목적은 대량학살.

막상 백기사를 출동시켜도 죽일 인간이 없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결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겠지.

수아가 설치한 결계는 규모가 굉장히 커다랗다는 것을 제외하면 굉장히 정석적인 봉인술이니 말이다.

“소녀는 결계를 유지하고 수호하는 것에 힘쓰겠사옵니다.”

그것을 막고 이면결계를 유지해 민간인이 휘말리는 것을 막는 것이 수아의 역할이다.

“그럼 저희는 뭘 하면 되죠?”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 모든 적을 일시에 상대할 수는 없네. 각기 다른 수직 환기구로 진입하여 전력의 분산을 꾀해주게나.”

“결국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네요.”

엘로아의 말을 가만히 듣던 파트리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첫눈보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럴듯하게 말을 하긴 하지만 사실상 아무런 안전장치도, 특별한 계책도 없다.

그것을 깨달은 마녀 셋은 눈빛을 주고받더니 자리를 떴다.

남아 있는 마녀는 대담한 자세로 앉아있는 라틴계 마녀 에블린.

그리고 얼음장같이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슬라브계 마녀 파트리샤뿐이다.

각기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자들이며 물리력을 행사하는 마법에 한 가락씩 재주가 있는 마녀였다.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 남았지만 별수 없다.

여기서 더 지체해 ‘제단’이 완성되어 버린다면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니 말이다.

지금이야말로 소치틀이 완전히 태세를 가다듬기 전 허를 찌를 수 있는 유일한 빈틈이었다.

“남아 주어 고맙네.”

엘로아는 남은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돈을 준다는데 일하는 시늉 정도는 해야지.”

“위험해지겠다 싶으면 바로 몸을 뺄 거에요. 너무 큰 기대는 말아주세요.”

두 마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그런 둘 사이에 시우가 조용히 말을 얹는다.

“저도 전투를 돕겠습니다.”

“절대로 안 될 말이네!”

예상대로 엘로아에게서 경기에 가까운 반응이 나왔다.

그리고 예상을 뛰어넘어 바들바들 떨리는 손길로 시우의 멱살을 움켜쥔다.

“따라오게!”

전에 없던 억센 힘으로 시우를 잡아끈 엘로아는 복도에 나와서야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작은 체구가 비에 젖은 새처럼 떨리고 있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가?”

“네, 알고 있습니다.”

“이미 불길한 점괘를 받지 않았던가. 가만히 숨죽이고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그 난리통에 끼어들겠다고? 고작 그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고 벌써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게냐?”

엘로아는 두려웠다.

이대로 시우를 잃게 되는 것이, 또 한 번의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다소 강한 말투와 어조로 시우의 의지를 꺾으려 했다.

“아주 조그마한 조력이라도 필요한 상황입니다.”

엘로아의 말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고분고분 따르던 시우가 오늘만큼은 달랐다.

곧은 눈빛으로 엘로아를 바라보며 제 생각을 전한다.

“지금의 저라면 꽤 많은 백기사를 상대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안전장치로 페리윙클 님이 주신 클로버도 있고, 스승님이 주신 ‘계약’도 있죠. 무리하지 않을게요. 제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라면 뭐라도 하고 싶습니다.”

“허락할 수 없네. 절대로 허락할 수 없네.”

“스승님.”

“듣지 않을 것이야. 그대의 생각 따윈 재고할 가치도 없네.”

귀를 틀어막고 아예 대화조차 시작하지 않으려는 엘로아.

그녀의 어깨에 부드럽게 얹히는 시우의 손.

엘로아도 바보는 아니다.

그가 이미 마음을 굳혔고 그것이 한두 마디의 설득으로 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직감하고 있다.

시우가 강해지고 싶다고 했던 이유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사람들을 지키고 싶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제겐 언제든지 몸을 뺄 수 있는 좌표이동식도, 기척을 감춰주는 오르골도 있잖아요? 아주 잠깐만 시간을 벌 수 있으면 도망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그를 막고 싶다.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싶다고 말하던 라피의 최후가 어땠는지 엘로아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또 하나의 벽을 넘어선 시우라면 틀림없이 백기사를 상대하는 조커로써 활용될 수 있으리란 것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를 말리게 되는 이유다.

엘로아는 간절한 목소리로 시우의 소매를 붙잡으며 물었다.

“왜 굳이 나서려 하는가? 그대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거늘… 아무도 그대를 비난하지 않을 걸세. 그대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마녀들조차 떠나가지 않았는가?”

사실 그녀의 말도 틀린 것은 없었다.

아무리 조력이 필요하다 한들 어느 정도로 전력에 보탬이 될지는 미지수다.

어쩌면 끽해야 몇 마리의 백기사를 죽인 뒤 도망쳐야 하는 신세일지도 모른다.

“저도 알고 있어요. 피하고자 마음먹는다면 피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걸요.”

어쩔 수 없이 전장에 내몰리고, 목숨을 걸어야 하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시우의 다짐은 엘로아의 말대로 분수를 모르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피하면 되지 않는가? 왜 굳이 위험을 자처하는겐가?”

“스승님.”

시우는 진중한 눈빛으로 엘로아의 자홍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시우는 자신을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수투성이에, 서툴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바보 같은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기도 했지.

신시우는 겁쟁이이다.

위기가 닥치면 눈을 감은 채 등을 돌리고 싶고,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고 못 들은 척하고 싶고, 죽음이 다가오면 의연하지 못하고 다리를 달달 떠는 그런 겁쟁이.

그러나 한 가지 흔들리지 않는 뚜렷한 신념은 언제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그 신념은 그의 삶이 가르쳐준 것이다.

“제가 도망칠 수 있는 상황마다 도망치기만 했더라면. 저는 아마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의식주만 아슬아슬하게 보장되는 노예의 삶에 안주했더라면 지금 같이 마법을 부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호문쿨루스와 공적을 보고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더라면 쌍둥이와 함께 나란히 먹잇감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언제나 두려움은 있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싶은 그 상황에서 앞으로 한 발짝을 뻗는 용기가 지금의 신시우를 만들어주었다.

정작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때는 어찌 되었던가?

익사한 마녀의 흉수에 샤론을 잃을 뻔했다.

그의 인생 속에서 적어도 도망친 곳이 낙원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죄송해요,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제게 힘이 있다면, 닿는 데까지라도 돕고 싶어요.”

엘로아는 더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의 말에서 너무나도 짙은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에게 ‘그것은 자네의 의무가 아니야’라고 말하며 포기를 종용하는 순간 라피의 애원을 무시했을 때로 돌아가 버릴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리석고 미숙했던 과거의 자신으로.

엘로아는 눈을 감았다.

길고 예쁜 속눈썹이 감정의 격양으로 파르르 떨린다.

“알겠네. 대신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게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

“그리고…!”

엘로아는 고개를 숙이려는 시우의 손을 꽉 쥔 채 말했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지체 없이 도망가게.”

“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강대한 적을 베어왔다기엔 너무나도 작은 손을 맞잡은 시우는 엘로아를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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