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1.
두 사람이 4시간가량을 자고 새벽에 일어났을 때.
갑작스러운 핸드폰의 울림에 곧장 지부장실로 내려갔다.
델라가 깨어났기 때문이다.
지부장실에 도착하자 델라는 하얀 천을 대충 걸친 채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반쯤 꿈을 꾸고 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녀의 온몸에는 붕대가 돌돌 감겨있다.
그것만으로 거의 피부가 노출되지 않을 정도로 상처를 입은 부분이 많았다.
“……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일어나자마자 감사를 표하는 델라.
그녀의 표정은 아직도 갑자기 뒤바뀐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빛 한줄기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창에 꿰뚫린 채 감금 생활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아 지부장이 사용했던 침을 소독 및 정리하는 사이.
엘로아가 델라의 앞에 나선다.
제대로 된 준비도 하지 못하고 급하게 내려온 엘로아는 그다지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다.
복장은 여느 때처럼 활동성이 좋은 레깅스와 스포츠 브라, 그 위에 바람막이를 걸쳤을 뿐.
심지어 엉덩이 근처까지 내려오는 분홍머리는 방금 자다 일어난 것처럼 헝클어져 있다.
그러나 티페레트는 티페레트였다.
지난밤 시우에게 보였던 말랑말랑하고 푹신푹신한 모습은 간데없다.
잘 벼려진 칼날처럼 엄숙한 분위기와 곧게 솟은 눈썹.
은은한 예기가 느껴지는 분위기에는 무신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본론부터 말하지 델라 레드클리프 남작. 그대에겐 비겁의 마녀에게 협력했다는 의혹이 있네.”
“협력이요? 공범에게 이렇게 대하는 예도 있던가요?”
델라는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붕대를 가리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포로수용소에서 막 구출된 사람처럼 모든 것이 몹시도 지쳐 보이는 웃음이었다.
“위장을 위해 그대를 이곳에 보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 실제로 12개의 창상 중 핵심 장기를 관통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네.”
엘로아의 지적은 합당했다.
실제로 파올라는 델라를 무력화시킬 생각으로 벽에 꽂아 두었을 뿐 목숨을 앗아가는 건 원치 않아 했으니 말이다.
“아는 것은 전부 말씀드릴게요. 하나라도 거짓이 있다면 그때 절 심판하셔도 좋아요.”
“그렇게 할 것 없지. 더 확실한 방법이 있으니.”
“귀주.”
엘로아가 계약검을 꺼내 한 치의 거짓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순간.
그녀의 의중을 짐작한 수아 선생이 끼어들었다.
아마 델라와 계약을 맺어 그녀의 거짓 없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할 터.
지금이 여유로운 상황이었다면 틀림없는 상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기가 너무 좋지 않다.
“귀주께서는 전력을 보존하시지요. 이미 신시우 공을 위해 계약 하나를 할애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엘로아는 지금 위치포인트 측이 보유한 가장 강대한 전력이다.
계약을 회수하고 언령의 힘을 되찾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엘로아다.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약을 소모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 수아의 판단이었다.
“남작께 말을 여쭙고 미심쩍은 것이 생긴다면 그때 가도 늦지 않사옵니다.”
“…알겠네.”
수아와 엘로아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델라는 느릿하게 눈동자를 움직여 시우를 바라보았다.
루비 같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델라의 인생에서 시우는 꽤나 인상 깊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역시 예사 인간은 아니었네요.”
남자 주제에 마녀이다.
제머나이 백작을 후견인으로 두고 있다.
비록 여러 상황이 받쳐주지 못했지만 델라를 이긴 전적이 있다.
게다가 수아 지부장과 티페레트 공작이 대화를 나누는 중요한 자리에 끼어있다.
일반적인 남자는 절대로 아닐 것이다.
아마도 여러 마녀들이 협력한 대형 프로젝트 실험의 일환이 아닌지.
델라의 생각이 그 쪽으로 굳어졌다.
“오랜만에 뵙네요. 갑자기 차로 치어서 죄송했습니다.”
“됐어요, 술이 있다면 술이나 좀 줄래요? 기왕이면 와인으로.”
시우는 델라가 말을 걸려는 듯하자 선수를 쳐 교통사고 건에 대해 사과했고 델라는 일없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그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추적해온 백기사에게 덜미를 잡혀 버렸겠지.
오히려 차에 치인 것이 전화위복인 셈이다.
델라는 시우가 가져온 와인을 병째로 들이키며 마른 목을 축였다.
거의 반병 가량이 단숨에 뱃속으로 사라졌다.
“하아… 이게 어찌나 마시고 싶던지.”
델라는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짓고 다시 엘로아를 마주 보았다.
“아는 것은 모두 말씀드릴게요.”
2.
델라가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 이유.
그것은 머지않아 벌어질 끔찍한 재앙을 위치포인트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이 일에 관여했더라면 델라도 이 정도로 열성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는다.
수명을 다해, 기아로, 사고로, 질병으로, 재난에 휩쓸려, 전쟁으로.
이 넓은 세상에선 하루에도 수 만의 인간이 벌레보다 덧없이 죽어간다.
이제 와서 수십만, 수백만 명이 휘말릴 재앙이 일어난다 한들 어찌 보면 그것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반복되어온 순환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존재 자체부터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 마도를 추구하는 마녀가 구태여 그것을 막을 의무는 없다.
델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일을 꾸미는 자가 자신의 친구 파올라라는 사실은 델라에게 있어 일말의 책임 의식을 느끼게 했다.
이미 씻을 수 없는 죄를 짊어진 파올라지만 다른 마녀들 입에서 ‘비겁의 마녀’라는 멸칭 이상으로 비난받는 것은 원치 않는다.
따라서 델라는 차분히 자신이 아는 것을 전달했다.
비겁의 마녀는 적기사를 굴복시켰다.
지난번 다곤의 피리를 통해 수집한 심장을 통해 백기사 대군을 일궈냈다.
네 명의 마녀 역시 계획을 위해 제물로 바쳐졌으며, 정체불명의 ‘제단’이 완성되자마자 빠른 시일 내에 폐쇄된 빗물 수로에서 백기사들이 튀어나오게 될 것이다.
더욱더 많은 인간을 죽여, 더욱더 많은 마력을 모으기 위해.
“……”
“……”
어딘가 현실과 동떨어진 듯 말하는 나긋나긋한 델라의 첩보를 입수한 직후.
지부장실은 싸늘한 정적에 휘감겼다.
긴 세월을 살아오며 굵직한 역사 속 일들을 몇 번이고 겪어본 수아 지부장도 충격에 입을 벌렸다.
산전수전 온갖 전투경험으로 뼈대가 굵은 엘로아조차도 경악에 찬 눈빛으로 델라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반응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여유는 없을 텐데요.”
자신이 말하면서도 ‘이미 늦었다’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델라의 말투에는 그다지 열의가 없었다.
그녀들이 파올라를 막아줄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는 왜 진작에 파올라를 구해내지 못했을까 라는 자책이 가슴에 맴돈다.
충격에 빠졌던 엘로아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아직 그대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확증이 없네.”
“어떤 부분이요? 파올라가 곧 심해의 마수를 풀었듯 백기사를 풀어 대학살을 일으키리라는 것? 이미 네자릿수에 가까운 인간이 그를 위한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
“그대는 비겁의 마녀의 친우이지 않은가? 왜곡된 정보를 전달해 전의를 꺾으려는 기만책일 수도 있지.”
“뻔한 답변이지만 마녀 명을 걸었어요. 조금이라도 잘못된 정보가 있다면 훗날 책임을 지겠습니다.”
이미 댐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금이 갈 대로 가고, 뒤늦게 보수작업을 하기도 늦어 한 줌의 빗물만 내려도 와르르 무너져내리며 주변의 낮은 토지를 수장시킬 것이다.
지금 바로 그런 상태였다.
“남작님이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비겁의 마녀는 이미 적기사를 굴복시켰고, 적기사의 복제품인 백기사로 군대를 이루었다는 것이옵니까?”
“그래요.”
“허면 그 숫자는 어느 정도이옵니까?”
깨어난 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일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빼놓고 있었다.
델라는 느릿하게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천이백이요.”
“천이백…”
“숫자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들이 쥐고 있는 창은 붉은가지를 모태로 한 레플리카.
모여있으면 모여있을수록, 붉은 가지에 가까이 있으면 가까이 있을수록 공명하며 역장 형태의 방어막을 생성해요.
저기 계신 공작님처럼 물리적인 공격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거의 대응할 수 없죠. 저도 고작 서른 두기 중 스무 기를 때려잡는 것이 고작이었어요.”
델라는 20 위계의 대마녀이다.
화염과 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중계식을 통해 쉼 없는 마법 구사가 가능하다.
그런 델라조차 고작 20기의 백기사에 저지당했다.
아무리 상성이 좋지 않다고 해서 그런 일이 가능한 걸까?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줬어요. 소치틀은 이 계획을 하루 이틀 동안 준비한 게 아니에요. 수십 년에 걸쳐 하나하나 쌓아 올린 것이죠. 저희는 하루아침에 그것을 막아내려는 거고요.”
호문쿨루스를 강화하고 통솔하는 것이 고작이던 파올라는 긴 시간을 들여 그것을 복제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필요한 아티펙트와 예장을 모아 자신이 원하는 그림의 퍼즐을 모았다.
현세의 마녀들이 케테르 공작 하나를 믿고 공적 대응에 소홀히 하는 동안 파올라는 광기에 가까운 집념으로 오랜 시간 준비해왔다.
“그녀를 막기에는 이미 늦었어요. 아주 조금의 유예만 남아있을 뿐이죠.”
“아직 늦지 않았네.”
침울해진 공기를 가르는 것은 엘로아의 당찬 목소리였다.
“내가 처리하지.”
“폐쇄된 빗물 터널은 12km에 걸쳐 있어요. 외부와 통하는 수직 환기구만 6 개가 넘죠. 공작께서 아무리 대단하시다 한들 한 손으로 비를 막을 순 없어요.”
분명 비겁의 마녀는 완벽한 준비를 끝내두었다.
그에 비해 수아 및 티페레트의 대처가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앞서 말한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백기사들이 날뛰기 전, 아직 그들이 현세로 뛰쳐나와 민간인을 학살하기 전이라면 대응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수작을 벌이기 전에 내가 직접 가지. 계획이 시작되기 전에 비겁의 마녀를 죽이고 이 모든 사태를 끝내겠네.”
엘로아가 말한 것처럼 빗물 터널로 내려가 원흉인 비겁의 마녀를 죽인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만전을 기해 준비해둔 적의 소굴에 발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적의 전력이 집중된 곳을 치러가는 것이니 말이다.
아무리 티페레트 공작이 공적과 호문쿨루스에 능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들.
1200기의 백기사와 비겁의 마녀, 그리고 적기사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까?
“소녀도 수수방관하던 것은 아니옵니다.
일전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서울 전역에 결계를 씌울 준비를 끝내두었사옵니다. 설령 비겁의 마녀가 1200기의 호문쿨루스를 일제히 출격시킨다고 하더라도 한동안은 결계에 가둬둘 수 있사옵니다.”
수아 역시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사태를 묵과하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서울을 떠나는 마녀들을 붙잡지 못하고 특별히 대단한 지원을 끌어오지 못했지만 최악의 사태에 치닫기 전까지 방지턱 역할을 해주는 장치를 안 비해두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모든 마녀를 소집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일각을 다투는 일이었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아티펙트로 소집령을 전하자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7명의 마녀가 위치포인트로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