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1.
시우는 주저 없이 가장 가까운 백기사를 향해 달려갔다.
몸을 단단한 갑옷으로 감싸고 있다 하여, 두꺼운 방패로 심장을 보호하고 있다 하여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적은 강하고 수가 많다.
아무리 엘로아가 지켜보고 있다 한들 잠깐의 방심만으로 매운맛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겁 없이 뛰어드는 것이 그저 만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우는 배워왔다.
지난 대련 중 엘로아가 항상 강조하던 병리(兵理).
선제, 동시 그리고 후속.
전투에 있어 언제나 선제권을 지녀야 한다.
흐름을 상대에게 내어주지 말고, 상대의 동작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상황을 통제해야 승기를 잡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선제.
전투 중 언제나 압도적인 선제를 쥘 수는 없다.
적은 허수아비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선제권을 쥐기 위한 반격을 개시할 것이다.
이때 물러선다면 결국엔 완전히 선제권을 빼앗기게 된다.
흐름이 상대 쪽으로 기울기 전에 공격을 통해 그것을 넘겨주지 않는 것.
이것이 동시.
상대방의 거센 공세로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받아냈을 때.
그저 받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흘려내며 후속 공격을 준비하는 것.
이것이 후속.
들으면 알겠지만 이 세 가지 병리에는 공통점이 있다.
전투는 반드시 선제권을 거머쥐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아주 잠시간의 위축이나 두려움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우는 5기에게 둘러싸여 난관에 봉착하기 전 가장 돌출된 적 한 기에게 달려들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단순 중량으로만 200kg이 넘어가는 갑옷의 질주는 도약만으로 땅을 으깬다.
-슈우우욱!
달려드는 시우를 맞이해 뻗어지는 창.
시우를 향해 뻗어오던 창이 아주 찰나의 순간 기묘하게 휘었다.
분명 중하단을 노리고 있던 것이 물 찬 제비처럼 솟구쳐 심장을 노린다.
-쾅!
그러나 시우는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받아냈다.
검을 앞으로 비스듬히 내세워 잔재주를 부릴 수 없게 창대를 억누른 뒤 왼손의 방패로 흘려낸 것이다.
자신이 행하고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물 흐르는 듯이 매끄러운 동작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시우는 두 가지 이유로 놀랐다.
하나는 그 속도가 기억 속의 것보다 훨씬 빠르고 흉흉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검을 통해 흘려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격을 흘렸다고 이대로 멍하니 있을 것이 아니다.
시우는 온몸의 힘을 이완시켰다.
불필요할 정도로 긴장되었던 근육에 힘을 빼고 땅을 단단히 딛는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팔이 아니라 다리와 허리.
팔은 그저 검을 쥐고 있을 뿐.
쥐고 있는 것조차 잊어도 좋다.
“후읍…!”
한 줌의 호흡과 함께 이완됐던 몸에 힘이 깃든다.
신체 첨단의 근육 하나하나에 잠든 모든 잠재력을 끌어낸다.
일 검에 전신의 진력을 담아낼 수 있다면 그 검날은 산맥조차 가른다.
백기사가 뒤늦게 공격을 회수하고 창을 돌려 시우의 머리를 쳐내려 했다.
일전에도 경험한 바 있다.
기껏 힘들게 거리를 좁혔을 때 시우를 다시 뒤로 밀어냈던 창대를 이용한 타격.
풍차처럼 회전한 창끝이 투구를 내려치기 직전.
시우의 검이 먼저 휘둘러진다.
-콰앙!
오른쪽 어깻죽지부터 왼쪽 허리까지.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진 롱소드는 백기사의 몸을 휘감듯 양단한다.
롱소드가 유연하게 구부러지며 녹아들 듯한 궤적을 그렸다.
손끝에 그런 감각이 남았다.
시우는 검격을 마무리하며 재빨리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창대가 투구를 스쳤지만 이내 힘이 풀린 손에서 빠져나간 것인지 붕붕 돌며 날아가 주차되어있던 차를 박살내었다.
성공이다.
5대 1의 전투가 될 것을 선제권을 잡고 한 명을 조기 탈락시키며 4대 1의 전투로 만들어냈다.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던 백기사를 이렇게 쉽게 베어내다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아직 끝이 아니네. 집중하게.”
“훕!”
엘로아의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시우의 몸이 핑그르르 허공을 돈다.
-쾅! 쾅! 쾅! 쾅!
동시에 원래 시우가 서 있던 지면에 네 자루의 창이 날카롭게 박혔다.
힘은 곧 질량과 속도에 비례한다.
시우가 힘을 더하기 위해 흙의 원소 마법을 응용해 그림자의 무구에 질량을 더한 것처럼.
백기사가 휘두르는 창도 통상적인 냉병기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하다.
아스팔트를 부수고 바닥 깊이 박힌 창을 뽑아 쥔 네 기의 백기사는 대열을 갖춰 시우에게 창을 겨눴다.
확실히 하나를 상대할 때와 넷을 상대할 때는 마주하는 순간부터 중압감이 다르다.
시우는 등골에 흐르는 땀을 느끼며 적의 모습을 관찰했다.
이길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솟구친다.
일대 다수를 경험한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이미 백화점에서 달려드는 검은 개들을 상대로 50대 1 정도까진 경험이 있다.
하지만 전투에 한해 지성을 갖춘 적이 체계적으로 몰아붙인다면.
과연 당해낼 수 있을까?
시우는 리본 4가닥을 꺼내 들었다.
엘로아와의 수련과 개인적인 마법 연구를 통해 사용 가능한 리본의 개수를 늘렸다.
이거라면 마냥 수 싸움에서 밀리지는 않을 터.
기분 나쁠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갑주를 입은 백기사.
그중 둘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앞으로 달려온다.
나머지 둘은 시우의 양옆을 동시에 점하겠다는 양 사이드로 돌았다.
시우는 리본을 둘로 나눠 완전히 포위되는 것을 방지한다.
한편 검과 방패로는 정면의 적을 상대했다.
-붕! 훙! 훙!
묵직함이 느껴지는 백기사의 찌르기.
엘로아와 수련을 거듭함에 따라 시우의 안목조차 높아진 걸까?
전에는 그저 ‘구불구불하게 휘는 공격’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기술을 접하고 배워온 지금 시점에서 보자 또 다르게 느껴진다.
백기사 일기 일기의 창술은 훌륭했다.
상체의 동작과 혼연일체가 되는 스텝, 찌르고 빼는 타이밍, 손목의 스냅과 회전을 주어 혼동을 주는 페인팅까지.
체계적이고, 전술적이다.
적의 심장을 꿰뚫기 위한 최적의 수를 이상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쾅! 쾅!
번갈아 시우를 괴롭히는 두 기의 백기사.
한 명일 때는 공격을 흘려내고 빈틈을 파고들면 그만이었는데 둘이 되자 그 빈틈이 거의 사라졌다.
하나의 공격이 빗나가면 다른 한 명이 빈틈을 보조한다.
그렇다고 시우가 머뭇거리면 막아내기 까다로운 각도로 동시에 공격이 들어온다.
잘 훈련되고 실전 경험을 지닌 군인을 상대하는 것 같다.
1+1이 2가 아닌 3이 되는 느낌.
더군다나 정면에 둘만이 아니라 측면을 파고드려는 백기사를 리본으로 동시에 상대하다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도저히 제자리에 선 채로 받아낼 수 없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
엘로아는 그 광경을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았다.
계약검을 쥔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간다.
당장이라도 끼어들어서 저 잡것들을 도륙 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열심히 억누르고 있었다.
적기사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수많은 전투 경험과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호문쿨루스이다.
따라서 그 마이너 카피인 백기사 역시 백전노장의 전투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미 일개 호문쿨루스의 전투력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눈은 4개뿐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력의 출력일 뿐, 눈 대여섯개 짜리의 위험도를 아득히 넘어선다.
시우를 능숙하게 몰아붙이는 합격술 역시 마치 한 몸인 것처럼 호흡이 완벽하다.
비록 초격으로 한 명을 격퇴하며 승기를 잡았다지만 이대로 가면 점점 밀리게 될 것이다.
아직은 너무 일렀던 걸까?
빠른 성장세를 보인다고 하여 그에게 거는 기댓값이 너무 컸던 걸까?
-콰아앙!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여태 두 기의 백기사를 제지하던 시우의 리본이 맥없이 바닥에 꽂혀 들어가는 소리다.
더는 방해하는 것이 없어진 백기사 둘은 양 측면에서 시우에게 달려들었다.
2대 1에서도 지지부진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젠 두 명이 추가된다.
역시 아직은 때가 아니다.
엘로아가 시우를 돕기 위해 자리를 박차려던 때.
“어…?”
엘로아의 눈에 시우의 뒷모습이 비친다.
그는 팔에 걸려있던 방패를 거추장스럽다는 듯 내던졌다.
여태 한 손으로 들고 있던 검을 두 손으로 단단히 쥔다.
-챙! 챙!
하나의 궤적을 그린 시우의 검이 부드럽게 두 번의 찌르기를 걷어낸다.
이전처럼 힘으로 찍어누르는 듯한, 혹은 힘과 힘이 맞붙는듯한 격렬한 굉음은 들리지 않았다.
유리잔을 포크로 두드리는 것처럼 맑은소리와 함께 창의 경로가 완벽하게 틀어졌을 뿐이다.
“후우….”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세상은 정적에 물든 것만 같았다.
그 가운데 시우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만이 또렷이 울리고, 한 번의 호흡을 머금은 시우의 검이 춤을 추듯 나선을 그린다.
필요 없는 힘 따위는 일절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춤사위.
지금껏 검을 쥔 무인들이, 강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상상 속에서만 그리며 죽어갔을 순수하고 아름다운 검로(劍路)가 달빛을 부순다.
종횡무진 찔러오는 창날 사이를 여유롭게 누비는 그의 몸놀림.
왈츠를 추는 것처럼 연달아 바닥을 두드리는 발놀림과 흐르는 듯 춤의 일부가 된 검.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검무에 심취한 그의 모습은 살벌한 전투 한가운데 있다기엔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엘로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그의 뒷모습 위로 익숙한 누군가가 오버랩된다.
“라피…”
검에게 사랑받았던 아이.
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던 아이.
만약 마녀가 되었더라면 엘로아를 한참이나 뛰어넘었을 천재 중의 천재.
그녀의 환영이 흐릿하게나마 시우의 것과 겹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교착양상.
그중에서도 백기사 쪽으로 천천히 기울던 형태가 일변한다.
곡예처럼 자유로이 허공을 누비던 두 자루의 창이 올곧은 검로에 휘말려 나뭇잎처럼 흐트러진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엘로아는 일순 다급해졌다.
마침내 리본을 완전히 뿌리친 백기사 둘이 추가로 전투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한 명은 7시 방향 측후면을, 다른 하나는 완벽한 사각을 노려 창을 찌른다.
백기사가 휘두르는 창은 모태인 ‘붉은가지’와 비슷한 효과를 공유한다.
붉은가지 특유의 왜곡장을 형성하는 것까지는 무리인 듯 보이지만 마력의 조성과 흐름을 끊어낸다.
제아무리 두텁게 그림자의 갑옷을 입고 있더라도 직격하게 된다면 종잇장처럼 가볍게 찢겨나갈 것이다.
일촉즉발의 순간 시우의 발이 기다렸다는 듯이 땅을 박찬다.
단순히 도약과는 다르다.
발경의 묘리를 시현하여 있는 힘껏 몸을 회전시키기 위한 준비 동작.
아스팔트는 파열하며 단말마를 내지른다.
음속의 벽을 넘어 검 끝에서 터져 나오는 충격파.
허리 높이로 휘둘러진 검이 정면의 끈질긴 추격을 힘껏 뿌리침과 동시에, 후방과 측면에서 기습을 가해온 백기사를 통째로 썰어냈다.
기습을 해오는 자는 도리어 반격에 취약해진다.
시우는 의도적으로 기습을 허용하고 카운터를 날릴 타이밍을 가늠하고 있던 것이다.
호기롭게 창을 내지르던 백기사의 상반신이 나란히 공중에 떠올랐지만 시우는 회전의 기세를 죽이지 않았다.
-펑!
회전 중 흐트러진 몸을 지탱한 것은 두 장의 리본.
격전으로 자갈밭처럼 변해버린 아스팔트에 검은 리본이 파고든다.
까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면을 움켜쥐듯 몸을 지탱한 리본 덕에 시우는 또 한 번의 회전하는 참격을 구사할 수 있었다.
두 번째의 회전.
검의 궤적이 백기사의 투구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정도의 일이었을 것이다.
-펑!
그것만으로 투구는 철퇴에 얻어맞은 알루미늄 캔처럼 터져나갔다.
남은 적은 하나.
백기사에게는 감정이 없다.
순식간에 동료 셋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마침내 완전히 드러난 시우의 옆구리를 업핸드로 찍어가는 백기사.
이 상태라면 회피, 방어, 반격 모두 불가능할 것이다.
-콰직!
그러나 땅에서 솟구친 두 가닥의 리본이 백기사의 몸을 헝겊인형처럼 꿰어냈다.
그 힘에 꿰뚫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허공 높이 솟구친 백기사가 급소를 꿰뚫린 채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렸다.
리본을 땅에 박아 회전할 때 함정처럼 설치해 두었던 것이다.
시우가 마지막 백기사를 처치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엘로아의 발치에 조금 전 공중으로 떠올랐던 백기사의 상체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네 기의 백기사를 처리한 것이다.
동시에 완만하게 흐르는 듯했던 시간도 원래의 속도를 되찾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시우의 완벽한 승리였다.