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1.
시우는 흥분하지 않았다.
승리의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거나 방방 날뛰지도 않았다.
그저 손끝에 남아있는 감각을 느낀다.
심장이 여전히 두근두근 뛰고 있다.
은은한 전율 속에서 금속을 종잇장처럼 가르던 손맛이 남아있다.
오직 그 두 가지와 함께 밤거리 위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검이 사라진 것 같은 감각.
아니, 하나가 된 것 같은 감각이라는 표현이 더 걸맞을까?
머리로 알고 있던 것이, 본능으로만 느끼고 있던 것이, 고정관념을 깨고 그대로 현현한 듯한 몸의 기억에 전투가 끝난 이 순간조차도 전율이 일어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
그것은 시우의 자신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만병지왕의 계약에 잠들어 있던 ‘누군가의 재능’, 단지 그것을 끌어냈을 뿐이다.
“시우!”
여운에 잠긴 채 깔끔하게 적을 격퇴했던 이격을 회상하는 동안 엘로아가 달려왔다.
그러더니 시우의 앞에 멈춰선 채 마치 자신의 일인양 기뻐하기 시작했다.
“장하네, 아주 장하네. 지금껏 배워왔던 걸 아주 잘 수행했어.”
지금의 엘로아에게는 델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왜 그런 델라를 백기사가 추적해왔는지 따위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직 시우의 성취와 성장에 기뻐할 뿐이다.
“그대도 하면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네요.”
뒤늦게 실감이 밀려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를 상대하기도 버겁던 강적을 무려 다섯이나 깔끔하게 베어냈다는 성취감이었다.
다섯이 아니었더라도, 설령 그 이상의 숫자였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더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오게.”
엘로아는 손을 위로 쭉 뻗었다.
이게 뭔가 싶어 바라보고 있자 시우보다도 흥분한 기색인 엘로아가 답답하다는 듯 채근한다.
“무릎을 조금만 낮춰보게나.”
“이렇게요?”
“옳지.”
엘로아의 손이 투구가 벗겨진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름의 포상인 건가?
얼떨떨한 기분과 멋쩍음이 동시에 드는 시우였지만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를 보니 말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땀 많이 났을 텐데요…”
“괜찮네, 뭐 더러운 것이라고. 이리 오게, 좀 더 듬뿍 칭찬해줘야겠으니.”
하지만 그것도 1분 이상이나 계속되자 만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 그것도 중요하지만 저기 레드클리프부터 이송하시는 게….”
시우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델라를 손으로 가리켰다.
엘로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헛! 하고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까, 깜빡했군.”
마녀인 이상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중상은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었더라면 삼도천에서 족욕 중이라고 해도 좋을 중상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정신을 차린 엘로아를 대신해 델라를 들춰 맨 시우.
두 사람은 곧장 위치포인트로 향했다.
2.
애매하기 짝이 없는 시간인 만큼 위치포인트는 한산했다.
미리 연락을 받아둔 수아 지부장이 치료 준비를 끝내두었기 때문에 델라는 곧장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전신에 부상이 심해 옷을 전부 벗겨야 한다는 이유로 시우가 잠시 바깥에서 대기하는 사이.
수아와 엘로아는 단둘이 지부장실 내부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후우, 심한 몰골이옵니다. 이 정도의 부상을 보는 것은 간만이로군요.”
침상 위로 누운 델라의 몸에는 곳곳에 빼곡한 금침과 은침이 박혀 들어가 있었다.
그 아래로는 십자 형태를 그리는 마법진이 은은한 빛을 내며 점멸하고 있다.
“상태는 어떠한가?”
“겉보기에는 심각한 부상이옵니다만, 보이는 것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사옵니다. 괴사하거나 부전이 일어난 장기도 없는 것을 보아하면 비겁의 마녀가 적절한 조처를 해두었던 것이겠지요.”
끔찍한 관통상과 상처를 지져 지혈한 듯한 화상 자국이 더없이 용태를 나빠 보이게 하지만 치유에 있어 더욱 중요한 건 영체 내부의 상태이다.
그런 의미에서 델라는 일전 샤론보다도 상황이 좋았다.
전문기술을 지닌 고문 기술자가 생명에 최대한 영향이 가지 않게 고문한 듯한 모습이랄까?
사지 중 일부가 절단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마력 오염 등으로 인해 장기에 손상이 심하지 않은 편인 것이 다행이었다.
아마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은 일주일.
정신을 차리는 것은 오늘 안으로도 가능해 보였다.
“레드클리프가 소치틀에게 구류되었던 것이라면 그녀가 획책하는 음모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네. 반대로 비겁의 마녀에게 은밀히 협력하는 것일 수도 있고.”
“예, 소녀도 가능한 빠르게 심문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해 보이겠사옵니다.”
수아는 금침을 꺼내던 소매를 여미고는 엘로아에게 물었다.
“귀주, 잿불의 마녀와 마주했을 때의 정황을 알려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어려울 것 없지.”
엘로아는 시우와 수련을 끝내고 드라이브를 하던 중 갑자기 델라와 맞닥뜨린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맞닥뜨렸다기 보다는 차로 뻥 쳐버렸다는 표현이 걸맞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후에 나타난 다섯 기의 백기사.
그리고 그것을 멋지게 격퇴한 시우의 모습까지.
“참으로 훌륭한 일격이었어. 대단하지 않은가? 아무리 계약의 일부를 물려받았다지만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한 지 채 반년이 되지 않은 아이일세. 그런 단기간 안에 이 정도의 성취를 보이다니.”
“그렇사옵니까?”
“흡사 라피의 모습을 보는 듯하였네. 실로 대견했어. 수아 선생도 그 모습을 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참으로 다행인 일이옵니다.”
시우의 무용담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엘로아의 모습에 수아는 살포시 미소지었다.
머지않아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침울해하며 삶의 목적을 찾아 방황하던 티페레트가 어린아이처럼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어서, 수아 지부장도 잠시 시름을 잊고 웃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시우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던 엘로아는 정신을 차렸는지 어색하게 손등으로 뺨을 비볐다.
“못난 꼴을 보였군. 미안하네.”
“별말씀을요. 귀주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소녀 또한 뛸 듯 기쁘옵니다. 다만 아직 치료가 전부 끝나지 않은바, 잠시만 자리를 비워주실 수 있으실까요?”
“알겠네, 깨어나면 곧장 말해주게나. 나는 위에서 대기하고 있겠네.”
“4시간 정도 소요되리라 예상되옵니다. 부디 편히 쉬시길.”
치료가 끝나지 않았다는데 더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엘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우가 기다리던 복도로 나왔다.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복도 한가운데서 느릿하게 검식을 취해 보이는 시우가 보였다.
손에 들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마도 아까의 검격을 복기하는 듯했다.
엘로아가 보기에도 제법 동작에 체계가 잡혔다.
“아, 스승님.”
집중하는 듯하여 끼어들지 않을 심산이었지만 시우가 먼저 엘로아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중한 부상은 아니라더군.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델라는 샤론을 괴롭히던 못된 마녀였고 시우와 투덕거린 적도 있다.
그다지 좋은 인연이 있는 마녀는 아니다.
그러나 안 그래도 부상당한 채 도망치던 사람에게 막타를 꽂아버린 입장이었으니 조금의 죄책감은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상태가 양호하다는 전언은 희보였다.
괜히 잠자리가 뒤숭숭해질 일은 없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요?”
“알 도리가 없지. 레드클리프가 의식을 차린 이후에 속속들이 물어야 할 걸세.”
지금까지 비겁의 마녀가 무슨 일을 획책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스케일로 사고를 일으키려는 것인지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무엇 하나 찾아내지 못했다.
원체 몸을 숨기는 것에 능한 추방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치틀에게 구류되었던 듯한 델라는 모든 퍼즐을 맞춰줄 힌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강상태에 들어섰던 상황도 일변하겠지.
엘로아가 지금껏 쌓아온 전운을 감지하는 능력은 델라가 깨어나기 전까지의 이 밤이 마지막 평화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투에 들어가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물어볼 것도 없이 적절한 휴식이다.
엘로아는 시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네. 조금 쉬어둠세.”
“아, 위로 올라가는 건가요?”
“잠은 자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오랜만에 돌아온 펜트하우스.
다른 점이 있다면 항상 침대에 누워있던 샤론이 지금은 게헨나에 있다는 정도였다.
제머나이 백작가에서 보호하고 있다고 하니 안전에 대해서는 염려할 것이 없다.
시간도 적당히 지났으니 지금쯤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까?
문득 샤론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진 시우였다.
각기 다른 욕실에서 목욕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엘로아는 헐렁헐렁한 파자마.
시우도 착용감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 쪽에서 다시 모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테이블에 놓인 위스키와 술잔 두 개, 그리고 안주용으로 먹을 초콜릿.
엘로아와 느긋이 나누는 술자리는 하루 루틴의 마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와, 정말 피곤하네요.”
“그럴 법도 하지. 대련 이후에 곧장 실전에 투입된 게 아닌가?”
소파에 등을 기대자마자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오전 대련, 오후 대련에 이은 야밤의 실전이라니.
아무리 마력을 통해 신체를 강화한다 해도 부하가 걸리는 만큼 근육이 뻣뻣해지는 것 같은 근육통이 찾아왔다.
“오늘 아주 잘해주었네. 그대의 노력을 지켜봐 왔던 사람으로서 뿌듯할 따름이야.”
“전부 스승님 덕분입니다.”
“이게 어찌 나의 공이겠는가? 나는 그저 길을 찾아주었을 뿐이야. 포기하지 않고 정진한 것은 그대의 몫이지.”
-쨍
시우와 엘로아는 가볍게 술잔을 맞댔다.
노곤노곤한 눈꺼풀 사이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시우가 보이자 엘로아의 얼굴에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깃든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간질간질한 기분이 심장을 간질인다.
라피를 잃은 이후 줄곧 괴로웠다.
또한 외로웠다.
상실의 아픔 속에서 공허하게 조각난 삶을 기워내며 그저 숨을 쉬고 적을 베었을 따름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너지려는 티페레트의 무릎을 지탱해주던 것은 오로지 복수심.
그녀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 에아 사달멜리크에 대한 증오, 방만과 실수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라피를 잃게 내버려 둔 엘로아 자신에 대한 분노 뿐이었다.
그리고 시우를 만났다.
시우에게 미안해서라도 좋은 첫만남이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해한 엘로아가 다짜고짜 시우에게 주먹을 꽂아 넣어 기절시켜 버렸으니 다시 생각해봐도 면목이 없었다.
“스승님?”
“알고 있는가?”
“네?”
하나하나 서툴기 짝이 없는 그를 가르칠 때까지만 해도 공연한 짓이라는 마음뿐이었다.
가슴속에 새겨진 흉터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아마 그녀의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업보라고만 생각해왔다.
엘로아는 소파에서 일어나 시우에게 다가섰다.
“나는….”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의 자세로, 험난하기 짝이 없는 엘로아의 수련에도 입 뻥긋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와 준 그의 근면함으로
영원히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라피의 검무를 다시금 재현해준 시우는.
“…그대에게 구원받았다네.”
엘로아 티페레트에게 방황 속 한 줄기 등댓불과 같은 구원이었다.
진중한 목소리와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
시우는 엘로아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짝 붙어선 엘로아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슬쩍 팔을 벌리자 엘로아는 분홍빛 머리카락으르 사르르 흔들며 시우의 품에 안긴다.
무척이나 소중한 것을 껴안듯 등 뒤로, 허리 뒤로 손을 넣고 꼬옥 안았다.
“내가 그대를 안아주고 싶거늘, 그대가 너무 크구나.”
“뭐, 일단은 남자니까요.”
평소처럼 어딘가 맹한 시우의 답변에 엘로아는 그의 품에서 간지럽다는 듯 웃었다.
“그대에게 약속하고 싶은 것이 있네.”
“네, 스승님.”
엘로아는 잠깐 고개를 떼고 시우를 올려보며 말했다.
“세상 모두가 그대의 적이 된다 할지라도. 난 그대의 검이 되어 세상을 벨 것이야. 지금 이 자리에서 티페레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네.”
“…이거 뭔가 쑥스러운 걸요?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거창한 짓을 할 생각은 없지만서도요.”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리다니.
어지간한 능력이 없으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못할 일이다.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엘로아의 등을 토닥였다.
“알고 있네. 말이 그렇다는 걸세 말이.”
하지만 엘로아는 시우의 불경함을 탓할 생각도 없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한 번 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나저나 이 자세 슬슬 너무 가깝다.
아까부터 티가 나지 않게 입으로 숨을 쉬느라 고역이었다.
몹시 남사스러운 말이지만 부드럽게 아랫배에 맞닿는 스승님의 가슴도 느껴지고 말이다.
“침대로 모실까요?”
“뭘 모시는가. 제 발로…”
“에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엘로아의 답변을 들지 않고 가뿐하게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린 시우.
자홍빛 보석 같은 눈동자가 전부 보일 정도로 눈이 동그랗게 변한 엘로아.
“…부탁하겠네.”
엘로아는 갑자기 시선을 얌전히 내리깔고 얌전한 고양이처럼 시우의 품 안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장난스럽게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뭔가 애매한 분위기가 형성될 줄이야.
시우는 속으로 당황하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엘로아를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저도 눈 좀 붙여야겠네요.”
“시우, 잘 자게나.”
“스승님도 편히 쉬세요.”
조금 떨어져 있는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인사를 끝내고는 거의 곧장 단잠에 빠졌다.
두 사람이 4시간 가량을 자고 새벽에 일어났을 때.
갑작스러운 핸드폰 울림이 울렸다.
델라가 깨어났다는, 수아 지부장으로부터의 전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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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HN 님이 제공해주신 두 번째 팬아트!!
잠자는 척 하고 있는 스승님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연필로 그린 것 같은 그림체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 분은 정말 잘그리시는 것 같아요
마침 티페레트랑도 분위기가 잘 어울리구욧!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